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은 22살의 청년이 되었다. 모진 세월을 이겨낸 그는 그동안 갈고 닦은 기술을 바탕으로 기술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28살 무렵에는 어엿한 사장이 되었다. 당시 태광산업의 이영임 회장이 그의 고객이었으며 흥국생명과 광진섬유의 납품까지 맡게 됐다.
태광산업의 이 회장의 권유로 사내 사무실 마련을 제안 받은 일도 있었으나 청년은 이를 거절했다. 청년에게는 그것이 성공결과가 아니라, 여전히 밟아야 하는 과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창업한 양복점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게 아니었다.
서울 소공동에서 재단을 배운 후 김정수 씨와 합자하여 개업한 것이었는데,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는 중풍으로 자리를 보전하고 누워 있는 상태에서 5부 이자를 빌려 창업한 것이었다. 이는 우리나라 양복 역사의 산 증인이자 이 시대의 장인으로 통하는 프린스 양복점의 설립자 온용남 회장의 이야기다.
“이기화 님과 이기택 님의 옷을 맞추어 주게 되고 이 인연으로 선경에서 기성복 제안을 다시 받았지만 또 거절했죠.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초창기 시절 온 회장은 모성기 선생과 모영기 선생에게서 기술을 배우며 모영기 선생의 조언으로 이미 돈을 벌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재단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통금이 있던 시절이었기에 승합자동차에 실려 퇴근하던 기억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창업 3년만에 김종필 씨가 개최한 기술대회에서 최고 기술자대상을 받게되었는데 이는 현재의 기능장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그로 인해 동료들 사이에서도 재단을 해주었고 신문매체에 소개되면서 유행의 선두에 서기 시작했다.
온 회장은 당시 양복업계의 문제는 대표들의 무분별한 사치풍조에 있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이를 거울삼아 늘 성실한 자세로 2번째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가장 힘든 시기라 할 수 있는 5월에 시작하여 첫 번째 쓴 아픔을 딛고 모두가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당시 업계의 문제점들을 파악해 원단이 잠겨있는 현실과 4대 문 안에서의 유행경향이 밖에서는 통하지 않음을 알고 프린스 스타일의 신 유행을 만들어냈다.
당시 최초로 찾아가는 공격영업마케팅을 시작하여 개개인들에게 유행을 만들어주기 시작했고 2차 서비스인 품질보증서비스를 보편화 하여 서비스의 선두를 일궈나가 고정고객들의 입소문이 되어 많은 고객을 확보하게 되었다.
차별화된 전략의 일환으로 전문 서비스 인원을 고용하여 서비스의 첨단화를 일구어내 새벽부터 밤까지 업무를 이어가는 날이 다반사였다. 그 후 조성옥 차관의 의복 맡는 기회를 얻어 거의 대부분의 검사들의 의복까지 맡으며 간부들의 유행까지 컨설팅하게 되었다. 당시에 번 돈으로 조그마한 건물을 살 수 있었을 정도로 꽤 큰 성공을 이뤘다.

한번은 태광의 회장이 전화를 걸어와 “직원들이 우리 회사 제품은 입지 않고 외국과 삼성만 입고 있네요”라며 “들어와서 옷좀 하세요”라는 제안을 받게 됐다. 이 인연으로 태광 사모님의 탁월한 디자인감각과 안목이 프린스 발전에 많은 도움받게 됐다.
온 회장은 살아 있는 양복계의 거장이자 산증인으로서 요즘의 양복 트렌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요즘 맞춤양복에 대해 “양복도아니다”며 잘라 말했다. “기성복은 양복도 아니었으나 광고에 의한 매체의 중독성이 구매자들의 감각을 퇴보시켰다”는 말도 덧붙였다.
과거 온 회장님 주고객은 외국인과 국내 굴지의 대기업 경영자들이었다.
70년대 중동 붐이 한창이던 시절, 테헤란로에서 일을하던 중 재미난 일화가 하나 있다고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석유회사 부사장이 국내호텔이 빈약하여 일본호텔로 숙소를 옮기기 전 신라호텔에 투숙할 때의 일이다.
주위의 추천을 받아 부사장의 옷을 해주기 위해 그를 만나게 되었다. 덩치가 하도 커서 당시 받던 가격보다 2배를 더 청구하였고 그 청구한 금액이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어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개해준 분께 너무 많이 받은 것 같아 양해를 구하게 되었는데, 정작 담당자는 적당한 가격이었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온 회장으로서는 외국의 물정을 잘 몰랐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 계기였다. 다음날 다시 들어가 사우디 정통복장까지도 의뢰받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사우디정통복 제조자가 되었다.
당시 결제는 여행자수표라는 것을 받게 되었고 외환은행에서도 환전이 되지않아 외환은행 본점에서 다시금 사우디로 발송하게 되고 다시금 6개월이 되어서 현금으로 받게 되는 웃지 못할 일화를 겪기도 했다. 온 회장은 그 후 입국하는 분들의 옷을 전담하여 만들어주는 디자이너 온이 되었다.

온 대표는 향후 고객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 매일같이 해외 자료 및 연구개발을 위해 노력중이며, 고객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전국에 매장을 더욱 확대 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해외 경험을 바탕을 토대로 해외 유니폼 시장에도 한발 한발 앞으로 다가서고 있다.
가업을 이은 프린스의 정신은 이제 전문프랜차이즈 전문점을 시작 하게 되었으며 며느리인 설혜윤 대표는 전문적인 유니폼 사업시장에 진출하였다. 유니폼사업 분야는 63빌딩, 여수·제주 아쿠아리움, 한화리조트 등에 디자인하여 유니폼을 납품 중이며 국내의 유통사와 호텔 그리고 박람회 까지 시장을 넓혀 가고 있다. 세계시장을 겨냥한 디자인으로의 발전이 우리나라 유니폼의 발전에 이바지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