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5바탕 재완창, 소리의 깊이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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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5바탕 재완창, 소리의 깊이 더한다
  • 안수지 기자
  • 승인 2017.06.14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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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인생 60년 맞는 안숙선 명창

 

   
▲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로 지정된 안숙선 명창.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지.” 음력 5월5일 단오제 때 들려오는 남원의 판소리 <춘향가>는 대한민국 최고 ‘사랑의 고전’이다. 과거 농경시대 풍작을 기원하는 단오제는 젊은 청춘남녀의 사랑의 찬가로 대미를 장식한다. 일 년 중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날이기도 하고, 대추가 막 열리기 시작하는 때라 나뭇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놓아 대추풍년을 기원하기도 했다. 일명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다. 이러한 때 판소리 <춘향가>의 백미인 이몽룡·성춘향의 ‘사랑가’는 단연 대한민국 최고 국악인 안숙선(68) 명창에게 들어야 제 맛이 난다. 낭창낭창 또록또록한 발음과 청아하고 애원성 깊은 성음이 청중을 사로잡는 힘이 있다.
 
오뉴월이면 듣는 안숙선 명창의 ‘사랑가’
 
조선시대 거행되던 단오제에는 민속놀이로 그네뛰기와 씨름이 있어 외출이 자유롭지 않던 부녀자들에게 밖으로 나들이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네뛰기는 청춘남녀의 만남을 주선하는 사랑의 한판 놀이마당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최고의 고전인 <춘향전>도 바로 이 민속 축제인 단오제에서 출발한다.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관아에 박혀 있는 것이 갑갑하여 바깥 거리로 놀러가자고 방자에게 이르면서 어느 곳이 좋으냐고 묻는다. 이에 방자는 남문으로 나가 광한루로 안내한다. 이때 이몽룡은 동림의 버드나무숲에서 그네를 뛰는 성춘향을 발견한다. 이렇게 시작된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은 시대와 신분을 뛰어넘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판소리 5바탕’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절대절미의 <춘향가> 중 최고의 백미 ‘사랑가’를 남원 세습예인 가문 출신의 국악인 안숙선 명창이 구성지게 완창했다. 고운 자태에 단아한 외모, 자그마한 체구에 귀엽고 예쁜 이목구비에서 힘 있고 맑은 고음으로 우러나오는 성춘향의 애절한 절규와 권선징악적 결단 그리고 사랑의 심오함은 대중의 감정이입을 부추겨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로 지정된 안숙선 명창의 존재감이 여실히 드러난다.
 
1957년 9세의 소녀 안숙선은 남원을 비롯한 전국 학생명창대회에서 첫 입상을 기록하며 기나긴 소리인생의 첫 발을 뗀다. 남원 세습예인 가문의 출신이라 어릴 적부터 소리를 듣고 자란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소리에 대한 자질을 타고나 ‘남원의 애기명창’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아직 화동일 뿐 성숙한 국악인 명창 반열은 아니었다.
 
“그때는 이렇게 국악이 중요하게 대접받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고, 또 소리를 배울 때도 이렇게 사람들이 좋아해줄 줄도, 대성하게 될 줄도 몰랐다. 다만 외가의 어른들이 배우라고 하면 배우고, 어디 가서 소리하라고 하면 그래야 하는 줄 알고 따랐다. 공연에 나가서 한 마디 부르라 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집안의 규율인 줄 알았다. 또한 전통에 따라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잘 하는 것이 착한 어린이인 줄 알고 자랐다.”
 
지금처럼 전문적인 국악교실이 개설돼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사회에서 주목받고, 회자되고, 그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국악의 위상이 높아져 이를 교육하기 위한 기관이 근래 들어서야 설립되었다. 소녀 안숙선은 전통적 세습예인 가문의 판소리 명창 강도근과 가야금 명인 강순영, 대금산조 명인 강백천의 외종질로서 자연스럽게 판소리를 몸소 체득하고 학습했다. 그리고 이모인 강순영 명인의 주선으로 남원국악원의 주광덕 명창을 찾아가 단가와 <춘향가>의 ‘남원골 한량’과 ‘사랑가’, ‘이별가’는 물론 <심청가> 중 ‘아이 어르는 대목, <적별가> 중 ’군사설움 대목‘ 등을 익히며 기초를 닦았다.
 
