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을 맞은 지도 한 달이 지났다. 그러나 우리네 살림살이에는 흑룡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가계부채를 그대로 안고 새해를 맞이한 서민들에게 있어 하루 하루는 고되고 힘든 날일뿐이다. 여전히 서민들은 가계부채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고 오늘도 대출을 막기 위해 또 대출을 받으러 간다. 지금 대한민국의 서민들에겐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많은 경제전문가가 2012년 한국 경제에서 풀어야 할 우선 과제로 가계부채를 꼽았을 만큼 지금 가계부채는 서민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막대한 가계부채는 결국 대한민국의 경제를 또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지난해 9월 말 기준으로 한국 가계 부채 총액은 892조 4,571억 원을 넘어섰다. 2006년 599조 원에서 2007년 657조 원, 2008년 717조 원, 2009년 779조 원, 2010년 846조 원에 달했다. 지금 추세로라면 2013년 992조 원에 이르러 가계부채 1,000조 원 시대에 처하게 된다. 한국은 가계부채가 GDP의 85.9%(2009년)로 금융 위기 직격탄을 맞은 미국(100.2%)이나 영국(11.0%)보다 낮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CED) 평균(77.0%)과 일본(80.4%)보다 높은 수준이다. 반면 우리나라 저축성향은 2007년 2.6%까지 내려갔다. 세계 최저 수준이다.
보험연구원의 최 원 선임연구원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선진국들은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 부채비율이 낮아지는 추세지만 반면 한국은 2009년 152.9%에서 2010년 155%로 계속 치솟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은 지금 ‘빚 권하는 사회’
TV 여기저기를 틀어도 대출 광고는 연일 끊이지 않는다. ‘빠른 대출’, ‘무담보’, ‘무보증’, ‘클릭 한번에 OK’… 쉽게 현혹시킬만한 문구들을 내세워 너도 나도 대출 받기를 권하고 있다. 대부업에서 무분별하게 시작된 대출광고는 지금 저축은행, 보험사, 카드사, 시중 은행 등까지 동참하며 대출을 받으라고 권한다.
이들이 대출영업을 강화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가장 쉽고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1년 18개 시중은행은 10조 원 규모의 사상 최대 순익을 기록했다. 카드사들도 2011년 상반기에만 4조 957억 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사실 은행권은 예금과 대출의 금리 차를 이용한 예대 마진이 주 수익원이다. 아예 예금 기능이 없는 대부업체나 카드사 역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빚을 권할 수밖에 없다. 2010년 이후 신용카드사들이 경쟁적으로 다시 영업을 재개하고 은행에서 분리되면서 대출경쟁에 나섰다.
보험사 역시 대출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1년 3분기 기준 보험사가 가계와 비영리단체에 지급한 대출금은 3조 6,587억 원이다. 이는 전 분기 3,314억 원보다 무려 10배가 넘게 늘어난 수치다. 보통의 약관대출금리는 최저 연 5%대, 저금리가 지속되면서 자연스럽게 수익률이 높은 가계 대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약관대출은 보험계약자가 가입한 보험의 해약 환급금의 70~80%의 범위에서 대출을 받는 제도로 확실한 담보까지 갖추고 있다.
증권사들의 대출 빈도도 만만찮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2012년 1월4일 기준 증권사들의 신용 거래 융자 규모는 4조 4,975억 원, 증권 담보대출 규모는 6조 7,164억 원에 달한다.
생계형 대출에 빚잔치 하는 서민들
문제는 가계 빚 대부분이 빚을 내 살림을 꾸려가는 이른바 ‘생계형 대출’이라는 점이다. 지난 2009년 상반기만 해도 주택 구입 이외 목적으로 주택담보대출을 한다는 이가 42.1%였는데, 2011년 상반기에는 48.4%로 증가했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1년 상반기까지 늘어난 가계대출 총액 중 소득수준별 구간이 차지한 비중을 보면, 연 소득 3,000만 원 미만 계층의 비중이 37%로 가장 높았고, 연 소득 6,000만 원 이상의 비중은 3%에 그쳤다.
