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의 톱니바퀴가 빠르게 돌고 있다. 권력은 소수의 정치가들이 만드는 게 아니다. 민초들의 마음과 의지가 맞물려 견고한 형태로 돌아갈 때 비로소 권력이 만들어지고 나라가 굴러가게 된다. 정당정치가 위기로 내몰리고, 기성 정치인에 대한 염증이 정점에 다다를수록 이러한 민심의 톱니바퀴의 순환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민심의 톱니바퀴에 울고 웃는 與野
지난해 연말 여당 한 차례 홍역을 치렀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돈 봉투 사건을 비롯해 구태의연한 부정부패 의혹이 터져 나왔고, 임기 말에 접어 든 청와대 주위에서는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들의 비리가 쏟아져 나왔다.
여당은 출범 4개월을 갓 넘긴 홍준표 대표체제를 자진 해산하고 비상대책위를 꾸렸으며, 올해 중순쯤이나 등판할 것으로 예상됐던 박근혜 현 비상대책위원장을 전면에 내세웠다. 박 위원장과 비대위원들은 당의 정강정책을 대대적으로 손질하고, 14년 동안 유지해 왔던 당명을 바꾸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이로써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 당 지지율 끌어올리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야당은 상대적으로 우위를 서 있었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대승에 한껏 고무되어 있었으며, 현 정부에 대한 민심악화와 여당 주도의 한미FTA 강행처리의 여파로 한때나마 여당의 지지율을 앞서기도 했다.
‘이명박 정권 심판, 총선 승리, 대선을 통한 정권교체’의 기치를 내걸고 야권통합을 이뤄냈으며, 민주통합당으로 새 옷을 갈아입었다. 야권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민주개혁세력들이 규합했고, 이 결과 한명숙 대표체제가 등장하게 됐다.
진보진영 역시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노동계, 진보신당을 탈당한 노회찬, 심상정 전 대표 등이 규합해 통합진보당을 창당하는 등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홍세화 대표가 이끄는 진보신당까지 아우르는 범진보통합을 이뤄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우리 정치사상 최초로 진보정당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에 근접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와 함께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전략적 총선연대를 통해 승리의 폭을 넓히고, 향후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뤄내겠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석 달이 흘렀다. 그 동안 여의도 정가에서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각종 사건사고들이 줄을 이었다. 그런데 현재까지의 스코어를 보면 새누리당과 박근혜 위원장이 앞서고 있는 형국이다. ‘정권심판론’과 ‘집권여당의 무능론’으로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렸던 새누리당이 기사회생한 것이다.
대신에 민주통합당은 ‘말바꾸기 논란’과 ‘야당 심판론’ 등 역풍을 맞고 있는 모습이다. 공천과정에서 일사분란 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을 뿐더러, 통합진보당과의 총선연대 과정에서 대승적인 결단을 제때 내리지 못한 탓이 크다.
결과적으로 민심의 톱니바퀴는 여의도 정가의 권력지형도를 원점으로 되돌려 놨다. 이에 여야는 희비가 엇갈리는 모습이지만, 승패를 속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선거는 아직 예선전을 거치는 중이고, 민심의 톱니바퀴는 여전히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처절한 정당지지율 공성전(攻城戰)
대선이 ‘대통령’이라는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고지전이라면, 총선은 보다 많은 깃발을 차지해야 하는 공성전에 가깝다. 선거를 치르는 지역과 후보의 수가 많은 만큼 해당 후보에 대한 면밀한 검증을 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총선정국에서 각 후보만큼이나 소속 정당의 경쟁력이 중요하다. 본선 준비과정인 공천단계에서부터 선거의 열기가 달아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앙당을 중심으로 구성하는 공천심사위원회나 선거대책본부의 역할도 그만큼 중요해진다. 물론 기본적인 지지율은 후보의 역량이나 이미지에 기반한다. 하지만 지역구의 구도가 박빙으로 형성될 경우 소속 정당의 선거전략이나 정책이 지지율 등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도 사실이다. 총선 전에 활발하게 실시되는 정당 지지율 조사가 의미 있게 풀이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실시한 3월 둘째 주 정례조사에서 새누리당이 40.3%로 1년 만에 40%대 지지율을 회복했다. 민주통합당은 32.7%를 기록해 올해 들어 가장 낮은 수치를 보였다. 수치상으로는 7.3% 차이다. (조사기간: 3/5~3/9, 조사대상: 전국 19세 이상 유권자 3,750명, 조사방식: 휴대전화 20%, 유선전화 80% RDD 자동응답,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 1.6%p)
이는 약 40일 전 같은 기관에서 조사한 것과 정반대의 결과다. 1월 넷째 주 정례조사결과에서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은 30.3%로 민주통합당의 37.1%에 비해 6.8% 뒤지고 있었다. 불과 수세에 몰렸던 새누리당이 불과 40일 만에 민주통합당을 앞지르고, 당시의 격차만큼의 수치로 따돌린 상황이다. 이렇듯 뺏고 빼앗기는 정당 지지율 공성전 양상은 4.11 총선을 시작으로, 12월에 치러지게 될 대선까지 반복해서 나타날 것으로 전망된다.
승패의 관건은 ‘공격’이 아닌 ‘방어’
4.11 총선에 임하는 여야의 전략전술은 이미 다 드러나 있다. 공세적 위치에 있는 야권은 ‘정권심판론’을 필두로 한미FTA 강행처리, 경제파탄 등 현 정부의 실정을 중심으로 하는 파상공세를 퍼붓고 있는 중이다. 수세에 있는 여당은 한미FTA와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해 민주통합당 지도부의 한 축을 차지한 친노인사들의 말 바꾸기 논란을 주요 공격무기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여야의 공격대형은 그다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권이 내세우는 ‘말 바꾸기 논란’과 야권의 ‘정권 심판론’이 정면충돌하면서 상호 희석효과가 발생한 탓이 크다. 다시 말하자면 양 진영이 서로의 약점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서로의 변별력을 지우고 ‘서로 같은 세력’으로 평가받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현재 여야를 붙잡고 있는 것은 상대진영이 아니라, 각자 진영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각종 잡음이다. 약 한 달여에 걸쳐 공천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갖가지 잡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우선 여당에서는 현 정부 실세 및 측근 인사들이 공천에서 대거 탈락했고, 이에 불복한 인사들의 탈당행렬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제2의 공천학살이자 공천보복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도는 등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 있던 친이-친박계 간의 계파갈등이 재현되는 결과를 낳았다.
민주통합당 역시 공천 잡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지지자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만한 인적쇄신이 이뤄지지 않아 ‘감동 없는 공천’이라는 평가를 받은 데다 경선과열의 부작용으로 호남의 한 지역구에서는 자살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통합진보당과의 선거연대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대승적인 결단을 내리지 못해 한때 통합진보당이 협상결렬을 선언할 만큼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렇듯 여야가 각자의 내부문제로 갈팡질팡하는 동안 공격무기가 모두 무뎌져 버려 위력을 잃게 됐다. 이제 관건은 공천 후폭풍 등 내부문제를 얼마나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수습하느냐에 달린 것으로 보인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염증이 정점에 다다랐으나 ‘새로움’에 목말라 하는 유권자들의 갈증을 풀어줄 신세력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예년과는 달리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전 세대를 아우를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른 상황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유권자들은 기존의 정치인들과 정당에서 다음 4년의 희망을 선택해야 하는 형국이다. 어차피 새로움을 찾아낼 수 없다면, 구태가 적은 쪽으로 표가 몰릴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에 일전을 준비 중인 여야의 방어전이 기대를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