   
▲ 1957년 9세의 소녀 안숙선은 남원을 비롯한 전국 학생명창대회에서 첫 입상을 기록하며 기나긴 소리인생의 첫 발을 뗀다. 남원 세습예인 가문의 출신이라 어릴 적부터 소리를 듣고 자란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소리에 대한 자질을 타고나 ‘남원의 애기명창’이라고 불렸다.
 
국악의 소중함 깨달은 ‘안숙선 명창의 국립창극단 시절’
 
‘아! 이것이 우리 소리, 국악이구나’ 깨달았던 것은 나이가 훨씬 더 들어서다. 그 이전인 19세 때는 만정 김소희 명창의 전습생으로 단성사 뒤편에 있는 조그만 자취방에서 비원 밑 돈화문 인근의 ‘전습소(국악교실)’을 오가며 외로이 소리 공부를 익힐 뿐이었다.
 
“만정 김소희 선생님께서는 ‘삼천리가무단’을 만들어서 미국이나 유럽 등지의 외국에 나가 우리소리 공연을 보여주려 한다고 남원의 어른들께 연락을 주셨다. 그래서 가문의 논의한 끝에 ‘지방에서는 대성하지 못 하니 서울 가서 배우고 익혀서 큰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고 중론을 모아 서울로 상경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워커힐호텔’이 있었다. 미국인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관광 온 외국인들이 그곳에 투숙했다. 그들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보고자 했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루 2회씩 민속공연이 진행되었다. 그녀는 만정 김소희 명창에게 배운 우리소리를 바탕으로 정식 오디션을 치르고 판소리 무대공연을 펼친다. 그리고 1979년 30세의 나이로 국립창극단에 입단하기까지 서양의 신문물과 기예, 기능, 재주, 시대적 감각을 익힌다.
 
“호텔 공연무대에서 <춘향전>의 성춘향은 물론 <별주부전>의 토끼와 <심청전>의 심청 역할을 두루 맡으며 관객의 찬사와 성원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생계의 수단이거나 취미활동으로 여기며 생활이 안정되면 곧 그만두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창극단에 들어가 순수 예술무대를 접하고는 비로소 생각이 달라졌다. 우리소리의 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 ‘귀 명창이 있어야 소리를 하는 데 신명이 난다’는 안숙선 명창. 그녀는 일반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크고 작은 무대를 통해 우리소리를 많이 들려주도록 ‘귀 명창 만들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안숙선 명창은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며 실제 순수 예술무대를 보고 경험하는 동안 우리소리에 대한 자세와 각오를 달리했다. 국악계 큰 스승을 모두 만났고, 그분들의 일생과 우리소리에 대한 자부심은 물론 긍지와 열정 등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이것이 숙명이구나’ 인지할 수 있었다. 또한 ‘우리소리와 전통을 지키려는 혼신의 노력은 그분들의 목숨을 잇는 생명선이었구나’ 느끼며 자기 예술세계를 넓히려는 대가들의 열망을 몸소 체득할 수 있었다.
 
“이후 내 안으로 들어가 우리소리를 바짝 끌어당겨보니까, 이것이 진실로 일생을 걸만한 전통예술이구나 절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전 무대에서 선보였던 소리와 다르다는 것을 한층 더 깨우칠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춤과 노래, 기예를 자연스레 익히며 성장했지만 내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토해내듯 내지르는 소리가 이전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인생이 좀 더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박차를 가해 1986년 37세 때는 판소리 5바탕인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를 완창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97년 48세의 나이로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으로 추대된다. 또한 같은 해 8월,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로 지정된다. 1998년 용인대 국악과 대우교수를 시작으로 2003년에는 한국종합예술학교 전통예술원 성악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게 되었고, 2013년부터 2015년에는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을, 현재는 남원 춘향제 조직위원장으로 국내외 국제행사와 공연활동을 관장하고 있다.
 
   
▲ 안숙선 명창은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며 실제 순수 예술무대를 보고 경험하는 동안 우리소리에 대한 자세와 각오를 달리했다. 국악계 큰 스승을 모두 만났고, 그분들의 일생과 우리소리에 대한 자부심은 물론 긍지와 열정 등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이것이 숙명이구나’ 인지할 수 있었다.
 
올해로 소리인생 60년 맞이하는 안숙선 명창
 
태어날 때부터 세습예인의 가문에서 우리소리를 익혀온 안숙선 명창은 교수가 되고,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소리에 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반추하는 일이 잦아졌다. 과거 핏줄로 이어지는 예술혼의 대물림을 가히 하늘의 축복이라 여기지 못하고 지내왔지만 소리가 깊어진 근래에 와서는 우리 전통의 맥이 끊이지 않도록 지지하고 후원해준 가문의 어른들과 스승의 지도편달이 그리워하는 시간이다.
 
