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즉통(變則通), 시대에 맞춰 장애인의 생활 자세 변화해야
▲ 이철용 이사장은 4년간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1995년에는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장문원)을 설립한다. 이후 그는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장애인과 빈민의 처우 개선을 위해 지금껏 크고 작은 행사에 공을 들여 매진하고 있다. 지난 해 장문원 20주년 기념행사를 치르고 올해 21년을 맞이한다. |
1980년대 초 한국의 암울했던 사회현실을 조망한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과 <어둠의 자식들>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베스트셀러 작가 이철용(70) 전 국회의원은 현재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장으로 복무하며 장애인을 위한 문화예술 진흥을 위해 헌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동안 제13대 국회의원(평화민주당)으로 활동했고,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이사를 역임했으며, 철학원 <통(通)>을 세워 공중파 종편채널에서 정치 훈수를 두기도 한 그가 이제는 장애인 문화예술 향유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그동안 틈틈이 <권력을 향한 허상들의 맞춤> 외에 <나도 심심한데 대통령이나 돼볼까> <10시간> 등을 집필하며 꾸준히 자존감을 입증해 왔다. 그런 그가 현재는 노인, 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한 ‘찾아가는 공연’으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근래 오나라 손자의 ‘변즉통’(變則通)을 차용하는 이철용 소설가 겸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장이 ‘찾아가는 공연’을 위해 직접 작사·작곡하여 노래를 부르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제목은 ‘웃기지 마라’다. “웃기지마라, 웃기지마라 세종대왕도 핸드폰 없고 연산군도 승용차 없었다, 할 일 없어 던진 말 아냐. 고르지 못해 하는 말이야. 웃기지 마라 웃기지 마라. 금수저라고 뽐낼 것 없다. 흙수저라 서러워 마라. 너나나나 도낀개낀 도토리 키재기라네.” 노래를 들어보면 가야금 꽹과리, 북, 장구, 아쟁, 가야금 등 국악가락이 휘몰이 장단으로 어우러져 어깨춤이 들썩 신명이 절로 난다. 노랫말에 의미가 깊어서인지 노래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데, 이번 발표한 ‘웃기지마라’ 노래는 중독성이 강한 게 특징이다. 이미 유튜브에도 올려져 조회 수가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이철용 이사장은 “우리사회 장애인에게 문화예술 활동의 길을 열어주고, 당당히 이 사회의 일원으로 노래하고 춤 출 수 있는 무대를 제시하고 싶어 기획하게 되었다. ‘장애인들이 펼치는 무대이니 보러 오라’고 읍소하지 않고, 당당히 독립된 하나의 주체로서 일반인과 함께 협업함으로 공연 문화예술의 수준을 높이고자 한다. 그 일환으로 노래는 건강을 증진하는 초석이다. 노래를 부르면 어깨춤이 절로 나고, 이어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게 된다. 그러면 자신감을 회복하고 심신이 건강해질 수 있다”고 들려준다.
과거에는 노인과 장애인이 직접 불편을 감수하고 문화예술 공연장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면, 이제는 노인과 장애인의 사정을 고려해 방문 받는 공연, 즉 찾아가는 공연을 베풀고자 한다는 이철용 이사장의 깊은 뜻이 담겨있다. 각 사회 계층에 포진해 있는 장애인시설과 요양원 등 복지시설을 방문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무대 자체를 이동시킨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활동했던 인류의 3대 스승이 있다. 공자, 노자, 손자가 바로 그들이다. 먼저 노나라 공자는 궁하면 통한다는 ‘궁즉통’(窮則通)을 말했고, 주나라 노자는 비우면 통한다는 ‘허즉통’(虛則通)을 말했다. 또한 오나라 손자는 병법의 일환으로 어려울 때 다른 전략을 취하라는 ‘변즉통’(變則通)을 말했다. 오늘 날의 장애인 역시 처지가 어렵다고 해서 현실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마음이 바뀌어야 환경도 바뀐다. 자신의 몸이 먼저 변해야 마음이 변하고, 마음이 변해야 생각이 변한다. 그리고 그 생각이 바뀌어야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뀔 때 비로써 운명이 바뀐다. 변화하는 과정과 순서에 따라 사람도 시대에 맞춰 변화한다. 그래서 세상사 ‘웃기지 마라’ 노래하면서 몸을 움직이도록 고안하고 있다.”
