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18일 오전 9시53분 대구지하철 중앙로역을 지나던 열차가 화염에 휩싸였다. 불은 12량의 지하철 객차를 뼈대만 남긴 채 모두 태워버렸고 이로 인해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당했다.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최대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올해는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10주기가 되는 해이다.
[2003년 2월18일]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대규모 사상자를 낸 대구지하철 화재의 범인은 56세의 김대한으로 그는 사건 당일 9시53분12초경 대곡역에서 안심역 방향으로 운행하던 1079호 열차의 첫 번째 칸 경로석에 앉아 있다 열차가 중앙로역에 진입하고 있을 때 라이터와 페트병 2개에 나눠 담은 휘발유 2리터로 불을 질렀다. 당시 주위의 승객들이 그를 제지했으나 불이 붙은 페트병을 그대로 내던졌다.
제1079열차는 중앙로역에 정차중이어서 기관사를 비롯해 승객들이 대부분 빠져나갔다. 그러나 기관사가 지하철 사령에 화재 사실을 즉각 보고하지 않았고, 사령은 화재 경보가 울리고 있는데도 무시한 채 운행 중지 조치 등을 취하지 않았다. 그 사이 제1079열차의 불길이 반대편 선로에서 진입해 전차한 제1080열차로 옮겨 붙었다. 제1080열차의 기관사와 지하철 사령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는 동안 불은 맹렬히 번졌으며 이 열차에서 대부분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피해를 더욱 부추긴 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늦장 대응한 것이다. 사령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1080호 열차에 떠나라는 지시를 내렸을 땐 이미 화재로 역내 전기가 끊겨 전동차가 떠날 수도 없었고 역 안 전등도 모두 꺼진 뒤였다. 사령에서 1080호 열차 기관사에게 다시 급전을 시도해 출입문 개방과 승객에 대한 대피 유도를 지시했으나, 기관사는 승객의 안전을 확보·확인하지 않은 채 마스터키를 빼들고 도망가 버렸고 출입문이 닫히면서 열차 안에는 142명의 승객이 갇히게 되었다. 차량에는 출입문의 비상 개방 장치가 갖춰져 있었으나 위급한 상황 속에서 사용할 줄 아는 승객이 없었다. 차내에 있던 승객들이 유독가스에 질식하거나 불에 타 사망했다.
사고 다음날 정부는 대구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으나, 사고 직후 대구광역시와 지하철 종사자들이 사고를 축소·은폐하고, 현장을 훼손하는 등 부실한 대응으로 피해가 확대된 것으로 밝혀져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방화범과 지하철 관련자 8명이 구속 기소되었으며, 방화범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했다.
범인 김대한의 방화 사유는 심한 우울증 후 정신질환이 심해진데 따른 판단력 상실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김대한의 아들은 대구 중부경찰서에 출두해 “아버지가 심한 우울증을 앓았으며, 남의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등 정신적으로 심한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 사고로 지하철 관련기관 사이의 공조체제 구축하고 사고현장 탐색 및 복구, 훼손된 시신의 개인식별, 유족지원 등 대형참사와 집단사망에 따른 각 과정의 체계화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대구광역시에서는 이 참사를 교훈 삼아 재난에 대처하는 능력을 높이고 안전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를 건립, 2008년 12월 개관했다.
[1975년 2월4일] 철의 여인 대처, 영국 보수당수 선출
“여성의 카리스마는 돈과 명예보다는 자신이 지닌 내면, 외면의 이미지로부터 발생한다.”
유럽 최초의 여성총리 마가레트 대처는 영국에서 20세기 들어 총리직을 3번 연임한 최초의 인물로 그녀의 재임기간은 1827년 이래 가장 길었다.
식료품 상인의 딸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의 서머빌 칼리지를 졸업하고, 서머빌 칼리지에서 문학사(1946)·이학사(1949)·문학석사(1950) 학위를 취득했고 옥스퍼드대학교 보수연합회 최초의 여성회장이 되었다. 졸업 후에는 연구화학자로 일했다. 1951년 D.대처와 결혼하여 쌍둥이 남매를 둔 대처는 1959년 보수당 후보의 당선이 비교적 확실한 북런던 핀츨리 선거구에 공천되어 의회에 진출, 1961~1964년 연금·국민보험부 공동 정무차관을 거쳐 1970~1974년 교육·과학장관을 지냈다. 여자로서 보수당 각료가 된 예는 그전에 단 한 번밖에 없었다.
