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저성장 시대다. 짧은 기간 압축 성장을 즐기고, 단기간 위기 극복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다. 유럽의 재정 위기가 길어지고, 중국과 미국의 경기 침체까지 타격을 주고 있다. 대외 여건 악화로 수출 증가율은 둔화되고 있고, 소비와 투자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글로벌 경제의 불안정성은 주요국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경제 주체들을 ‘저성장의 시대’로 몰아갈 것이 명백해졌다.
저성장, 장기불황의 공포가 현실로 다가왔다. 한국은행은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2.4%로 대폭 낮추고, 우리경제가 저성장 시대에 들어갔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한은 전망치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우리나라 올해 성장 전망치인 2.7%,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2.5% 등 대내외 기관들의 전망치보다도 낮다.
고착화 되어 가는 ‘구조적 저성장 쇼크’
국제통화기금(IMF)를 비롯 국내외 대부분 경제연구기관이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을 줄줄이 2%대로 끌어내린 것은 1960년대 국가주도 경제개발이 시작된 이래 역사상 가장 낮은 성장률이다. 역대 몇 번의 경제위기 때도 이처럼 성장률이 낮지는 않았다. 단군 이래 최대 위기라는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부터 2002년까지 5년간 성장률 평균은 5%였고, 2003년 카드대란 이후 5년간 성장률 평균은 4.3%였다. 1990년대 이전 최대 위기였던 2차 오일쇼크를 전후해서도 5%대의 평균 성장률을 유지했다. 더구나 3%대의 성장률은 우리나라 경제역사상 매우 드물다. 1970년 이후 3%대 이하 성장률을 기록한 해는 2차 오일쇼크 직후인 1980년 -1.5%,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5.7%, 2001년 3.8%, 카드사태 때인 2003년 3.1%, 미국 월가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한 2008년 2.3%, 그 직후인 2009년 0.3%, 유로존 재정위기 때인 2011년 3.6%가 전부다. 40년 동안 7번에 그쳤을 만큼 드문 사례다. 그런데 MB정부 들어서는 경제성장률이 3%대를 기록한 것이 3번이나 된다. 이 또한 역사상 신기록이다. 5년간의 구간 성장률이 3%대에 그친다는 것은 사실상 충격적인‘저성장 쇼크’다. 문제는 이런 저성장이 일시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제부터 시작이며,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는 ‘구조적 저성장’으로 고착될 위험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될 공산이 크다.
얼만 전 한국은행이 국내총생산(GDP)갭률을 최초로 공개했다. GDP갭률이 마이너스면 실제 경제활동이 잠재GDP에도 못 미치는 불황 상황임을 의미한다. 한국은행이나 KDI가 추산한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은 3.7~3.8%다. 그런데 올해 2분기 GDP갭률이 -0.4%를 기록했고 3,4분기에도 각각 -0.2%를 기록하며 마이너스에 머물 것으로 예측됐다. 한은은 이런 GDP갭률의 마이너스 행진이 2013년 4분기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5년 정도 이런 저성장이 이어진다면 우리 경제에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경제전문가들은 경제 3주체 중 가계에서는 부동산 경기침체에 따른 집값 하락으로 어려움에 처한 집 가진 빚쟁이, ‘하우스푸어’들의 파산사태가 줄을 잇고, 기업들에게는 최근 웅진그룹 사태가 보여주듯 경쟁력이 하락하고 자금난에 몰린 한계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는 사태가 올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지난 6월 말 현재 경제 3주체의 금융부채는 총 3,542조 6,000억 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 중 기업부문이 1,900조 원(공기업 포함), 개인부문(비영리단체 포함)이 1200조원, 일반정부가 470조 원 규모다. 개인부문의 가처분소득 대비 금융부채 비율은 163.7%로 사상 최악을 나타내 이미 위기가 시작됐다. 문제는 기업부문이다.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우리나라 기업들은 한 차례 구조조정을 거쳤다. 30대 그룹 중 절반이 망하고 이들에게 돈을 빌려준 조흥·상업·제일·한일 등 유수의 은행들이 망하거나 흡수 합병됐다. 