그가 현재 작사·작곡한 노래는 대략 5곡이며 부른 노래는 30여곡이다. 장애인뿐 아니라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노래를 CD음반에 담았다. 창작무용 주제곡 ‘엄마 웃었다’, ‘우리 함께 춤을 추어요’ 등을 비롯해 ‘칠갑산’, ‘눈물의 연평도’ 등 서민들이 술 한 잔 하고 노래방에서 자주 부를 법한 노래와 더불어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의 O.S.T ‘조각배’도 다시 준비 중이다. 물론 음반 판매와 무대 공연 수익금 중 대부분은 장애인 문화시설 마련을 위해 기금으로 쓰인다.
“과거에 나이 70세면 추진하던 사업도 갈무리할 시점이다. 그러나 오늘 날에는 의·과학의 발달로 인간 백세시대를 맞고 있으니, 장애인 문화예술에 있어서도 그 서막을 열자는 생각으로 준비하고 있다. 장애인에게 자신의 처지를 불행하게 생각지 말고,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며 능동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또한 자신감을 고양시켜 숨겨진 재능을 마음껏 발현할 수 있도록 서로서로 협조하고 돕자는 취지다. 그래서 전문 무용수들이 동작을 시연하고 고안해서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움직이며 노래할 수 있도록 노래체조, 즉 몸 살리는 몸짓을 진작부터 연구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재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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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과 <어둠의 자식들>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베스트셀러 작가 이철용(70) 전 국회의원은 현재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 이사장으로 복무하며 장애인을 위한 문화예술 진흥을 위해 헌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
사회적 연대와 책임감을 안겨준 이철용의 소설
1948년 10월생으로 서울시 중구 필동에서 태어난 이철용 소설가는 본래 서울 토박이다. 생후 6개월 만에 결핵성 관절염을 앓고 지체장애 3급 판정을 받은 그는 성북구 안암동과 동대문구 신설동에서 성장하며 종암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유년시절 신설동 4번지 판자촌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일들을 목격하며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로 옮겨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5세 때인 1972년에 그는 은성학원을 개설해 운영했다. 숨을 은(隱), 이룰 성(成) 자를 따서 ‘숨어서 일하고 숨어서 배운다’는 뜻이다. 사회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복지 사각지대에 놓였던 장애인의 처지인지라 이철용 소설가 역시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그래서 당시 열악한 환경에 놓인 구두닦이 소년 등을 모아 교육받을 기회를 제공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처음에는 인근 교회에 찾아가 ‘야학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대학생을 소개받아 과목을 배당한 후 매일 저녁 수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인연은 이후에도 인생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준다. 1975년부터 한국 기독교 도시빈민선교협의회에서 실무자로 활동하던 그는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다가 탄압받고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수배령이 내려 피해 다니다가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인생도 험난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게 될 지 장담할 수 없는 현실에서 두 아들에게 편지 쓰는 심정으로 자신의 인생을 토로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첫 소설 작품 <어둠의 자식들>과 두 번째 작품인 <꼬방동네 사람들>이다. 불과 30세 때의 일이다. 도시 룸펜들과 빈민들의 사연을 담은 이야기로 가족이 해체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소시민의 애환이 담겨있다.
소설 발표와 더불어 이장호 감독의 영화 <어둠의 자식들>이 제작되었고, 이후에는 배창호 감독과 <꼬방동네 사람들>을 제작해 상영하였다. 그동안 도외시 되었던 빈민들의 이야기가 큰 주목을 받았고, 영화에 참여했던 배우 김보연도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그것이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친분을 유지하고 왕래하며 지낸다.