대처는 1974년 보수당이 2차례의 총선에서 패배한 뒤 1975년 히스의 뒤를 이어 당수에 올랐으며, 1979년 노동당의 L.J.캘러헌 내각이 의회에서 불신임결의를 당하고 해산된 직후의 총선거에서 대처가 영도하는 보수당이 승리함으로써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에 취임했다.
집권 후 긴축재정을 실시해 영국의 경제부흥을 이룩했고, 대외적으로 대처는 식민지통치에서 이탈한 로디지아가 1980년 독립 짐바브웨로 발족하는 것을 도왔으며 1982년에는 아르헨티나가 10주 동안 점령했던 포클랜드 제도를 전쟁을 통해 재탈환하는 데 성공하며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다.
전쟁 중에 그녀가 보인 과단성과 지도력은 1983·1987년 실시된 총선거에서 보수당이 승리, 3기를 연임함으로써 영국 사상 최장기 집권의 총리가 되었다. 그 후 과감한 사유화와 노조의 와해, 교육·의료 등 공공분야에 대한 대폭적인 국고지원 삭감 등 획기적인 정책 추진과 독단적인 정부운영 등으로 ‘철(鐵)의 여인’이라 불리게 됐다.
집권 후반기에 이르러 ‘대처 혁명’은 재정·산업의 경제분야로부터 교육·보건·주택공급의 민영화를 통하여 사회정책부문으로 확산되어갔다. 대처는 또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의 적극적인 참여와 독자적인 핵억지력의 확보를 공언했는데, 전통적인 핵·방위전략을 부정하는 노동당의 태도에 비해 보다 큰 국민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1984년 서식스 브라이튼에서 아일랜드 분리주의자의 폭탄 테러로 죽을 고비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북아일랜드를 영국령으로 보유하려는 영국정부의 기존노선을 고수했다. 1990년 유럽통합 반대입장을 고수하다가 당 지도부의 반발을 사게 되어 자진 사임했으며, 1991년 5월 정계를 은퇴했다. 1992년 남작 작위(케스티븐의 대처 남작)를 받고 귀족회의인 상원의원으로 활동을 재개한 대처는 1986년 5월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1969년 2월13일] 위장간첩 이수근 체포 발표
1969년 2월13일 남한으로 귀순했던 이수근이 위장간첩으로 밝혀지며 한국정부의 정보요원에 의해 체포 돼 군용기편으로 압송됐다. 북한의 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던 이수근은 1967년 3월22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번위원회를 취재하다가 회의가 끝나자 UN군 측 대표인 준장 밴 클러프트의 승용차에 뛰어올라 탈출에 성공했다. 북한의 언론계 거물로서 그의 귀순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무사히 서울로 탈출한 이수근은 “한없는 자유 속에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는 자유대한에 마음이 끌려 1년 전부터 월남을 꾀해왔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거액의 정착금과 국민 성금을 받았고 전국 순회강연 및 TV, 라디오 방송을 통해 북한실정을 폭로해 왔고 이듬해에는 대학 교수와 결혼식도 올렸다. 하지만 북한 실정을 폭로하는 척하면서 한국의 각종 기밀을 수집해 북한으로 보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그의 행동에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한국정부는 그를 주시하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한국에 있을 수 없음을 안 이수근은 1969년 1월 남한에 살던 본처의 조카 배경옥과 함께 위조 여권을 이용해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홍콩과 방콕을 거쳐 베트남에서 북한으로 귀환하려는 한국정부의 정보요원에 의해 체포, 군용기편으로 압송됐다. 그리고 검거된 지 6개월 만에 사형을 당한다.