그런 지 15년도 안 돼 다시 기업부문에 군살이 끼고 비계 덩어리가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계 불황 파고 ‘장기불황’ 터널 속 진입문제는 이같은 성장률 전망이 미국의 ‘재정절벽’(fiscalcliff)이나 유로존 위기가 더 이상 심각하게 진전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한은의 가정과는 달리 한국경제를 둘러싼 대외 환경도 그리 녹록치 않다. 유로존은 여전히 위기의 터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고, 미국경제의 회복 속도는 더디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가 목매달고 있는 중국경제는 유럽수출 부진으로 경착륙이 예견되고, 선진국의 위기는 신흥국의 위기로 전이된 지 오래다. 여기에다 미국 대선 결과 여부에 따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가능성, 터키-시리아간 무력충돌 위험 고조 등 중동정정 불안의 강도가 점점 높아가고 있다.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심화된다면 세계경제는 위기의 도미노에 휩쓸리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저성장 추세가 장기화할 조짐이라는 사실이다. 한국경제는 오일쇼크나 외환위기, 카드대란, 미국발 서브프라임 위기 등이 발생했을 때 큰 충격을 받긴 했지만 비교적 짧은 기간에 회복하곤 했다. 환율조정 메커니즘을 통해 원화가치를 평가절하시켜 수출을 늘렸고, 그 결과 내수부진을 수출이 보완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위기는 수출 내수가 모두 부진을 겪는 쌍끌이 위기 상황이다. 더구나 미국의 3차 양적완화(QE3), 유럽 중앙은행의 재정위기국 무제한 국채매입(OMT), 일본은행의 80조 엔 양적완화 조치 등으로 막대한 유동성이 우리나라로 흘러들면서 원화가치가 상승하고 있어 수출 전망은 더욱 어둡다. 1,000조 원 규모의 가계부채에 소비여력은 고갈될 대로 고갈되면서 내수는 찬바람이다. 김중수 한은 총재도 최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간담회를 통해“수출과 내수가 동반부진함에 따라 성장세가 미약해 졌다”고 전제한 뒤“국내경제는 유로지역 재정위기의 장기화, 글로벌 경제 부진 지속 등으로 마이너스 GDP갭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한다”며 0.25%p 금리인하와 성장률 하향의 배경을 밝혔다.
가계·기업 경제주제 고통 예고
성장이 멈추면 빚 많은 가계와 한계기업들의 부도 도미노가 예고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부채가구 중 재무여력(소득에서 소비와 부채상환액을 제외한 금액)이 마이너스인 가구 비중이 3분의 1 정도로 매우 높다. 소득분위별로는 하위 소득구간에 속할수록 부채상환여력이 취약한 가구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KDI는“저소득층 부채가구는 경기부진으로 인한 소득 감소나 자산가격 하락 등의 충격에 취약하다”고 분석했다. 경기악화가 이어질 경우 빚 많은 저소득층에 직접적인 타격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한 기계업들의 상황도 경기부진에 따라 악화되고 있다. 시장에선 웅진홀딩스와 극동건설이 법정관리행을 택한 이후 제2의 웅진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D, H그룹 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30대그룹의 부채는 1000조 규모에 이른다. 이 중 지난말 부채비율이 300%가 넘는 곳은 한진, 한화, 금호, 동부, 현대, 미래에셋, 동양 등이다. 단기부채 상환능력을 측정하는 유동비율이 낮은 기업들에도 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비율이 낮을수록 단기부채상환능력이 낮은 것으로 간주된다. 한국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지난 6월말 기준으로 유동비율이 가장 낮은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에 유수의 기업들이 이름을 올렸다. SK는 유동비율이 15.8%, 아시아나항공은 31.8% 한진해운홀딩스 36.1%, 대한항공 42.4%, 동양 46.5%, CJ CGV 51.3% 등이다. 시장은 정부나 한은의 돈풀기식 재정정책이나 금리인하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저성장 고착화를 타개할 청년층의 활발한 창업지원과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을 육성하는 등의 대책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선별 투자·가지치기로 생존능력 키워야 저성장 기조 장기화를 경고하면서 삼성그룹은 물론 재계전반에 걸쳐 장기불황에 대비한 내년 경영계획 수립이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일시적 경기침체가 아닌 ‘저성장 모드’를 근거로 한 경영 패러다임 변화가 그것이다. 