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자민당 총재선거 앞두고 유력 4후보 경쟁 뜨거워
2006년 초 도쿄 정가는 ‘포스트 고이즈미’ 경쟁이 뜨겁다. 누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로부터 후계자로 낙점 받을 것인가. 총리감으로 거론되는 인물은 현재 6명 정도. 대체적인 성향을 분석해보면 아베 신조(安倍晋三·52) 관방, 아소 다로(麻生太郞·64) 외상,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54) 총무상은 고이즈미 노선의 답습파로 분류된다. 이들은 ‘고이즈미식 개혁’을 따르겠다고 맹세하고 미국을 중시하며,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이에 비해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70) 전 장관과 야마사키 다쿠(山崎拓·70) 전 자민당 부총재는 아시아 외교 중시론자이며,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 재무상은 신중파로 알려져 있다.
일단 아베 장관이 선두를 달리고 있다. 시사주간 뉴스위크가 올해 주목받을 뉴스메이커로 아베를 꼽은 데서 보듯이 일찌감치 국제적 관심 인물로 부상했다. 감각적·선동 정치에 능하고 일전을 불사하는 정치 스타일이 고이즈미 정치의 ‘아류’다. 우익세력의 지원을 받는 후보 중 가장 화려한 가문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그의 극단적인 정치 성향을 우려하는 소리가 적지 않다.
후쿠다 야스오 전 관방장관은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전 총리의 장남이다. 외교안보 문제에서 고이즈미·아베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자민당 온건파와 중진 의원 등 반아베 세력은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가 총재 선거에서 쟁점으로 불거질 기회를 엿보고 있다. 자민당 내 여론이 갈라지는 틈새를 집중 공략하면서 아시아 외교 중시파인 후쿠다를 대안으로 추대한다는 계획이다.
최근 파키스탄 방문 중 총재 선거에 출마할 뜻을 밝힌 아소 다로 외상도 유력 후보 중 한 명이다. 그는 20세에 한국인 징용자를 혹사시킨 아소광업(현 아소시멘트) 사장이 된 뒤 30대때 중의원에 첫 당선된 9선 의원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맹우’이자 당내 실력자인 야마사키 다쿠 전 부총재는 “총재 선거에 입후보할 경우에 대비해 정책을 다듬겠다”는 말로 출마의사를 밝혔다.
아베 대망론 거론
그런 가운데 오는 9월 임기가 끝나는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후계 총리’를 본인이 직접 지명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아베 대망론’이 본격 거론되기 시작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1월 11일 방문 중인 터키에서 기자 간담회를 갖고, 9월 자민당 총재 경선과 관련, “입후보 마감부터 투표일 사이에 (누구를 지지할지) 발표 하겠다”고 밝혔다. 바람직한 차기 총리 자격에 대해서는 “새 총재 아래서 선거에 이길 수 있을지가 큰 요소가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언급에 비춰 고이즈미 총리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인 아베 신조 관방장관을 지지할 것으로 보인다. 아베의 지지율은 40% 이상이다.
지난 연말 고이즈미 총리는 관저에서 열린 오찬 자리에서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원동력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행동력이었다. 요시다 쇼인이 있었기에 (그에게서 배운)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가 나왔다”고 말했다. 자신을 쇼인, 아베를 신사쿠에 비유하면서 두 사람 관계를 ‘스승과 제자’로 표현한 것이다. 며칠 후 고이즈미 총리는 또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어려움에 직면해 도망치면 안 된다”며 아베의 출마를 촉구했었다.
아베 장관은 일본 정계에서 보기 드문 명문가 출신이다. 196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이뤄낸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 명외상으로 불린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전 외상의 후손이다. 아베 장관은 정치 목표로 ‘보수 재구축’을 내걸고 있다. 외교 안보 교육 등 기본정책에서 자민당이 냉전시대에 잃어버린 ‘보수정당다움’을 되찾겠다는 것이다.
5선으로 자민당 간사장을 지낸 그가 차기 총리 후보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2년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방문 직후 터져 나온 납치피해 가족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부터다. 아베 장관은 “총리가 되는 것은 천명(天命)”이라며 몸을 한껏 낮춰왔지만, 최근 들어 “새로운 길로 산 정상에 오르겠다”, “인생에서 이렇게 좋은 기회는 없다”면서 서서히 의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가 차기 일본 총리가 될 경우 한·일 관계는 “고이즈미 총리 때보다 잘 될 수도 있고, 더 나빠질 수도 있다”고 외교소식통들은 말한다. 그는 “야스쿠니 참배는 총리의 책무”라고 공언하는가 하면, 역사왜곡 교과서 보급을 지원해왔다. 반면 친한파 정치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국을 상당히 배려하는 편”이라는 평가도 있다.
