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월21일 북한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서울에 침투했다. 이들은 1968년 1월13일 북한군 정찰국장 김정태에게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작전 지시를 받고 18일 자정을 가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돌파했다. 그러나 이들은 세검정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에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는 한편,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살상 당했다.
[1968년 1월21일] 1.21사태, 북한 특수부대 서울 침투
1968년 1월18일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은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 소속 31명은 국군복장에 수류탄과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이들은 서부 전선의 미군 담당 군사지역에 잠입해 하룻밤을 숙영(宿營)한 후 이튿날 8시 30분경 임진강의 얼음판을 횡단, 당시 경기도 고양군 법원리의 삼봉산에서 2일째 숙영을 했다.
그리고 20일 앵무봉을 통과한 이들은 비봉, 승가사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밤 10시 서울시내 세검동 파출소 관한 자하문 초소에 이르렀다. 하지만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리자 이들은 “방첩대원들이다”, “신분증은 볼 필요가 없다”, “우리부대로 가자” 등의 말을 하며 계속 행진했다.
약 400여m를 더 행진했을 무렵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병력과 첫 접전이 벌어졌다. 이들은 검문경찰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했다. 자동소총에 실탄과 수류탄을 몸에 지니고 뿔뿔이 흩어져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현장을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경찰관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지나가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 길의 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서대문구 홍제동 민가에서는 한 시민이 게릴라와 격투를 벌이다가 총격으로 사망하는 등 이날 밤 민간인 5명이 살해되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우리 측 군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갖추고 현장으로 출동, 28명을 사살하고 나머지 2명은 도주, 1명을 생포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날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는 그동안 김일성의 허위선전에 속아 살아왔음을 깨닫고 한국으로 귀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을 창설과 학생군사훈련 실시를 하게 되었다.
[1948년 1월4일] 1948년 62년 만에 미얀마 독립
1948년 1월4일 새벽 4시20분을 기해 미얀마가 62년 동안의 영국지배를 벗어나 버마 연방으로 독립했다. 미얀마는 19세기에 3차례에 걸쳐 영국과 전쟁을 해오다가 1886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 후 미얀마는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는데 인도가 한주였기 때문에 인도 국민회의 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20년에 랭군 대학을 설립했고, 이곳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영국의 지배에 반대한 랭군 대학 중심의 대학생 투쟁을 ‘타킨운동’이라고 부른다. 타킨이란 미얀마어로 주인이란 뜻이며 서로 미얀마의 주인이 되자고 서로를 타킨이라고 불렀다. 타킨 운동 지도자들은 가장 열렬한 반영운동의 세력이었다.
1921년에 설립된 청년불교협회는 외세의 지배에서 불교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꾀했고, 세계적으로 경제공황의 영향이 컸던 1930년대 사야 산이 고대 왕국을 부활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으나 실패했다.
1931년 말 런던에서 회의가 열려 인도분리주의자와 인도분리 반대파간의 격론이 있었으나 바 모의 노력으로 1937년 인도로 부터 분리되게 되었다. 1939년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타킨운동의 지도자들은 바 모와 연합했지만 바 모와 우 누는 체포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 미얀마의 급진적 지도자들은 일본과의 협력으로 독립을 하려고 했다. 특히 아웅산은 30여 명의 타킨들을 일본으로 밀파, 6개월간 군사 훈련을 받게 한 후 1941년 방콕에 모여 미얀마 독립 쟁취를 결의했다.
이들은 일본군이 진주하자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일본에 적극 협력했다. 아웅산과 네윈 등은 순진하게 일본의 미얀마 독립운동을 믿었지만 미얀마에 진주하게 된 일본군은 정복자 행세를 하며 약속을 전혀 이행하지 않았고 타킨 지도자들은 미얀마가 일본에 속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은 버마로드의 차단이 목적일 뿐 버마의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애초 약속과는 달리 버마에서 친일인사로 하여금 군정을 실시하고 영국보다도 더한 악랄한 식민통치를 자행했다. 결국 미얀마의 민족주의자들은 다시 영국과 접촉했고 1944년에는 반일범국민연합이 결성, 1945년 3월에는 아웅산이 이끄는 미얀마 군대가 공식적으로 연합군에 참여했다.
영국은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아웅산 등 미얀마 독립의용군의 안내를 받아 1945년 3월 또 다시 버마로 진군하여 일본을 패퇴시킨다. 일본을 몰아낸 아웅산 장군은 10만 명에 달하는 미얀마 독립의용군들을 세력으로 해서 영국과 독립교섭을 시작한다.
결국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1947년 아웅산과 애틀리협상으로 1948년 1월 미얀마는 완적 독립을 획득했다.
4일 새벽 4시20분 드디어 미얀마 정부청사에 휘날리던 영국 국기가 내려지고 대신 미얀마의 국기가 게양된다. 미얀마가 62년 동안의 영국지배를 벗어나 버마 연방으로 독립하는 순간이다.
[1982년 1월5일] 야간통행금지 해제
1982년 1월5일 새벽 4시를 기해 1945년 9월부터 37년간 계속된‘야간통행금지 조치’가 일부 전방의 접적지역과 후방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해제되었다. 정부는 이날 국무회의에서 통금해제안을 의결, 전국 50개시, 139개 군, 1,441개 읍면 중 53개 군 292개 읍면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했다.
이로써 그 동안 유보되었던 국민의 권리가 회복되었고, 인신 자유의 구속 수단이 줄어들었으며, 한국 사회는 군사정권의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서 다양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첫걸음의 발판을 마련했다.
