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WCI은 4년 마다 개최되는 올림픽 때 올림픽이 열리는 국가에 찾아가 지친 올림픽 출전 선수들을 격려·위로하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단체이다. 김재범 선수가 집회에 참석한 세계 각국인들 앞에서 간증할 때 옆에서 통역을 한 원로목사가 있었다.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대외협력 부총장이자 한국독립교회 및 선교단체연합회 회장인 송용필(75)목사가 그 주인공이다. 한국기독교스포츠총연합회 대표회장이기도 한 송용필 목사는 LWCI의 ‘Global Director for Asia’ 직책을 맡고 있으며 집회에서는 한국인 통역을 맡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미국 육상의 전설인 갈색탄환 ‘칼루이스’의 간증 시 한국어 통역을 맡기도 했다.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8월1일 부터 16일까지 영국 런던에 머물며 LWCI의 사역을 도왔던 송 목사는 작년에 암 판정을 받았었다.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초기에 비해 지난 1년간 치료를 받으며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으나 현재까지 주의를 요하는 상태이다. 이러한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역에는 일절 마다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쯤 되면 인터뷰보다 송 목사의 건강이 오히려 염려스러워지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래서 준비했던 질문은 뒤로 제쳐두고 기독교계 원로인 송 목사의 지난 삶을 청해 듣기로 했다. 날 세운 어설픈 질문보다 오히려 그가 전해줄 잔잔한 이야기에서 진실이 드러날 것이며, 종교가 횃불로 타올라야 할 어수선한 시기에 종교계 원로목사가 몸소 드러내는 언행이야말로 우리가 허리를 곧추세워 청해야 할 소중함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밑바닥에서 들어 올린 하나님의 일꾼
송 목사의 삶은 한국의 굴곡진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었다. 1938년에 함경남도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되던 해에 충남 공주로 내려와 한국전쟁 통에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그는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고도 학교에 가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한 집안 형편을 뒤로 하고 혈혈단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수원역에 첫 발을 디딘 그는 낯선 이의 손에 이끌려 양아치굴(거지굴)로 들어갔다. 옷을 벗기고 속옷만 입힌 채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상황에 그는 틈을 타 역전 파출소로 도망쳐 나왔다. 오갈 데 없던 그는 한동안 파출소 내에 있으면서 경찰들의 잔심부름을 해주거나 구두를 닦게 되었다. 이것이 혈혈단신 아이가 역전을 무대로 구두닦이 삶을 시작한 계기였다. 물론 가족은 공주에 있었지만 도와줄 형편은 아니었다. 송 목사는 돌이켜보면 그때도 감사한다고 말했다. 어린 나이에 술, 담배, 도둑질 같은 위험요소에 그렇게 많이 노출되었지만 단 한 번도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았음에 감사한다고 말이다.

수원역전 구두닦이에서 그 당시 지성인의 상징이던 대학생으로의 변모는 극적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변신은 멈추지 않았다. 군 제대 후 복학하려고 할 시점이었다. 복학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으므로 막일이라도 할 직장이 필요했다. 마침 오산비행장이 거의 지어진 시점이었는데 마침 노무자 모집을 하고 있었다. 이때 연이 있었던 김장환 목사(現 극동방송 이사장)의 도움으로 오산비행장의 기지 부사령관(대령)을 찾아가서 취직을 부탁하게 되었다. 그 결과 부사령관과의 특별한 인연이 맺어지게 된다. 부사령관이 미국에 돌아가 고향 교회에서 간증을 하다가 한국에 있던 가난한 고학생이던 송 목사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었고, 그 얘기를 들은 미국 교인이던 어느 할머니는 송 목사에게 편지를 썼다. 미국으로 와서 대학원을 다니면 도와주겠노라는 내용이었다. 유학이 쉽지 않았던 시절, 송 목사는 대학 졸업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대학원(회계학)에 다니며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송 목사는 이 과정에서도 김장환 목사의 도움은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큰 것이었다고 회고한다. 미국 유학을 하면서 만난 한국 유학생과 결혼하고 회계사로서 새로운 인생으로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자수성가형·입지전적인 인물의 전형이랄 수 있는 송 목사의 제1의 인생이었다면, 제2의 삶의 단초는 성경공부를 하던 어느 순간에 벼락같이 다가왔다. 성서 열왕기 하편 7장에 나오는 문둥병환자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인양 다가온 것이다. 성서의 문둥병환자들이 예수님의 도움으로 아람군대의 재산을 거저 얻어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다가 회개하여 고통 받는 성 안의 사람들에게도 기쁜 소식을 알린다는 내용이다. 송 목사는 그가 예수님의 도움으로 인생의 변화무쌍함을 거듭해 미국에서 잘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 문둥병자들의 거저 얻은 재산에 오버랩 된 것이었다.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이 경험은 그를 신학교로 이끌었고 졸업 후 한동안 미국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러던 중 미국에서 열린 한 선교대회에 한국에서 강사로 온 김장환 목사와 재회하게 되었다. 당시 극동방송 사장이던 김장환 목사의 방송을 통한 선교에 동참하기로 결정하고 1977년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미국의 유명한 방송 설교가였던 ‘버논 매기’ 목사의 강의 자료를 가지고 극동방송에서 15년간 매일 성경강의를 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극동방송 부사장, 목회자, 교육자, 라디오 방송 목사 등을 통해 하나님을 섬겨왔고, 현재도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대외협력 부총장 등 여러 직분을 맡고 있다.
지난한 가정을 벗어나고자 몸부림 쳤던 어린 시절, 구두닦이로 생활하면서도 놓지 않았던 학구열, 고등학교와 대학교 공부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할 수 있게 진행되었던 모든 상황과 주변인들. 그리고 미국에서의 회두. 국내에 들어와 목회를 펼친 일들. 한 편의 드라마도 이처럼 짜임새 있기 힘들다. 이들 모든 것은 송 목사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하셨음이라고 고백하는 그다. 두어 시간 내내 이어진 인터뷰에도 변함없이 맑게 빛난 안색에서 암환자의 낯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여생동안 힘닿는 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할 것이라는 원로목사의 기품이 사무실을 그윽하게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