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4년 넘게 지속돼 왔던‘박근혜 대세론’을 막을 야권의 기대주로 깜짝 등장한 문재인 민주통합당 전 후보는 대선 패배 직후 차기대선 불출마와 함께 조력자 역할을 자임하면서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지난 12월20일에 열린 캠프 해단식에서 그는“개인적인 꿈은 접지만 세 번째 민주정부를 만들어 내는 일을 반드시 성취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문 전 후보는 치열하게 경쟁했던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에게도 협력과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신사였다.
그는 웃으며 떠났다
비록 대선에서는 패배했지만 문재인 민주통합당 전 후보는 백의종군의 자세로 민주통합당을 돕겠다고 했다. 문 전 후보는“민주통합당과 함께한 시민사회, 국민연대, 우리 쪽 진영 전체가 더 역량을 키워나가는 노력을 앞으로 하게 된다면 저도 거기에는 늘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가 어떤 위상과 형식을 가지고 도울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은 실정이다. 대선 패배 원인에 대한 평가가 이른바‘친노 책임론’으로 흐를 경우 그의 입지는 급속히 위축될 수 있다. 반면 낮은 당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역대 대선에서 두 번째로 많은 1,460만 표를 획득한‘용장’으로 평가된다면 그의 의지와는 별개로 당내 영향력은 당분간 유지될 가능성도 높
다.
문 전 후보는 이날 해단식에서 시종 잔잔한 미소로 캠프 관계자들의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눴다. 그는 그렇게 웃으며 떠났다.
“호남 지지자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대선이 끝난 이틀 뒤 문 전 후보는 故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저가 있는 동교동을 찾아가 김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를 예방했다. 그는 이날 오후 이 여사와 마주한 자리에서“호남지역에서 깜짝 놀랄 만한 지지를 보내주셨다”며“제가 뜻을 이루지 못해 그 분들에게 상실감과 상처를 안겨드리지 않았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또한 문 전 후보는“열심히 하느라고 했는데,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 여망에 부응하지 못했다”며“이번에 1,500만 명에 가까운 국민이 함께 지지해줬는데, 저희가 조금 부족했던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의 유지였는데, 제가 그 유지를 받들지 못한 셈이 됐다”며 “이번에 광주에 직접 걸음도 해주시고 귀한 말씀도 해주셨다”며 이 여사의 도움에 감사를 표했다.
이에 이 여사는 “수고 많았다”며 “우리도 몇 번이나 떨어졌다"고 문 전 후보를 위로했다. 그러면서도 ”꼭 정권교체가 되길 바랐는데”라며 여운이 남는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 여사가“부산에서 너무 적은 표가 나왔다”고 하자 문 전 후보는 “그래도 지난번보다는 10% 정도 높게 나왔다”고 답하기도 했다. 그 후 두 사람은 약 20여 분 간 비공개 대화를 나눴다.
이 여사는 문 전 후보의 부인인 김정숙 씨에 대해 “친화력도 높고 열심히 하고 항상 웃는 그런 점들이 도움이 됐다”고 칭찬했고, 문 전 후보는 “저보다 훨씬 더 선거운동을 잘 하는 것 같다”며 웃었다고 배석자가 전했다.
그의 패배는 의미 있었다
문 전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총 1,469만 표를 획득했다. 이는 이전 대선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16대 노무현 전 대통령의 1,201만 표보다 268만 표나 많은 수치다. 비록 패배했지만 박근혜 당선인에 이어 역대 2위의 득표 기록한 것이다. 박 당선자를 제외한 어느 당선인보다 많은 표를 얻은 것이다.