업계의 한 핵심관계자는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 변화의 핵심은 선택과 집중을 통한 선별투자와 불필요한 사업을 제거하는 등 가지치기를 통한 사업 구조조정 등이 될 것” 이라며 “이를 통해 생존능력을 키우고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게 핵심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결국 라스트 서바이버(마지막생존자)가 돼야 살 수 있다”며“오히려 이번 기회에 위기에 처한 유럽과 일본 등 해외 기업들을 인수, 경쟁자를 무력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저성장 기조 장기화에 따른 경영 패러다임의 변화를 전망하는 목소리는 삼성뿐만이 아니다. 두산그룹도 이에 대한 준비를 해나가고 있는 상태다.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최근 “현재 경영상황은 보수적 혹은 혁신적이라고 구분 지을 수 있을 만큼 2차원적이지 않다”며 “세계적 저성장 시대에 맞는 경영의 패러다임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에 맞춰 두산은 현재 내년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이외에 LG·현대차 등 주요 기업들도 내년 및 중장기 경영계획에 저성장 기조 장기화를 어떻게 담을지 고민하고 있다. 당장 삼성그룹의 경우 2013년에는 사상 최대 투자보다는 숨고르기를 통한 내실강화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현금 확보, 사업 구조조정을 통한 내부 체질 강화, 인력 재배치 등을 주요 전략으로 삼을 것으로 관측된다. 삼성뿐 아니라 다른 그룹도 사정은 비슷할 것으로 분석된다. 최근 본지가 10대 그룹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3년 경영계획 전망 설문조사’결과를 보면 10곳 중 9곳이 인위적 구조조정도 고려한다고 답한 바 있다. 다른 대기업 관계자 는“저성장 기조 정착 외에도 내년의 경우 한번 쉬고 갈 때가 됐다”며 “기존 사업과 신사업 등 전방위에서 여러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기업 관계자도 “당분간 재계의 경영화두는 공격경영 대신 보수경영으로 급격히 옮아갈 것”이라며 “회사별로 회사채 발행 등을 통한 자금 확보에서부터 몸집 줄이기 등의 다양한 방안을 실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저성장 경영 패러다임‘역발상 전략’
이런 가운데 저성장에 근거한 경영계획 수립시 특허전과 무역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경기가 어려울 수록 해외 기업과 정부가 특허 등을 무기로 경쟁기업들을 더욱 공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 기업들이 최근 들어 저가제품을 앞세운 신흥국 기업의 시장잠식을 우려해 유럽연합(EU) 집행위에 신흥국 제품에 대한 덤핑 혐의 조사 등을 요청하는 등 자국 시장 지키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이외에도 특허공격에 다소 소극적이었던 일본 기업들이 한국 기업을 대상으로 공격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이유는 자사 기업의 생존을 위해서는 우리 기업들을 괴롭혀야 하기 때문이다. 또 저성장 기조 정착은 보수적 경영이 주가 될 수밖에 없으나 그렇다고 너무 몸을 움츠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이에 따라 삼성 사장단에 전하는 메시지로 역발상 전략을 준비했다. 유럽 기업들의 군살빼기 전략을 사업기반 확대의 기회로 적극 활용하라는 메시지다.
원천기술과 고급 브랜드 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유럽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할 때 공격적인 인수합병(M&A) 전략으로 유럽 시장 진출 기회를 노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관계자는 “국내 10대 그룹들은 현재 내부유동성이 풍부한 만큼 추가적인 유동성 확보 전략 대신 유럽 내 기업들을 공격적으로 사냥하는 역발상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저성장 기조에 맞춰 지나치게 보수적인 경영에 집착할 경우 국내 산업의 경쟁력 약화와 함께 규모의 경제에서 뒤처질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