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세대가 등장했다.
이른바 Luxury-generation.
이는 본래 미국에서 명품 브랜드를 소비하며 부유층의 소비행위를 모방하는 고소득 여피족들을 일컫는 용어로 쓰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해외 명품 소비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대학생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고가의 명품을 장만하기 위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이 열광하는 ‘명품’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서울 강남에 사는 함주연(23)씨. 올해 대학 2학년인 멋쟁이 여대생이다. 그녀의 취미는 쇼핑, 틈만 나면 근처의 백화점에 들른다. 특별히 물건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다. 눈에 띄는 쇼핑거리를 찾기 위함이다. 그녀와 친구들은 학교에서 ‘명품족’으로 통한다. 그녀 스스로도 ‘명품족’임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생활한다. 신발은 페레가모, 재킷은 프라다, 바지는 알마니, 시계와 안경은 까르띠에, 가방은 MCM. 그녀가 착용하고 있는 명품 값을 대충 따져보면 5백만 원은 족히 넘을 것 같다.
함주연씨는 재벌 2세는 아니다. 부유한 중산층의 자녀도 아니다. 갑남을녀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여대생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소비하는 고가의 물건이 흔히 볼 수 있는 ‘짝퉁’이도 아니다. 그래서 그녀의 하루는 무척 바쁘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 오전에는 근처 유아원에서 시간당 8천원 하는 피아노 레슨을 한다. 빠듯하게 수업에 들어가 오후 수업을 마친 후 주중에는 학교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말에는 방송국 쇼프로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며 명품소비를 위한 돈을 모아들인다. 지금은 겨울방학이 시작되어 일주일에 3일은 중학생 과외를, 주말을 포함한 나머지 4일은 스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물론 그 밖의 그녀의 용돈은 부모님의 몫이다.
“제가 가지고 있는 명품은 모두 진품입니다. 하지만 매장에서 정상가격에 구입한 것은 거의 없죠. 백화점에서 눈여겨보아 두었다가 늘 할인매장이나 수입상가에서 구입합니다”
덕분에 정상가격에 40%이상 싼값에 구입한다고 귀뜸을 하기도 한다. 그녀가 명품을 선호하는 이유는 정확했다. 명품을 사는 게 오히려 돈을 아끼는 것. 그녀의 주장은 이렇다.
“하나를 구입해도 싫증나거나 유행에 민감하지 않아 오래 사용할 수 있죠. 물론 비싼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몇 년씩 혹은 십년이 넘도록 사용한다는 보장이 있는데 그정도 투자는 아깝지 않죠”
이런 점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합리적인 소비자’라고 말한다.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이른바 ‘명품계’ 명목으로 매달 10만원씩 돈을 모으고 있다. 매학기 방학마다 인도네시아에 친척이 있는 친구가 출국을 하기 때문이다. “명품 가격을 한국과 비교했을 때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동남아로 일부러 ‘명품 쇼핑’을 가는 이들이 있기도 하다던데, 저희는 기회가 좋은 거죠” 꼭 갖고 싶었던 리스트를 적어 두었다가 친구가 나갈 때 체크를 해 주면 고가의 신상품을 절반 이하의 가격으로 살 수 있다고 한다.
이제 함씨와 같은 L-제너레이션은 대학가에 부는 바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고생들에게까지 빠르게 전이되고 있는 이런 현상은 학내에서 ‘명품족’과 ‘가짜족’으로 편을 갈라가며 빈부차와 더불어 위화감마저 조성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가 하면 70만원 짜리 손목시계에 1백만원을 호가하는 정장을 입고 10만원짜리 머리방울을 뽑내는 초등학생들도 심심치 않게 보도되고 있어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부모의 무분별한 자녀 치장 욕구가 어린이들의 사치 경쟁을 부르며 생겨난 달갑지 현상이라 볼 수 있겠다.
부분별한 ‘명품’남용
한 인터넷 사이트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다.
