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리학자였던 조부의 남다른 가풍 속 어린 시절 보내
처음엔 인터뷰를 강하게 거절하던 김 대표는 어렵게 설득한 끝에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자 자신의 인생 역정을 하나둘씩 펼쳐보였다. 김 대표의 고향은 한국관광공사가 ‘가볼만한 곳’으로 추천한 곳이자 ‘튤립꽃과 민어’로 유명한 전남 신안군 임자도 장동마을이다. 김년관과 남순자 부모 사이의 다복한 가정에서 3남3녀의 장녀로 태어난 김 대표는 소위 남다른 가풍 속에서 성장했다. 김 대표의 조부인 성헌 김신수 옹(1898~1974)은 조선말 호남 의병대장 기우만 선생의 제자들로부터 위정척사 사상을 사사받고, 임자도 일대 섬마을 유림의 중심인물이 되어 일제강점기 내내 섬마을의 문화항일 운동을 주도한 성리학자였다. 그는 노사 기정진 선생으로부터 연원된 위정척사 사상을 평생토록 받들면서 올곧게 삶을 영위하였던 사실상 마지막 조선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지금도 임자도 일대 섬마을에는 성헌 선생의 제자들이 즐비하며 그의 사상을 기리기 위한 ‘성헌 문인회’가 결성되어 그를 추모하고 있다. 김 대표는 문화항일의 가풍 속에서 조부모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신학문을 일제 침략의 마수로 규정하는 위정척사 사상의 영향을 강렬하게 받은 그녀의 부친은 ‘여자들은 한글만 배우면 그만이다’며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친일로 규정하고 중학교 진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김 대표는 “그때는 공부도 잘하고 집안도 괜찮으면 목포로 나가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저희 큰집은 머슴이 8명이었고, 진외가는 머슴이 7명, 우리 집은 머슴이 둘이고 식모도 있을 정도였으니 나름 밥은 굶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아버지가 목포진학을 허락하지 않았어요”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신학문은 안돼” 도전의 시작이 된 서울로의 가출

그러나 그것은 소녀의 착각이었다. 옷보따리가 없어진 것을 알고 어린 손녀의 가출을 눈치챈 할머니에게 가출이 발각되었고, 아버지는 재빨리 목포항 영해동 파출소에 딸을 붙잡아 달라고 연락을 취한 다음 소녀가 돌아오기를 느긋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녀가 기대에 차 목포항에 내리니 그 곳에는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험악한 경찰 두 명이 가출소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경찰은 거친 큰 손으로 가녀린 소녀를 붙잡아 다시 임자도로 가는 배에 실어 돌려보낸 것이다. 하늘이 노래졌다. 거사가 두 번이나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김 대표는 여기에서 포기하지 않았다. 귀가하던 배 속에서 궁리를 계속하던 김 대표는 연락선이 지도라는 섬에 잠시 기착한 틈을 타 배에서 빠져나와 허리까지 빠지는 섬과 섬 사이의 바다를 치마를 들어올리고 발로 걸어 건너 육지로 탈출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남 무안군 몽탄역에서 서울행 완행 열차에 몸을 싣고 기차 기적소리와 함께 서울로 향한 것이다. 이것이 꿈많은 소녀의 극적인 탈출 성공기이자 김 대표 인생 첫 번째 도전이었다.