문 전 후보는 12월20일 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서 차기 대통령선거에 도전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러나 의원직 사퇴는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행보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그리고 야권의 조력자로서 남은 역할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 선대위 관계자는“문 후보는 약속을 무겁게 생각하는 원칙주의자에 가깝다”며“약속대로 의원직은 지킬 것이고, 차기엔 도전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문 전 후보는 해단식에서의 발언을 통해 “민주당이 함께했던 국민연대 진영 전체가 더 역량을 키워 나가는 노력들에 늘 힘을 보태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친노의 한계, 민주당의 한계, 확장의 부족함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당체질 개선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향후 문 후보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세력의 리더로 활약할지, ‘희망2013, 승리2012 원탁회의’처럼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할지는 확실치 않은 상황이다.
이날 해단식은 낙선의 충격 때문인지 무거운 분위기로 진행됐다. 그러나 문 전 후보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눈가에는 아쉬움이 역력했다. 그는 “선거 막판에 정말 분위기도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고, 실제로 여론조사상으로 그런 결과도 나타나 더 기대를 했다가 그만큼 아쉬움이더 컸던 것 같다”면서 “어쨌든 그것은 전적으로 제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해단식에 참석한 300여 명의 캠프 관계자들은 문 후보의 인사말 도중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일부 여성 자원봉사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한 여성 자원봉사자는 “예쁘게 화장하고 해단식에 오려고 했는데 어젯밤부터 아침까지 눈물이 그치지 않아서 차마 화장을 할 수 없었다”며 울먹여 장내를 숙연하게 했다.
그는 “나의 패배이지, 우리 모두의 패배는 아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일단 당 대표대행에서 물러날 것으로 보인다. 그가 물러나면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될 것인데 이 과정에서 문 후보가 자기 목소리를 내기는 힘들 것이란 분석이다.
야권의 정계개편론이 불붙게 되면 미국으로 떠난 안철수 무소속 전 후보의 행보가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다. 문 후보를 제외하면 당내 인사로는 새로운 리더감이 없고, 실패한 당으로는 국민의 마음을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비주류뿐만 아니라 일부 주류 의원도 안 전 후보를 중심으로 뭉칠 가능성이 있으며, 이에 맞서 안 전 후보를 반대하는 재야세력과 현 주류가 세력을 형성하게 될 수 있 다고 보기도 한다.
홍준표 경남도지사“文, 배수진 치지 않아 패배”
지난 12월21일 CBS라디오‘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홍준표 신임 경남도지사는 문 전 후보의 패배와 관련한 발언으로 주목을 끌었다. 홍 도지사는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가 들어가면서 오히려 문재인 후보가 손해 봤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방송에서“이정희 전 후보의 사퇴로 그 지지율 1%가 문 후보에게 옮겨간 것이 아니라”며“오히려 중장년 층들이 뭉치는 계기가 됐으며 종북연대라고 새누리당에서 공격했는데 정치적으로는 그 공격이 아주 중요했다고 본다”고 밝혔다.
또한 홍 도지사는 문 전 후보의 패배요인에 대해 세 가지를 더 이야기했다. 그는 “배수진을 쳐야 되는데,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총결집을 이뤄 조금이라도 투표장에 많이 보내야 되는데 국회의원도 사퇴 안 하고 도피처를 만들어놓았다”고 지적했다.
또한“선거 끝날 때까지 안철수 공동 유세를 끌어내려고 그렇게 하는 모습이 저는 문재인 후보답지 않다고 봤다”며“안철수에 너무 의존하니까 국민들이 보기에는 열악한 지도자”라고 주장했다.
이어 홍 도지사는“선거유세 할 때 뉴스에서 문재인 후보를 봤는데, 노무현 대통령을 연상시킨다는 느낌을 받았다”며“선거라는 게 자기 색깔로, 자기 경쟁력으로 해야지 다른 사람한테 의존하는 선거는 국민들이나 지역구민들한테 그리 썩 좋은 모습은 아니다”고 말했다.
한편 그는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정권출범에 주도세력 역할을 했던 분들은 정권 초기에는 2선 후퇴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또한 “특히 48%를 지지했던, 우리를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 2030세대, 이 분들을 포용을 하려면 박근혜 당선자가 대통합 역발상을 해야 될 것”이라며“통상적인 국정준비로는 이 사람들 마음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