“국악계 많은 대가 분들께서 애제자로 삼으려 불러주시고 사랑 주시며 ‘항상 어려운 상황이 오더라도 소리를 놓지 마라’ 당부하셨다. 또한 ‘잘 할 것이다’고 믿어주시며 힘을 실어 주셨다. 그런 칭찬과 스승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실망시켜드리지 않으려고 무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지금은 소리인생 60년을 지내오며 이런 부분들은 이렇게 구현하는구나, 이런 가운데 이렇게 얘기하고 싶어 했구나 소리의 깊이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젊은 시절 무대에서 공연했던 소리를 이제와 다시 들어보니 정말로 부족한 것이 많다. 훌륭하신 스승께서 북을 쳐주시고 장단을 맞춰 주셨는데 그분들은 태산 같고, 나는 여울물 같아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후진을 양성하시려고 매우 부족하고 미미해도 칭찬으로 감싸주시고 사랑으로 이끌어주셨구나 느낄 수 있었다.”
안숙선 명창이 전하는 우리의 소리는 슬프고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어 창극이나 판소리로 구현할 때 천둥번개처럼 우르르 쿵쾅 박력 있는 성음과 여울물 돌아나듯 다정다감한 목소리, 또한 끊길 듯 이어지는 애잔한 흐느낌과 단장을 끊어내듯 애끓는 심호흡이 함께 우러날 수 있어야 한다. 젊은 시절 스승의 가르침이 있을 때는 우리소리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다가 소리인생 60년을 맞는 오늘 날에 와서는 정작 지도편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고 토로한다.
 
“지금 내가 하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일까, 전통 가락과 소리에 걸맞은 가창일까 문득문득 의구심이 들곤 한다. 우리소리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몸소 체험하며 불현듯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게 맞다’ 응대해주실 스승이 모두 소천하셨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스승의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면 그때 왜 공부를 더 많이 못했는지 아쉬워진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스스로 그 고된 작업, 어려운 소리 공부를 몸소 실천하라는 섭리가 아닌가 깨닫고 있다.”
 
아울러 안숙선 명창은 후진 양성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다. “1950년 당시는 6·25전쟁 이후라 생계가 곤란하여 우리소리를 배우는 것이 열악했다. 그래서 과연 인재가 있겠는가 걱정했다. 그럼에도 맥이 끊이지 않도록 배우는 사람이 있고, 또 지금은 너무 현대화되어 전통의 우리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염려스러워도 국악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배우는 젊은이들이 속속 나타난다. 무엇보다 우리소리를 세계에 알리고자 노력하는 그들을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제는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고 그에 걸맞은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양성하는 것이 교수된 우리의 사명이라고 느낀다.”
 
현재 안숙선 명창은 7,8명으로 구성된 소그룹 활동을 장려하고 있다. 이를 통해 생활 저변에 우리소리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생활화시키려는 희원을 지원하고 있다. 이동성 좋게 움직이고,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소그룹 활동은 대중과의 만남에 유리하고 유익하다는 지론이다. 이를 위해 소공연 단체와 소극장 무대를 기획하고 있다. 국악계 유능한 인재가 있어도 무대가 있어야 재능과 기예를 펼칠 수 있고, 일반인과 많이 접해야 국악의 리듬과 가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일반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크고 작은 무대를 통해 우리소리를 많이 들려주도록 ‘귀 명창 만들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귀 명창이 있어야 소리를 하는 데 신명이 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귀 명창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소리를 듣고 즐길 줄 알아야함으로 어릴 적부터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우리소리를 듣도록 교육해야 한다. 그러면 어디서든 박자와 장단, 리듬을 탈 수 있으며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어 진정한 우리소리를 향유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국가적으로도 그런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고 프로그램 개발에 힘을 실어주면 좋겠다고 바람을 보인다.
 
그리고 안숙선 명창은 개인적으로 판소리 5바탕을 향후에 재완창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과거의 기록에 만족하지 않고 후대에 남길 우리소리를 다시 새롭게 완창하겠다는 의지다. 지금까지 <춘향가>와 <적벽가>는 완창해 녹음을 마쳤으나 나머지 3바탕은 아직 준비 중이다. 소리인생 60년을 살아오며 ‘명창 안숙선의 소리’를 완성해 놓고 가야하지 않은가는 막중한 책임감이 어깨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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