파벌경쟁에서 세대간경쟁 양상으로
올 9월로 예정된 자민당 총재 선거는 각 파벌이 내세운 후보간 경합이라는 기존 방식보다는 당내 신·구 세대간 대결 양상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포스트 고이즈미' 유력 후보 중에서 파벌 영수는 다니가키 재무상 혼자뿐이다. 반면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이 된 '모리파'는 아베 관방장관과 후쿠다 전 관방장관 등 두 명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모리파 영수인 모리 요시로 전 총리는 파벌의 분열을 막으면서도 자신의 주도하에 새 정권을 탄생시키고자 하는 계산 하에 아베 관방장관의 출마 자제를 촉구하고 있다. 모리 전 총리의 의중에는 자민당 내 중진과 원로들의 지지도가 높은 후쿠다 전 관방장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아베 관방장관에게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출마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는 국민적 인기가 높은 아베 관방장관을 이른바 '고이즈미 칠드런(children)'이라고 불리는 초선 의원 모임이 전폭 지지한다면, 고이즈미 총리는 모리 전 총리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민당 내 지지 기반을 굳히고 영향력도 계속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속셈'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마이니치신문’은 지난 1월 3일 "51세인 아베 관방 장관이 차기 총리가 된다면, 자민당 내 세대교체가 이루어 질 것"이라면서 "스스로 '성숙 세대'라고 칭하는 야마사키 전 부총재와 가토 고이치 전 간사장뿐만 아니라 모리 전 총리의 영향력 저하도 불가피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모리 전 총리가 아베 관방장관의 출마를 꺼리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꺼지지 않는 야스쿠니 '불씨'
“총리가 되려면 야스쿠니 사무라이가 돼야 한다?” 연초부터 도쿄 정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화두는 ‘야스쿠니 사무라이’다. 오는 9월, 차기 집권 자민당 총재(총리 겸직)를 결정하는 전당대회에 출전하는 후보들의 가장 중요한 ‘자격 요건’이다. 장검을 치켜들고 앞장서 나가는 과거 일본 무사계급인 사무라이가 되라는 게 아니다. 눈치코치 볼 것 없이 야스쿠니신사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총리직을 거머쥘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그러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만 강요하는 ‘충성 경쟁’이지 유권자 절대다수가 요구하는 조건은 아니다.
고이즈미 총리는 4년여 집권 이래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한국·중국과의 관계를 최악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역대 총리 가운데 국내에선 유례없는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과거 전국 시대 사무라이처럼 옆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 소신대로 밀어붙이는 ‘독특한 리더십’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를 쏙 빼닮은 이런 스타일의 인물을 찾고 있다. 현재 총리감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인물들은 앞 다퉈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맹세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하지만 후보들의 이런 맹목적인 ‘서약’은 만만찮은 역풍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야스쿠니 참배 문제가 자민당 총재 경선에서 쟁점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정치 분석가들이 적지 않다. 야스쿠니 문제가 안고 있는 ‘폭발력’ 때문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해 9·11 총선을 앞두고 이 문제를 피해갔다. 8월 15일은 일본에서 종전기념일이기 때문에 시민들이 신사를 찾아가 전사한 가족과 조상신에게 참배한다. 이날 고이즈미 총리는 우익세력의 열화 같은 요구를 물리치고 A급 전범 위패를 안치한 야스쿠니신사를 찾지 않았다. 총선을 앞두고 불리한 문제를 ‘이슈화’하지 않으려는 계산 때문이었다.
자민당 차기 총재 선거에서 야스쿠니 참배 문제가 불거질 경우 불리할 수밖에 없는 쪽이 고이즈미 총리 등 우익세력이다. 일본 여론은 국력 팽창과 함께 보수 우익화하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아직도 침략적인 과거와의 단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 많다. 더구나 한·중·일 3국이 야스쿠니 문제로 심심찮게 설전을 벌이는 상황이어서 여차하면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워질 것이다. 이에 유력한 총재 후보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장관은 16일 인도, 호주와의 관계 강화를 명분으로 ‘아시아 외교 중시론’을 내세우며 쟁점 전환을 시도했다. 야스쿠니 문제의 이슈화를 차단하기 위한 전술의 일환이다. 그는 “야스쿠니 문제는 주변국과의 갈등을 증폭시킬 우려가 있다”며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도 아베 관방장관은 총리가 되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를 먼저 건드린 인물은 공교롭게도 고이즈미 총리의 오랜 친구이자 최측근인 야마자키 다쿠(山崎拓) 전 자민당 부총재. 그는 최근 TBS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를 비판하는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관방장관을 거들고 나섰다. 그는 “후쿠다 전 관방장관의 생각에 크게 공감 한다”면서 후쿠다 전 장관을 지지할 것이란 의중을 내비친 것이다. 두 사람은 아시아 외교를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국립 전몰자추도시설 건설을 추진하기 위한 국회의원연맹 결성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야마자키 전 부총재는 “아시아 외교가 꽉 막힌 현실을 방치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차기 정권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사람이 총리가 돼선 안 된다는 뜻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정치적 맹우로 생각하는 ‘지기’가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은 고이즈미 총리에겐 충격적이다.