이처럼 ‘생계형 대출’이 늘어난 것은 가계의 주머니 사정이 바닥을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저소득층의 대출이 늘어난 이유는 경기 둔화로 소득이 줄어든 데다 전세 등 임대료를 비롯한 각종 가계지출 부담이 커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가을 금융안정보고서를 통해 “최근 가계 대출은 주택 구입목적 보다 생활형 자금 성격이 증가세를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택 담보대출 중 주택 구입 이외 목적 대출 비중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꾸준히 상승하면서 2011년 상반기 중 48.4%를 기록했다”며 “생활형 자금 성격의 대출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는 가계의 소득 여건이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세가격 상승에 따른 주거비 부담, 높은 물가 오름세 등으로 생계비 지출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보고했다.
김형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도 “소득 감소와 물가 상승이 겹친 결과”라고 말했다.
생계형 대출의 주 수요층은 벼랑 끝에 내몰린 저소득층이다. 현재 저소득 계층의 대출 잔액은 전체 가계 대출의 12%에 불과하지만 2010~2011년 상반기까지 대출 증가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7%에 달했다. 문제는 원금 상환 능력이 부족해 은행 등 제1금융권에서 새로운 대출을 받기 어려운 저소득층은 대물 만기나 거치기간 종료 시점이 다가오면 비은행 금융기관으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이들은 채무 상환 능력이 떨어지는 데다 대출금리도 고소득 계층보다 높아 부실화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2002년만 해도 11.7%였는데, 2011년 2분기에는 21%로 증가했다. 당시 전체 가계대출 826조 원 가운데 173조 원에 달한다. 은행권보다는 상호금융, 새마을금고, 신협 같은 제2금융권이 가계대출의 직격탄을 맞게 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대출금 갚기 위해 대출받는 악순환 이어져
서민들의 가계대출이 더욱 심각한 건 이자만 납부하는 부채상환 능력 취약 대출이 전체 주택담보 대출 잔액의 26.6%를 차지하고 있고, 그 가운데 연 소득 수준이 2,000만 원 미만인 비중도 39%에 달한다는 점이다.
특히 부채상환능력 취약 대출의 만기도래가 2012년 21.2% 몰려 있다는 것이 한국은행의 진단이다. 그러다 보니 대출금을 갚기 위해 또 대출을 받는 악순환을 겪을 수밖에 없다. 제1금융권에서 시작된 부채는 제2금융권, 제3금융권 등으로 이자가 높은 금융권까지 손을 뻗었다. 실제로 2010년에서 2011년 상반기까지 은행 대출은 8.5% 증가한데 비해 제2금융권은 두 배가 넘는 17.9%나 늘어났다. 똑같은 가계 부채규모라고 해도 가계가 짊어질 부담이 커진 것이다. 제2금융권의 평균 대출 금리는 24.4%로 은행 대출금리 9.8%의 평균 2.5배에 이른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서민들, 구제방안 찾아 몰려
최근 들어 신용불량자가 다시 늘고 있다. 잠재적 신용불량자로 볼 수 있는 채무불이행 상담자가 지난해 3분기(7~9월)에 11만 명을 넘어섰다는 집계도 나왔다. 그러다 보니 개인회생 등의 구제방안을 찾아 몰려드는 서민들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 1월18일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개인이 빚에 시달리다 법원에 개인회생을 신청한 건수는 2008년 11월부터 2009년 10월까지 1년간 5만 6,072건에서 그 다음 1년(2009년 11월∼2010년 10월)에 4만 5,624건으로 줄었다. 하지만 최근 1년(2010년 11월∼2011년 10월)에는 5만 9,903건으로 이전 1년간에 비해 31.2%나 급증했다. 개인회생 개시 건수도 같은 기간 4만 5,105건에서 4만 848건으로 줄어든 뒤 최근 1년 동안 4만 6,392건으로 다시 늘기 시작했다.