그로부터 39년이 지난 2008년 12월19일 이수근이 위장간첩이 아니었다는 취지의 판결이 내려졌다. 21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본처의 조카 배경옥 씨가 낸 재심 신청에 대해 법원은 “이 씨의 사형 집행 목격자에 따르면 그가 ‘나는 북도 남도 싫어 중립국에서 살려고 했고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한 점 등을 종합할 때 그를 위장간첩으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또 “이들에 대한 공소사실은 중정의 불법 구금과 고문에 의해 조작됐으며 법원도 오판을 했다”고 덧붙였다.
1989년 처음으로 문제 제기된 이수근이 간첩 논란은 이로써 종지부를 찍게 됐다.
한편, 이대용 공사가 김형욱 정보부장으로부터 들었다는 얘기는 당시의 자유대한이 어떤 나라였는지, 그리고 왜 이수근이 남한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단면으로 드러내 준다.
“이수근이가 (이미) 2중 간첩이라고 발표했는데 그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은 李공사가 더 잘 알지 않소. 그렇다고 이수근을 살려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나와 당신을 포함하여 몇 사람밖에 안 되니 절대로 보안에 붙여야 합니다.”
[1935년 2월14일] 린드버그의 아들 유괴범 사형선고
1935년 2월14일 미국 역사상 제법 ‘비극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는 ‘린드버그 아들 유괴사건’에 관한 세기의 재판이 열린다.
1932년 3월 대서양을 최초로 단독 비행한 미국의 영웅 찰스 린드버그의 20개월 난 아들이 홀연히 실종됐다. 유괴범은 린드버그에서 5만 달러를 내놓으라고 협박했고 린드버그는 범인에게 몸값을 지불했지만 5월 아이는 린드버그의 자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됐다. 범행 2년 뒤 브루노 리처드 하우프트만이라는 목수가 범인으로 체포됐고 1935년 2월14일 공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같은 해 4월 뉴저지주 트렌튼에서 전기의자로 처형됐다.
미국에서는 린드버그의 유괴 사건을 계기로 어린이 유괴범에게 최고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린드버그 법이 제정됐으며 이 사건은 영화 마크 라이델 감독의 <린드버그 유괴사건 1996>로도 만들어져 전 세계인을 안타깝게 했다.
한편, 아들의 죽음으로 미국에서의 삶에 염증을 느낀 린드버그는 아내와 둘째아들 존을 데리고 영국으로 이사했다.
[1968년 2월20일] 재일동포 권희로 사건
재일한국인 권희로 씨가 야쿠자 2명을 라이플총으로 사살했다. 1968년 2월20일 권희로는 시즈오카현 시미즈 시에서 야쿠자 2명과 말싸움을 하게 된다. 채권자의 청부를 받아 빚독촉을 하던 상대편의 일본인 야쿠자가 그에게 “조센진, 더러운 돼지새끼!”라고 모욕하자, 이에 격분한 그는 총으로 이들을 살해했다. 그는 다이너마이트와 실탄을 갖고 도주, 사건현장에서 45㎞ 떨어진 시즈오카현의 가와네 온천장에 있는 후지미야 여관에서 여관 주인과 투숙객 13명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하다 4일 만인 24일 검거되었다.
이 인질극은 당시 TV 등을 통해 생생하게 중계되었고, 그는 “경찰관의 한국인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며 TV를 통해 경찰의 사과를 받아내 파문을 일으켰다. 체포된 후 8년간의 재판 끝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구마모토(熊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체포 당시 그의 어머니 박득숙은 그에게 “일본인에게 붙잡혀 더럽게 죽지 말고 깨끗이 자결하라”면서 흰 한복을 건네기도 했다.
그는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와 멸시에 대한 정중한 사과를 요구하는 등 재일동포의 인권문제를 부각시켰다. 시즈오카현의 경찰본부장은 사죄의 방송을 했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일본에서는 건국 이래 4대 테러사건으로 꼽히기도 한다.
권 씨는 체포된 뒤 무기징역형을 살다 1999년 9월7일 31년 만에 석방돼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권희로의 이야기는 1970년 ‘분노는 폭포처럼’이라는 책으로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고, 1991년 기타노 다케시 주연의 ‘김의 전쟁’과 1992년 유인촌 이혜숙 주연의 ‘김의 전쟁’이란 영상물로 제작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