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 최고의 화두로 떠오른 ‘경제 민주화’.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대선 출마 선언을 통해 경제 민주화를 핵심 정책 기조로 내세웠다. 민주통합당 역시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에 당의 명운을 걸겠다’며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을 당론으로 확정 발의했다.
여야 정치권의 핵심 어젠다로 떠오른 ‘경제민주화’
“시장경제의 효율을 극대화하고,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과 기능을 강화하여 경제민주화를 구현한다. 시장경제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경제세력의 불공정거래를 엄단하여 공정한 경쟁 풍토를 조성한다.”
“우리는 당면한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공정한 시장경제의 확립이 필요하며, 재벌과 대기업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공유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고, 조세정의를 실현하며, 부동산 투기 등으로 인한 불로소득을 근절하는 경제민주화 정책을 실현한다.”
앞의 것은 새누리당이 지난 2월 새로 만든 ‘국민과의 약속(강령)’ 10대 약속 가운데 셋째 조항이다. 뒤의 것은 민주통합당 강령 24개 항 가운데 첫째 조항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경제 민주화’를 시대적 소명으로 내세우고 있는 가운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서로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다.
먼저 새누리당은 기존의 시장질서는 인정하면서도, 현재 불공정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 개선, 대기업의 신규 출자제한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민주통합당은 경제 양극화와 불평등 문제의 근원을 재벌 집단으로 보고, 재벌의 개혁을 통한 시장질서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결국 온도 차이는 있지만 대기업 개혁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다 최근 야권의 유력한 대권 잠룡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까지 가세하는 모습이다. 안 원장은 최근 출간한 저서 ‘안철수의 생각’에서 복지와 관련해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의 전략적 조합으로 풀어야 한다”면서 “복지를 늘리면 남유럽처럼 재정 위기를 겪게 된다는 주장은 회의적”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선 출발선, 과정, 재도전에서 공정과 정의가 실현돼야 한다”며 “특히 우리 사회의 정의 문제는 경제 민주화와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재벌의 확장과 이에 따른 시장 왜곡을 바로잡아야 하며, 재벌의 경쟁력을 살리되 내부 거래 및 편법 상속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는 등 단점과 폐혜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계 일각에서는 정치권의 재벌 개혁이 무차별적인 ‘대기업 때리기’로 변질 될 경우를 걱정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정치권 주도의 재벌 개혁은 기업들의 투자 의욕과 고용 창출 저해를 불러올 것이라는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대선주자들의 ‘경제민주화’ 손익계산서
최근 여야 할 것 없이 정치권에서 언급되고 있는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분명하다. 바로 재벌규제다. 사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재벌로 통칭되는 대기업들에 대한 규제가 상당 부분 풀렸고, 몸집과 경제적 영향력이 커졌다. 하지만 이제는 풀렸던 규제 나사를 다시 조이고, 부풀려진 재벌들의 군살을 빼겠다고 정치권이 너 나 할 것 없이 나선 것이다.
이명박 정부와 정책의 보조를 같이했던 새누리당과,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바로 세운다) 공약으로 2007년 대선에 뛰어들었던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마저 기존의 노선을 버리고 좌클릭을 선택했다.
정치권은 현재 연말 대통령 선거를 위해 전력 질주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질주의 힘을 보탤 엔진으로 경제민주화를 세팅했다. 국민들은 어느 쪽의 경제민주화가 진정성과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시간을 두고 냉철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국민들의 손끝에서 갈리는 선택에서 향후 5년, 대한민국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대통령 선거를 4개월 여 앞두고 여야 대권 주자들의 출마 선언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대선 주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경제민주화를 언급하며 이슈 선점을 위한 치열한 경쟁모드에 돌입했다.
포문은 박 전 새누리 비상대책위원장이 열었다. 지난 7월10일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는 자리였다. 박 전 비대위원장의 대선 출마는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출마 선언을 하며 박 전 비대위원장은 지난 노선에서 확실히 벗어난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재벌규제를 상징하는 ‘경제민주화’를 꺼내든 것이다.
박 전 비대위원장이 예로 든 것은 대기업들의 순환출자 문제. 경제민주화를 외치며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 금산(金産)분리 강화 등 강도 높은 재벌규제 정책의 추진 의지를 밝힌 민주통합당에 비해 메뉴는 단출했지만, 임팩트 만큼은 확실했다.
지난 2007년 대선후보로 나선 박 전 비대위원장이 내세운 것은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바로 세운다) 정책기조였다. 5년이 지난 2012년, 다시 한번 대권 도전에 나선 박 전 비대위원장의 정책기조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새누리당은 최근 경제민주화 첫 번째 입법안으로 재벌들의 경제범죄 처벌을 강화하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을 제출하며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횡령·배임 등 경제범죄의 범위를 늘리고 형량도 3년에서 7년으로 높여 집행유예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반면, 민주통합당은 박 전 비대위원장의 경제민주화 선언에 앞서, 이미 큰판을 벌여놓은 상태였다. 민주통합당이 경제민주화 실현을 위해 내놓은 어젠다들은 상당히 높은 강도를 내포하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다양한 내용들의 지향점은 역시 재벌규제에 초점이 맞춰졌다.
민주통합당 유력 대선후보인 문재인 상임대표는 “경제민주화로 시대교체를 하겠다. 재벌개혁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이자 출발”이라고 밝혔다.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와 손학규 상임고문도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내걸고 경쟁에 뛰어들었다. 정치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화두로 꺼내든 경제민주화의 실체는 결국 재벌규제이다.
