뉴욕에서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한민족의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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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한민족의 열정
  • 이준동 차장
  • 승인 2013.04.0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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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외길 인생을 걸어오며 기어코 성공을 이뤄낸 그의 이야기

다이아몬드 유통의 메카를 빛내는 한인

김남표 대표가 이끌고 있는 킴스보석은 ‘한인 다이아몬드 1번지’이자, ‘한인 보석기술의 사관학교’로 명성이 높은 업체다. 지난 1980년 설립된 킴스보석은 미 동부 일원의 한인 보석업계의 새 장을 연 원조회사로 기록돼 있다.

초창기에는 퀸즈 플러싱 자택에서 보석 세공업으로 시작했으며 이듬해 ‘킴스보석공장’이라는 이름으로 맨해튼 47가 다이아몬드 디스트릭 내에 진출해 쇼케이스 한 칸짜리 규모의 공장을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시장에 뛰어 들었다.

한인 최초의 세공공장으로서 이 지역 터줏대감인 유태인 도매상과 소매상을 상대로 영업을 하던 킴스보석 공장은 설립 2년 만에 세계 제1의 보석 소매상 ‘티파니’에도 납품할 정도로 뛰어난 기술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실제로 타 세공공장에서 처리 못하는 세공제품들 대부분이 킴스 보석공장으로 몰려들 정로 이 분야에서만큼은 자타가 공인하는 ‘명인으로 일깜치 우뚝 섰던 것이다. 이때 쌓은 실력과 신용을 인정받아 김남표 사장은 세계적으로 몇 안되는 한국인 ’다이아몬드 딜러 클럽‘(DDC) 멤버가 됐다.

‘다이아몬드 디스트릭’은 좋은 보석을 싼 값에 살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20개의 보석상 아케이드, 2,600개 이상의 개인 보석상들이 저마다 특화된 보석들을 선보이고 있다. 이 거리의 보석을 모두 합치면 200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

킴스보석이 ‘한인보석기술의 사관학교’라는 말을 듣는 것도 기술력을 우선하는 경영과정에서 생겨났다. 27년 간 세공 및 영업기술을 배워 독립해나간 전문기술자들만 무려 50여 명에 달하고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김 대표는 고객에게 판매된 제품은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원칙으로 제품보증은 물론 무료 수리 등 철저한 애프터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또한 고객들이 원할 때 언제라도 재구입해 줌으로써 고객들에게 금전적 편의를 최대한 제공하고 있다. 

김남표 대표는 좋은 보석을 싸게 거래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뉴욕을 찾는 한국인들도 킴스보석을 자주 찾는다. 김 대표는 “한인경제가 몹시 어렵고 결혼을 앞둔 자녀들에게 결혼예물은 부담이 간다”며 “킴스보석을 찾아주면 저렴한 가격대의 보석을 안내하고 형편에 따라 검증된 우수한 보석을 장만하도록 권해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허밀청원(虛密淸圓)의 고사를 되새기며

이민 1세대인 김 대표의 지난 삶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이국땅에서 오늘날의 킴스보석을 일궈내기까지는 극한의 의지와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고국을 떠나왔던 30여 년 전을 떠올리며 현재와 비교했을 때 굉장히 발전한 모습을 보며 한국인의 근면과 노력에 새삼 박수를 보낸다며 여전한 애국심을 내비쳤다.

그는 이렇듯 유전자 속에 각인된 한민족의 긍지와 성실함으로 모든 시련을 이겨왔노라고 술회했다. 작게는 생활습관에서부터 크게는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미국생활은 어려움과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쉽게 좌절하지 않고 포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한민족의 긍지로 버텨왔노라고 말했다.

또한 그의 성공비결은 세계의 수도로 불리는 뉴욕에서 한눈을 팔지 않고 오직 한 우물만 파 온 장인 정신에서 엿볼 수 있다. 무엇이든 잘 되지 않으면 샛길을 찾기 마련인 요즘 세태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김 대표만의 뚝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세계적인 불황에 미국 역시 서브프라임 모지기론 사태 이후 경제가 많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불황에 맞서 품질은 더 높이고 마진은 더 줄이는 ‘박리다매’ 정신으로 고객과 상생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미국생활이 어렵다고 고백했다. 매일매일 시련을 겪는다고도 했다. 하지만 현지법을 제대로 몰라 곤란을 겪어야 했던 과거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것이라고 말했다.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이 그를 버티게 하는 힘이며 킴스보석의 명성을 뒷받침해 주는 근간이라고 밝혔다.

“고생한 만큼 더 배운다는 자세로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아, 오늘도 무엇인가 하나를 배우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하지요.”

김 대표의 이러한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마인드는 많은 거래처와 고객들을 불러 모으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특히 신뢰를 생명으로 하는 귀금속 비즈니스에서는 신용이 가장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업체와 고객 간의 신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직원과의 신뢰, 가정 내부에서의 신뢰도 중요하다고 김 대표는 강조했다.

게다가 정확한 정보를 모으고 시장조사를 진행함에 있어서 그의 성실함이 돋보였다. 뉴욕이라는 거대한 시장에서는 얕은 술수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30년 간 맨해튼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그의 근면과 성실이 얼마나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었는가를 대변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끝으로 김 대표는 이민 1세대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실수와 착오가 많았지만 더욱 전문화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 왔다고 자부했다. 또한 2세들에게 이를 계승하여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끝없이 모색하고 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허밀청원(虛密淸圓), 나쁘고 묵은 마음을 비우고 맑고 겸손한 마음으로 되풀이되는 나쁜습관을 버린다라는 말을 자주 되새겨 봅니다. 미국생활이 점점 익숙해지고 사업이 자리를 잡아갈수록 제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덕목을 가르쳐 주는 고사라고 생각하거든요.”

글로벌 시대가 도래해 세계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그 좁은 틈바구니에서 성공하기 위해 많은 한인들이 치열한 경쟁의 전장으로 뛰어들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킴스보석으로 세계의 수도 뉴욕에서 일가를 이룬 김남표 대표를 곁에서 지켜보며 어렴풋이 성공의 법칙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결코 거창하거나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끝없이 스스로를 가다듬으며 사람들을 보듬어내는 따스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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