연체정보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사전채무조정(프리워크아웃)으로도 몰리고 있다. 프리워크아웃은 연체 3개월 이내인 채무자들이 밀린 이자 일부를 탕감 받는 것으로 개인 워크아웃의 전 단계, 개인회생은 개인파산 및 면책의 전 단계 구제방안이다. 신용회복위원회에 따르면 20대 프리워크아웃 신청자는 2009년 1,053건에서 이듬해 1,029건으로 다소 줄었다가 지난해에는 3·4분기까지 1,381건으로 늘었다. 4.4분기까지 합치면 1,500건을 넘어설 것이라는 게 신용회복위원회 측의 설명이다.
신용회복위원회 관계자는 “카드업체와 대부업체 등을 통해 돌려막기 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신청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막대한 가계부채, 결국 대한민국의 경제를 또 위기로
과도한 가계부채는 한국의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 이자를 내는 만큼 생활비가 줄어든 만큼의 소비 여력이 사라진다. 서민들의 소비는 기업경제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또한 정부의 거시경제 조정에 영향을 미친다. 물가가 오르면 기준금리를 올려 화폐 유동성을 억제해야 하는데 가계부채가 많다보니 기준금리를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계대출의 질 악화가 금융시장뿐만 아니라 실물 부문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김형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경기 침체와 일자리 부족으로 저소득층의 소득이 늘어나기 어려운 현재 실물 상황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면 대출 구조 악화에 따른 원리금 부담 증가가 소비 위축과 경기 회복세 둔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될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김병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부원장은 “가계 쪽을 주목해야 한다. 돈을 빌려준 은행에 대한 구제책만 말할 것이 아니다. 은행 구제를 한다면 취약 계층에 대한 구제책도 검토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정부가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정책 지표로 삼아 이 비율을 서서히 낮추는 전략을 취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구제책 검토 필요
경제전문가들은 정책측면에서 가계부채와 부동산 가격의 악순환적 상승관계를 기본적으로 단절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선 가계 부채 대책을 금리 인상, 총량 규제 등 정책 당국 및 금융회사 쪽에서 거시·규제적으로 접근하기보다 가계 쪽에서 높아진 부채를 지탱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전문연구위원은 “인위적 가계 대출 억제에 따른 건전 금융 소비자의 ‘제2금융권으로의 몰이’를 자제하고 가급적 이들을 은행이 흡수하게끔 유도해 금융의 선순환 구조를 유지해야 한다. 동시에 제2금융권 경영 상황 악화에 대비해 이들 기관에 무리한 규모의 수신 집중을 방지하는 정책과 동시에 금융 소비자 보호를 위해 소비자 보호 제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2016년까지 고정금리, 비거치식 분할상환 대출비중을 30%까지 확대하겠다고 공언했으나, 구체적인 수단도 애매하고 실제로 금융회사들이 따라올 것인지 불확실하다.
앞서 정부는 지난해 말 ‘가계부채 억제책’을 내놓았다.
한국은행이 지난 1월17일 ‘2011년 11월중 예금취급기관 가계대출’이라는 자료에서 지난해 11월 가계대출은 3조 6,000억 원이 늘어 앞선 10월의 증가폭인 5조 7,000억 원 보다 2조 1,000억 원이 축소됐다고 밝혔다. 예금은행의 경우 주택담보대출과 기타대출이 모두 줄어들면서 10월의 3조 2,000억 원에서 1조 4,000억 원으로 증가세가 둔화됐고 비은행예금취급기관의 가계대출 역시 2조 5,000억 원에서 2조 1,000억 원으로 줄어들었다.
한은 금융통계팀 차장은 “11월 정부 가계부채 억제책으로 주택담보대출이 주춤해졌다”며 “비은행기관의 경우 대출 기준차로 은행과 증가세에 차이가 있지만 정부시책에 동참하게 되면 둔화세는 더 뚜렷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