야간통행금지는 광복 후인 1945년 9월 미 군정사령관 존 R.하지(John R. Hodge) 중장이 오후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을 제한한‘군정포고 1호’를 발동하면서 시작됐다. 이 군정법령이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계승되어 그때마다 치안 상황에 따라 시작 시간이 밤 11시로 단축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 밤 8시부터나 10시부터로 연장되기도 하면서 지켜져 왔다.
이 제도의 전면 해제 건의안이 국회 내무위원회에서 가결된 것은 1981년 12월10일이었고, 이듬해 1월5일 드디어 해제조치를 단행했다. 야간 통행금지의 상징인 서대문 로터리를 가로막았던 육중한 바리케이드가 걷히고, 이 해제조치에 연이어 중고교생의 두발 자율화와 교복 자율화가 시행됨으로써 자유화·대중화 시대의 바람이 일어 인적이 끊어졌던 한밤의 거리가 인파로 넘치고, 중고교생들의 장발이 늘어나는 등 새로운 사회 풍속도가 나타났다.
[1920년 1월16일] 미국 금주법 시행
미국에서 모든 종류의 술 제조를 금지하는‘금주법’이 발효됐다. 미국의 금주법은 1919년 1월16일 미국 의회에서 미국 헌법 18차 수정안을 비준해 제정한 법으로 주류의 양조·판매·운반·수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반독일 정서 알코올 중독이나 범죄를 줄이기 위한다는 것이 법의 제정 명분 및 목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양조업에 종사하는 독일 이민에 대한 견제를 위한 것이었다.
당시 이 법으로 술을 제조하던 양조 시설과 술병들이 모두 파기됐다. 그러나 미국의 금주법은 단속인력이 부족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금주법 시대라고 하는 금주법 시행기간 동안 이른바 재즈 에이지, 광란의 20년대, 무법의 10년이라고 하는 시대가 탄생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술을 밀수·밀송·밀매하는 갱이 날뛰었다. 이 시기는 법이 실시된 1920년 시작되어 철폐된 1933년에 끝났지만 실제로는 1929년 공황이 몰고 온 이른바‘월가의 대폭락’으로 사실상의 끝을 맺었다.
[1901년 1월22일] 빅토리아 영국 여왕 사망
빅토리아(Victoria, 1819년 5월24일~1901년 1월22일) 영국 여왕이 사망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강하고 소박하며 정직한 성격으로 내각의 보고서를 한 자, 한 구절까지 면밀히 검토하는 성실한 왕이었다.
선거법 개정, 아프가니스탄전쟁, 중국과의 전쟁, 아일랜드 문제, 초등 교육법, 크림전쟁, 남아프리카전쟁 등 국내외의 중대한 문제들을 교묘하고 과단성 있게 해결해 제국의 번영을 실현시켜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산업혁명을 끝낸 영국이 전성시대를 구가하며 19세기 대영 제국이 번영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왕으로 그가 정치를 하는 동안 영국은 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여왕의 치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64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그의 재위 기간은‘빅토리아 시대(The Victorian)’로 통칭되며‘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 제국의 최전성기와 일치한다.
빅토리아는 입헌 군주로서‘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랐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으나, 당시 영국 사회에 널리 퍼진 왕의 화목한 가정에 대한 이미지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도덕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켄트와 스트래선의 공작 에드워드와 독일의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녀 빅토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빅토리아는 윌리엄 4세가 서거하자 그의 뒤를 이어서 1837년에 즉위했다. 하노버 왕가가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즉위와 동시에 조지 1세 때부터 계속된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관계는 끝나게 되고, 그는 영국 왕위만을 계승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1840년 2월 빅토리아의 외사촌이며 독일계 왕족인 작센 코부르크 고타의 앨버트 공자와 결혼 했다. 앨버트 공작은 빅토리아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되었다. 앨버트와의 사이에 4남 5녀를 두었으며 대부분의 자녀들이 유럽의 주요 왕족과 결혼하여 말년에는 ‘유럽의 할머니’로 불렸다.
한편 그는 혈우병 보인자였고, 이 유전자가 유럽의 왕가로 퍼져 러시아 왕가의 몰락을 부르기도 했다.
[1933년 1월30일] 1933년 히틀러, 독일 총리 취임
독일민족 우월사상으로 무장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1889.4.20~1945.4.30)가 독일 총리가 됐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공황과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1933년 1월30일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1933년 7월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했다. 히틀러는 이듬해 8월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대통령의 지위를 겸해‘총통 및 수상(Fhrer und Reichskanzler:약칭은 총통)’이 됐다.
히틀러는 경제적·정치적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그는 민주공화제시대에 비축된 국력을 이용해 국가의 발전을 꾀했고 외교계·경제계·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600만 명이 넘는 실업자들을 군수산업과 토목사업에 흡수시키고 세습농장법을 제정해 대농과 중농을 보호하며 식량의 자급자족화를 도모하는 등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다.
또 군비를 확장해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1당 독재를 실시해 나치스친위대(SS)를 강화하고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를 강제수용소에 가둬 혹독한 학대와 살육을 자행했다.
히틀러는 이를 기반으로 1939년 9월 독일민족에 의한 유럽 제패를 실현하고, 대생존권(大生存圈)을 수립하기 위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의 작전지령이 처음에는 효과를 거두어 프랑스에서 크게 승리했지만 스탈린그라드의 패전 전후부터 현실을 무시한 지령을 남발해 패전을 거듭했다.
1944년 7월20일 과거에 그를 돕던 장군들과 보수제정파의 정치가들이 반란을 기도했으나 히틀러에 대한 암살계획이 실패했다. 그러나 나치스의 퇴세는 이미 만회할 길이 없었고, 1945년 4월29일 그는 베를린의 지하호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날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