최근 총재 경선을 ‘국민참여형’으로 치르자는 고이즈미 총리의 주장도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반국민이 경선에 참여할 경우 여론조사에서 인기 1위를 달리는 아베 관방장관이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아베를 지지하는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전 자민당 간사장마저 “국민투표나 여론조사로 총재를 뽑는다면 국회의원과 당원은 필요 없다”고 비판했다.
자민당과 연립여당을 구성하고 있는 공명당도 연초부터 야스쿠니 참배 문제를 걸고넘어졌다. 간자키 다케노리(神崎武法) 공명당 대표는 최근 NHK방송에 출연해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정부를 대표하는 총리와 외상, 관방장관은 참배를 자제해야 한다”며 현 정권의 트로이카인 고이즈미 총리와 아베 관방장관, 아소다로(麻生太郞) 외상을 싸잡아 비판했다.
와세다대학의 다카하시 이치로 교수는 “차기 총재 경선을 결정지을 쟁점 가운데 야스쿠니 문제가 틀림없이 불거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카하시 교수는 “고이즈미 총리의 리더십이 탁월하다는 데 이견이 없지만, 우려스러운 것은 국민을 좀 더 건설적 방향으로 이끌기보다는 대중적 감정에 영합한다는 점”이라고 우려했다.
그런 가운데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일본 총리가 ‘포스트 고이즈미’ 후보 4명에 대한 인물평을 공개해 화제가 되고 있다.
모리 전 총리는 자민당의 최대 파벌을 거느린 정계 실력자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도 이 파벌 소속이다. 예전 같으면 차기 총리 구도에도 결정적인 발언권을 갖는 위치지만 고이즈미 개혁으로 자민당의 체질이 바뀌는 바람에 그의 영향력은 일단 축소된 상태다. 모리 전 총리는 도쿄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9월에 임기가 끝나는 고이즈미 총리의 후계감으로 거론되고 있는 4명에 대해 촌평했다.
여론조사에선 압도적 1위를 달리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장관에 대해서는 “순진 그 자체”라고 했다. 그러고는 “정치인은 뱃속이 검은 사람이 많지만 그는 맑기 그지없다”며 “좀 더 수련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아직 나이가 있으니 차기보다는 차차기에 적합하다는 종래의 지론을 반복한 것이다.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관방장관에 대해서는 “침착 냉정형, 얼핏 차갑다는 느낌이 있지만 사귀면 사귈수록 맛이 우러난다”고 평했다. 모리 전 총리는 “후쿠다 의원은 관방장관으로 총리의 견마 역을 훌륭히 수행했으며 좋은 지도자가 될 소양을 갖추고 있다”고 평했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외상에 대해선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의 외손자로 도련님 이미지를 피하려고 일부러 거들거리는 투로 행동하고 있지만 외상이란 직책으로 보면 걱정 된다”고 말했다.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楨一) 재무상에 대해서는 “정책 추진에는 성실하지만, 자기 일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평한 뒤 “(총리가 될) 준비가 아직은 덜 됐다”고 지적했다.
아베 “자민당 총재 경선 쟁점은 아시아 외교”
차기 일본 총리 후보 0순위로 거론되고 있는 아베 신조 관방장관이 아시아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일본 언론들이 보도했다.
아베 장관은 NHK 프로그램에 출연, “(오는 9월 실시되는 자민당 총재선거에서는) 아시아 외교문제가 당연히 이슈가 될 것이며 후보들은 어떤 외교 전략을 품고 있는 지 설명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인도 등과의 관계증진 필요성은 강조하면서도 한국과 중국에 대해서는 기존 틀을 그대로 유지했다. 일본 내에서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보다 더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가 총리로 당선되면 아이사 외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 및 중국과의 관계는 더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그는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중국은 군사적 부문에서 지난 수십 년간 두자릿수 이상의 지출을 해오고 있어 투명성을 개선할 필요성이 있다”고 중국의 군사력 증강에 우려를 표시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서도 “후보자들이 견해를 밝히기 시작하면 발언 의도를 떠나 정치적, 외교적 논란을 야기하게 된다”면서도 “그러나 한 명의 정치인이자 국민으로서 국가를 위해 숨진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을 유지하고 싶고 이런 감정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속내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