“명품이 과소비이고 거품이라는 지적은 모르는 사람들의 얘기다. 1,2년 쓰고 버리는 물건인가. 대를 물려준다. 다른 사람들이 5만원짜리 1년 쓰고 버릴 때 나는 50만원짜리를 10년 아니라 30년을 쓰겠다. 훨씬 경제적이다. 또 명품 브랜드는 패션을 리드하는 만큼 어차피 유행 디자인이 여기서 나온다. 명품이 주는 품위와 질적 만족감까지 계산하면 가치는 그 이상이다”
이처럼 한국의 소비 행태가 빠르게 변화고 있다. 연예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외국의 값비싼 브랜드는 이제 일반인도 평범하게 소유하고 있고, 일부 부유층의 과소비 형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까지 했었다. 그 결과 ‘명품족’이란 고유어를 생성해 내고 나아가 ‘L-제너레이션’이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오르내리고 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은 ‘력셔리 족’들의 메카 지대로 정평이 나있다. 그들은 소리 소문없이 여기저기 집단을 형성한다. 물론 그들의 원조는 부유한 가정환경의 ‘명품족’들이다. 그들은 형편이 비슷한 또래들과 어울려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다. 모임에 들기 위해서는 집에 외제차가 있는지 등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할 정도. 또 모임에 초대할 친구들에겐 서양의 파티초대장처럼 티켓을 발부한다. 김 현(연대 2년)군은 “요즘 명품족이라 불리는 학생들은 옛날 돈만 많았던 오렌지 족과는 질적으로 차이를 보입니다. 대부분 명문대 출신으로 학벌과 가정환경이 비슷한 자신들만의 모임을 결성해 동질감을 나누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학생들의 반응들 또한 다양하다. 일부 ‘평범족’들은 그들 대열에 들기 위해 밤낮으로 숨은 노력을 아끼지 않고, 한편에서는 그들의 무분별한 명품소비지향에 대한 반발이 상당하다. 한 여대의 게시판에는 위화감을 조성하는 명품족을 비난하는 글과 “내돈 내가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식의 반대의견의 글이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윤지연(이화여대 2)양은 “일부 학생들의 물질 만능주의는 이제 정말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소비 심리는 위화감과 사행심을 조장할 뿐 형편이 되지 않는 학생들까지 명품바람에 휩쓸리게 하고 있습니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한 대학의 ‘명품선호 및 의식’에 관한 설문조사에서 “당신은 ‘명품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문항에 전체 500명 응답자 중 ‘그럴 수 있다’가 291명, 58.2%로 과반수 이상을 차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심하다’ 122명, ‘아무 생각 없다’ 68명, 기타의견으로 ‘능력별이다’, ‘좋은 물건의 가치를 안다면 나쁘게 생각되지 않는다’, ‘꼭 명품만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 같다’, ‘부럽다’ 등으로 나타났다. “사치스런 소비형태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 500명중 252명이 ‘국내 브랜드의 세계화’를 꼽았고, ‘소비절약 캠페인 실시’ 122명, ‘판매법의 상혼 규제’ 87명, 기타의견으로는 ‘국산품에 대한 디자인의 다양화와 질의 향상’,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를 만든다’, ‘가치관 확립’, ‘정확한 세무조사를 통한 세금징수’ 등으로 조사됐다.
대학생의 눈에 비친 한국 사회는 아직도 경제보다는 자기 자신의 멋과 과시욕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시류를 좇는 캠퍼스의 명품바람은 대학도 이상과 이념이 아닌 겉치레를 좇고 있음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바람직한 소비행태 지향
“명품이란 오래된 고가품에 무조건 붙여주는 이름이 아닙니다. 문화와 영혼을 담은 창의적인 디자인으로 꿈과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명품이죠”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디자이너가 최근 명품바람이 불고 있는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남긴 말이다.
한국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명품’은 좋은 물건이 아니라 비싼 물건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또 하나 그러한 값비싼 상품 중 대부분의 외국 브랜드가 ‘명품’이란 거창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어느새 우리 생활에 일반 명사가 되어버렸다.
명품의 사전적 의미는 뛰어나거나 훌륭한 물건 또는 작품으로 정의된다. 또 그 안에는 누군가의 말대로 문화와 영혼이, 꿈과 영감이 깃들여 있어야 한다. 따라서 ‘명품’이라는 가치를 부여받는 것만으로도 회사는 특별한 명예를 얻게 되고 상품은 각별한 권위와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외국 브랜드를 달고 소위 명품관이나 명품 코너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곧 훌륭한 제품이요, 뛰어난 작품이라는 일반화의 오류는 이제 사장되어야 할 한국적 선입견이다.
이제야 말로 진정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어떻게 정해졌는지 모른 ‘명품’이 곧 ‘값비싼 외국 브랜드’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면, 역으로 한국의 제품은 저가의 저품질의 상품이라는 인식을 더욱 확산시키는 결과를 초래 할뿐이다. 사실 명품관이나 명품코너의 속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브랜드는 외제지만 기술 제휴 등의 방법으로 한국에서 만들고 있는 제품들이 대다수이며 유명 브랜드에 포함될 수도 없는 ‘명품’답지 않은 ‘명품’도 허다한 실정이다.