편물 일에 미적 감각 발휘, ‘옷 잘 만드는 가게’로 입소문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은 중요한 결단이자 선택이었다. 김 대표는 창신동에서 고모가 하고 있던 편물 일을 배웠다. 그녀는 편물 일을 하며 ‘아름다움’을 배우기 시작한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적삼을 입고 지내던 소녀가 예쁜 스웨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 올 한 올 땀을 뜨며 예쁜 옷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보니 창신동 일대에서 ‘옷 잘 만드는 가게’로 알려지게 되었고 가게는 날로 번창했다. 오늘날 김 대표가 짓는 건축물이 아름다움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유가 그 때 배운 미적 감각이 건축에 반영된 것 같다며 김 대표는 수줍게 웃는다. 이렇게 고모 밑에서 편물 일을 배우며 서울에 안착하는 듯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그토록 서울행을 외쳤던 그녀가 돌연 귀향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그곳에는 그녀의 할머니 서초당 이재월 여사가 손녀를 그리워하며 그녀가 해놓은 나뭇베눌을 손으로 만지며 매일 울고 계셨다. 험한 서울 땅에서 손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을 하느라 건강이 좋지 않게 되었다는 전갈이 올라왔다. 그녀는 할머니 위로를 위해 자신의 꿈을 일시 접고 귀향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김 대표는 귀향기간 중 23세 때 인근 임자도 내 남초등학교에서 근무하던 섬마을 선생님 이경수(李炅洙)씨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결혼 후 조부모가 돌아가시고, 임자면에서 4년을 거주하면서 2남 1녀를 둔 김 대표는 다시 서울로 가자고 결심한다. 서울은 김 대표에게 꿈이자 로망이었다. 남편이 경기도 발령을 신청하였고, 가평군 외서면 상천초등학교 발령이 나 경기도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어 3년 뒤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으로 다시 발령받아 마침내 수도권 진입에 성공하게 되었다.
우연히 건축업 손대 사업가로 수완 발휘‘삼익 브랜드’ 모두 그의 작품

주택을 짓자마자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김 대표에게도 1998년 IMF 구제금융으로 인해 위기가 닥쳐왔다. 당시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이 사업의 또 다른 얼굴을 알게 되었다는 김 대표는 끈질기게 매달려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더욱 알찬 기업으로 가꾸는데 성공하게 된다. 현재는 충주 인천 수원 안산 평택 등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도시형 생활주택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건축분야가 남자들하고 부딪혀야 하니 어려울 것이라고 합니다. 어려운 것이 저는 더욱 좋아요. 저는 뭐든지 1등을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똑같은 건물을 여럿이 짓는 다면 제가 짓는 건물이 제일 튼튼하고, 제일 예쁘게 지어, 가장 먼저 분양되도록 합니다.”
늦깎이 만학도와 여성회장으로서 제3의 인생도전…‘끝없이 도전하자’
김 대표는 일에서도 성공을 거뒀지만, 가정에서도 남편에 대한 내조, 자녀에 대한 교육 등에서도 모범적인 주부였다. 남편은 대학원까지 졸업해 석사학위를 받았고, 모든 교사가 꿈꾸는 교장 직위에 경기도 내에서 가장 젊은 나이로 취임했다. 장남 건무 씨는 삼성전자에 근무하다가 2년 만에 어머니가 하던 건축업에 뛰어들어 지금은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차남 건우 씨는 약사부부로 서울 잠실에서 개업하고 있고, 딸 현진 씨의 남편은 용인 수지에서 치과의원을 개업하고 있다. 가족을 위해 헌신과 봉사만 했던 김 대표는 어느 날 친구와 남편에 대한 대화 도중에 친구가 “가족은 그렇다 치고 지금까지 너는 무얼 했느냐?”는 말에 큰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그 자극으로 그녀는 뒤늦게 늦깎이 공부라는 제3의 도전에 나서게 됐다. 낮엔 건설현장에서, 밤엔 책과 씨름하며 주경야독하기를 2년여 김 대표는 서울 사당동 신동신중·정보산업고등학교 중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지난 2월 9일 61세의 최연장자로서 영예의 졸업장을 받았다. 사업가로서 바쁜 와중에도 만학도로서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김 대표는 ‘학업은 또 하나의 인생도전’이라고 강조한다. “중학교 졸업장을 받은 날,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냈어요. 저는 공부에서도 끝까지 도전할 겁니다. 요즘 건강이 별로 좋지 않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대학교를 목표로 새로운 도전은 계속될 겁니다.” 2시간여의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김 대표에게 인생철학을 소개해 달라고 하자, “지금까지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살았어요. 베풀면 돌아오더군요”라며 수줍게 웃는다. 김 대표는 사업가로서 뿐만 아니라 현재 수도권 500만여 향우회의 구심체인 재경광주·전남여성향우회 회장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며 사회생활에서도 의욕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녀의 인생 도전기에 마침표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