극명하게 갈리는 여야의 해석차
현재 정치권이 이야기하고 있는 경제민주화의 기본정신은 헌법 119조 2항(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을 근거로 하고 있다.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 이 부분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수혜층이 된 재벌의 현주소와 오버랩, 규제와 조정이 필요하다는 국민적 공감대를 상징화한 경제민주화로 진화한 셈.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양 진영의 경제민주화는 이를 공유하고 있다.
문제는 규제와 조정의 범위에 대한 해석 차이다. 새누리당은 대기업의 경쟁력은 유지하되, 불공정 행위나 중소기업 업종 침투, 일감 몰아주기 등 대주주의 사익 추구 행위는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민주통합당은 재벌특권 경제에서 민생중심 경제로의 대전환을 추구하고 있다.
특히 민주통합당은 출총제 부활, 금산분리 강화, 재벌세 도입, 고소득자 과세강화 등이 총망라된 ‘경제민주화 9대 입법안’을 공동 발의하는 한편, 당 대선주자들의 공통공약으로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대내외에 공표했다.
새누리당 또한 재벌규제와 고소득자 과세강화 등을 뼈대로 한 정책노선을 따라가는 양상이지만, 강도는 완화해야 한다는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새누리당은 민주통합당이 꺼내든 출총제 부활 등 고강도 재벌규제 정책에 반대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홍일표 새누리당 원내대변인은 “출총제와 금산분리 강화는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생각이지만, 신규 순환출자 금지와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에 관해 당내 논의가 진행 중”이라며 “정책의총을 열어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제민주화 주도권 다툼, 우려하는 재계
민주통합당은 물론, 새누리당까지 대선 이슈로 경제민주화를 꺼내들며, 경제민주화를 시대적 흐름으로 확정지어 버린 만큼 대선 직전까지 이어질 정치권의 행보와 주도권 다툼 결과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승부의 향방은 대선 결과로 판가름 나게 된다. 대선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는 상태다.
새누리당 유력 대선후보인 박 전 비대위원장은 3대 공약 중 경제민주화를 맨 앞에 정렬시켰고, 민주통합당은 ‘재벌개혁에 당 명운을 걸겠다’는 외나무다리 전략을 선택했다. 이에 따라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논쟁은 정치권은 물론 사회전반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변수는 여론 동향. 재벌들의 독주에 감정이 좋지 않은 일반국민들 입장에서 볼 때 어떤 형태 또는 강도로든, 재벌을 옥죄겠다는 정치권의 행보는 거부감이 덜한 측면이 큰 것이 사실. 하지만 규제 대상인 재계는 강한 반발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재계 안팎에서는 유럽발(發) 재정위기를 통해 각국이 긴축 재정에 돌입하고, 분배를 지양하는 대신 성장 위주의 정책기조로 노선 변경을 꾀하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성장의 핵심동력인 대기업 규제를 강화하는 것은 ‘엇박자’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정부도 정치권의 행보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도 최근 “경제민주화가 지나치면 우물 안 개구리 신세가 될 수 있다”며 “외국인 투자 저해와 무역장벽 등의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와 재계의 반발여론을 정치권이 어느 정도까지 흡수할지는 현재로서는 미지수. 다만 절대적 다수의 표심(票心)을 얻기 위해 선택한 경제민주화 화두를 정치권이 쉽게 내동댕이칠 가능성은 매우 낮은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지금 막 불을 당긴 상황에서 승자 독식 구조를 개선하면서 기업의 활력을 유지하고, 국가의 성장동력을 강화시킬 균형감 있는 최적의 정책을 정치권이 내놓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무리수에 속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경제민주화 바람, 포퓰리즘화 ‘경계령’
경제민주화 이슈 선점을 놓고 일각에서는 개혁의 대상인 재벌들의 반발에 부딪혀, 실효성 있는 정책을 내놓지 못할 경우 경제민주화가 결국, 포퓰리즘(Populism)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지난 4·11 총선과정에서도 정치권은 재정여건을 제대로 감안하지 않은 채 경쟁적으로 복지확대 정책을 쏟아내며 포퓰리즘 논란을 스스로 부추겼다. 최근 벌어진 0-2세 영유아 보육예산 고갈사태가 좋은 사례다.
지금 당장은 이슈의 불을 지핀 단계이기 때문에 강공 드라이브를 유지할 필요가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개혁 대상으로 지목된, 재벌들의 공세에 일정부분 방향전환이 가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울러 콘텐츠의 부족 현상이 빚어져 종국에는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내세우는 정책기조에 차별성이 사라질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이필상 고려대 교수는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바람은 포퓰리즘 성격이 강하다”며 “재벌개혁을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현재까지 그 대안으로 중소기업을 어떻게 육성할 지에 대한 정책들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경제민주화는 재벌개혁과 함께 중소기업 육성, 투 트랙으로 가야한다. 여야가 정책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대기업들이 나중에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 또 도움을 요청할 것”이라며 “(출총제 등이)근본적인 재벌개혁의 정책인 것은 맞지만 굉장히 위험하다. 외국자본으로 잠식될 수도 있어 대안을 준비하면서 단계적으로 가야한다”고 강조했다.
정치평론가인 신율 명지대 교수도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 정책은 평가할만한 근거가 충분치 않다. 말만 할 뿐 지금 내놓은 것은 솔직히 민주통합당보다 못하다”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이어 “재벌이 기형적 구조인 것은 맞고 경제민주화가 시대적 흐름이기 때문에 지금 구체적 정책이 없어도 (새누리당이)민주당의 안을 답습할 수도 있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