이제 한국 시장에서 생산, 유통되는 우수한 우리 제품에도 관심을 가져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인 스스로 한국 상품을 깎아 내리는 행위는 이것으로 족하다. 외국 브랜드에 스스로 ‘명품’이라는 호칭을 부여하는 행위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정체성을 방황하게 것이다. 그것이 비록 상품에 대한 정체성의 혼돈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엔 정신적 정체성마저 흔들게 되지 않을 장담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대학생들 스스로가 사치스런 한국의 소비행태를 지양하기 위한 방안으로 국내브랜드의 세계화를 외치고 있다. 기술이 부족해서 ‘명품’이 없는 것이 아니다. 품질이 떨어져서도 아니다. 이제 진정한 ‘명품’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훌륭한 ‘명품’을 소비할 수 있는 현명한 소비자가 되기 위한 자질을 갖추어야 할 때이다.
우리는 소신족…대학가에 부는 ‘반(反) 명품’ 바람
고가의 외국 제품을 ‘명품’이라는 명목으로 소비하고 스스로 ‘명품족’임을 자부하던 일부와는 달리 국산의 중저가 브랜드를 소비하고 있는 ‘반 명품족’이 대학가에 새로이 부상하고 이다.
예전에는 이미테이션 상품을 구입해서라도 명품족을 흉내내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들 반 명품족들은 당당하게 그들의 실속파 브랜드를 과시하고 있다.
“경제적 자립기반이 없는 학생들이 고가의 외제 상품을 남의 시선을 의식해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가영(단국대학교 3)씨는 잘못된 소비문화가 대학가를 물들게 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사실 내면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명품을 쫓아 다니는 것 아닐까요?”
‘반 명품족’으로 대변되는 이들은 홍대나 이대 앞이 주요 쇼핑 장소이며, 쌈지, 아이삭, 나라야 등 중저가 국산 브랜드를 주로 선호한다.
“가짜로 치장한 명품족 흉내로 스스로를 낮추기보다 우리 주머니 사정과도 적합하고, 질적으로도 디자인으로도 떨어지지 않는 제품으로 얼마든지 멋을 낼 수 있죠”
실제로 이들은 적게는 50만원에서 많게는 2백만원을 호가하는 명품제품들에 비해 70∼80% 저렴하면서도 브랜드 인지도나 품질면에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이들 반 명품족의 증가는 경기불황으로 인한 고가품의 소비 위축을 원인으로 볼 수도 있지만, 대학생들의 건전한 소비의식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국은 이미테이션 천국?
명품 붐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제 값 주고 사면 바보’라고 할만큼 가짜 상품이 판치고 있다. 한국만큼 모조품 시장이 거대한 나라도 드물다. 때로 본 매장에서조차 진품과 구분 못하는 우리 제조기술은 과히 세계최고의 수준이다.
1990년대 서울 이태원 골목길을 점령하고, 명동, 동대문, 남대문 시장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록 확산되고 있는 명품 이미테이션 시장은 한때 한국의 관광 상품의 하나로 자리 잡았고’한국은 이미테이션 천국’이라는 불명예스런 타이틀을 선사하기도 했다.
해마다 한국의 국제공항 세관에는 동남아 등지에서 몰래 밀수입하려던 고가의 ‘명품’들이 대거 수거된 반면, 해외의 공항에서는 한국에서 몰래 밀수출되는 가짜 명품들이 세관을 통과하지 못하고 압수 당하거나 한국으로 반품되어 돌아오고 있다.
지난해에는 가짜 명품을 국제 우편을 통해 일본으로 배달하는 방법으로 해외로 반출시도 했다가 일본 관세청의 감시망을 뚫지 못하고 한국으로 되돌아온 사례도 있었다. 물론 이들 가짜들은 불법이기에 찾으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
가짜 상품으로 인한 피해는 소비자에게 터무니없는 상품에 과다 지출을 초래하게 한다는 문제점 외에도 이와 같이 국가 신인도 저하 및 통상마찰을 유발하거나 새로운 제품 개발 의욕을 저하시키기도 한다.
소비가 있으니 생산이 있다는 말이 있다. 일부 젊은이들 중에는 모방 욕구와 가격의 편의성 때문에 가짜 명품을 일부 구입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명 브랜드를 선호하는 소비자들이 모조품을 구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짜 상품으로 자신을 치장하다 보면 자기 자신이 가짜가 된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동대문 이미테이션 코너를 운영하는 한 상인은 주로 10대의 어린 여학생들이 주요 고객이라며 그들의 소비 경향이 염려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