이러한 사회적 호응에 힘입어 이철용 소설가의 책임감은 더욱 높아졌다. 간단한 기획도 공익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려는 마음이 항상 앞서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머물던 사적 영역이 빈민과 장애인을 위하는 공적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관념적으로 맴돌던 이상이 보다 행동주의 실천으로 옮겨지는 변화가 일어났다. 정치적, 행정적, 제도적, 관계적으로도 인간의 복지를 먼저 챙기는 기술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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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에는 장애인이 직접 불편을 감수하고 문화예술 공연장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면, 이제는 장애인의 사정을 고려해 방문 받는 공연, 즉 찾아오는 공연을 베풀고자 한다는 이철용 이사장. |
400만 장애인 복지정책 위해 헌신한 정치인 시절
이철용 소설가는 이후 빈민선교 활동가로 장애인권익문제를 해결하려는 복지운동을 펼치던 중 1988년부터 1992년까지 4년간 평화민주당 제13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소설가로 인지되며, 지금은 고인이 된 문익환 목사와 빈민운동의 대부인 박형규 목사, 이문영 고려대 교수의 관심과 애정으로 사제의 연을 맺는다.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감옥에서 그의 소설을 읽고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편지를 써서 ‘훌륭한 청년이니 아들 김홍일과 친구가 되게 해주라’고 당부할 정도로 관심을 기울였다. 이후 문익환 목사와 이문영 교수의 추천으로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여 의정활동을 펼치게 된다.
그는 정치 활동의 연장선에서 1989년 장애인고용촉진법(과거 장애인복지법)을 발의하고 통과시켰다. 빈민 출신이라는 사명감을 짊어지고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 노인, 청소년, 아동, 여성, 빈민들에 대한 권익과 예우, 삶의 질 향상 등을 높이는 데 헌신했다. ‘심신장애자복지법’을 ‘장애인복지법’으로 개명해 발의하고 통과시켰다. 아울러 당시까지 국회에 설치돼 있지 않던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하자는 취지의 일인 시위를 벌였고, 이후 편의시설 설치를 법적으로 제도화시켰다. 게다가 신체장애를 겪는다고 해서 마음과 능력까지 장애로 매도되는 것을 우려해 ‘장애인고용촉진법’을 통과시켜 공공기관에서도 장애인을 고용하도록 제도를 마련했다.
이렇게 4년간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1995년에는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장문원)을 설립한다. 이후 그는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장애인과 빈민의 처우 개선을 위해 지금껏 크고 작은 행사에 공을 들여 매진해 왔다. 지난 해 장문원 20주년 기념행사를 치르고 올해 21년을 맞이한다. “21세기는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경제의 불균형으로 고르지 못한 것이 문제다. 사회적 양극화는 장애인의 삶에도 영향을 크게 미친다. 또한 장애인을 바라보는 눈이 사회복지로만 한정되는 데 취업, 구제, 기부로만 제한할 것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 쪽으로도 영역을 넓혀 문화복지의 확충이 시급하고 절실하다. 더불어 장애인도 ‘변즉통(變則通) 마인드’로 생활 자세와 철학을 바꿔야 한다. 굴뚝 없는 산업, 문화예술 분야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도록 힘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럿이 힘을 모아 ‘찾아가는 공연’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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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예술의 수요자가 아니라 주체자고 공급자로서 당당히 한국 사회를 빛내도록 장애인을 독려하고 있다. 무엇보다 공적 세금을 제공받는 수혜자가 아니라 국민 주체로서 세금을 납부하고 처지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
문화예술의 막연한 수요자가 아니라 주체자고 공급자로서 당당히 한국사회를 빛내도록 장애인을 독려하고 있다. 무엇보다 공적 세금을 제공받는 수혜자가 아니라 국민 주체로서 세금을 납부하고 처지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지론이다. 그를 위해 장애인들 역시 음악을 듣고, 노래를 하며, 춤과 무용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각종 장애를 안고 있으면 대중 앞에 나서기를 꺼려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가벼운 노래부터 시작하는 것이 우선이다. 노래와 춤을 회복하면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고, 사회를 보다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철용 이사장은 “상대적 위화감을 극복하고 통합으로 가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어떤 분야든 힘을 합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정성과 열정을 쏟아야 한다. 이 땅을 평화의 지대로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 국민은 저력이 있다. 거기에 발 맞춰 개인적으로는 노래를 통해 즐거움을 제공하고, 또한 사회적으로는 노인복지, 장애인문화 복지를 위해 주어진 여생을 희사하고 싶다”는 바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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