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정치적 비수기라 불리는 연말정국에 대형 사건이 터졌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지난 12월19일 정오, 북한 조선중앙TV의 발표 직후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의 매체들이 북한으로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가히 뉴스의 블랙홀이라 불릴 만큼 충격적인 뉴스였다. 이에 휴전선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을 이어오고 있는 우리에게는 더욱 예민하고 중요한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김 위원장의 사망 이후 김정은 후계체제의 본격 가동됨에 따라 지난 60년 간 반복되고 있는 위기와 평화가 또 다시 기로에 선 형국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약사(略史)
대한민국의 헌법은 휴전선 이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영토의 절반을 불법점령하고 있는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통상 우리 사회에서 불리는 이름은 ‘북한’이다.
이른바 민주정부로 불리는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기간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는 암묵적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지만, 현 정부 들어서 남북관계가 경색된 이후에는 다시 적국(敵國)으로 돌아서는 모양새다.
이러한 북한은 표면적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채택하고 있지만, 그 실상은 국제사회의 괴물집단에 가깝다. 21세기의 상식과 가치관으로 이해하기에는 여러 모로 어려움이 있다는 이야기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그 해 9월9일 공산주의 헌법을 채택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김일성이 초대 수상으로 취임했다. 초창기 북한의 정치구조는 남로당계열, 갑산파계열, 소련파계열, 연안파계열 등으로 이루어진 연립내각체제였다.
하지만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 이후 북한은 기형적인 형태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김일성은 당시 정적들이었던 박헌영, 리승엽 등 남로당 간부들을 대거 숙청하고 정치적 기반을 잡아나갔다. 이 과정에서 1956년 8월, 최창익 등 연안파 세력들이 김일성을 지도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시도가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쿠데타의 주동세력이었던 소련파와 연안파는 철저히 숙청됐다. 이 사건은 당시 소련과의 관계악화를 불러오기도 했다. 이어 김일성은 갑산파세력 내의 온건세력을 숙청함으로써 유일지도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북한은 1972년에 이르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공포하게 되는데, 1977년 이를 개정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공식이념을 ‘주체사상’으로 바꾸게 된다.
북한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권력을 국가원수인 주석에게 집중시킨다는 점에 있다. 즉, 내각의 수상을 주석으로 그 명칭을 바꾸고, 주석에 직속된 중앙인민위원회에 행정, 입법, 사법 등 모든 국가권한을 몰아줬던 것이다.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헌법은 수령 유일체제의 법제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북한의 이러한 헌법 개정이 같은 해 대한민국에서 ‘10월 유신’이 단행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는 것이다.
원래 북한의 정치구조 내에서 수령이라는 직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일성은 북한정부를 수립할 당시부터 수령으로 불렸다. 이러한 그의 위상은 점점 신격화되었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제국의 천황제와 흡사했다.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요소를 수령제에 가미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이후 김일성은 북한사회를 일원적으로 편제했다. 수령을 ‘위대한 사상과 탁월한 영도력 그리고 지고의 인격을 지닌 절대적인 존재’로 신격화함으로써 그의 교시는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것으로 선포되었다. 이러한 논리의 집약이 ‘주체사상’이며, 북한이 채택하고 있는 사회주의헌법의 요지라 할 수 있겠다. 이후 ‘주체사상’은 김일성과 그 일가에 의한 유일체제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체계화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러한 일방적이고, 일원적인 지도체제가 그의 아들 김정일, 손자 김정은으로 세습되었다는 점에 있다. 세계에서 사례를 찾기가 힘들다는 ‘3대 세습’이 ‘주체사상’이라는 기형적인 이론을 기반으로 했고, 이로 인해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점점 기형적인 국가로 변모해 왔다.
1980년대에 들어서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후계체제 구축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 중심의 체제로 유훈통치가 강화됐다. 1991년에는 대한민국과 UN에 동시에 가입하는 등 체제의 폐쇄성을 벗고 국제사회에 합류하는 듯 했다.
또한 1992년에는 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의 권한을 축소하는 대신 군사와 관련된 기능과 권한을 국방위원회로 통합했다. 하지만 이는 다름 아닌 김정일 체제가 별다른 파벌 분쟁을 겪지 않고 안정적인 세습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을 뿐이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김정일이 권좌를 계승받았다. 이 과정에서 헌법을 한 번 더 개정해 주석제를 폐지하고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강화했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지도체제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았다. 단지 ‘주석’에서 ‘국방위원장’으로 명칭을 바꾼 것에 불과했다. 이를 테면 스포츠계에서 은퇴한 선수를 존중하기 위해 시행하는 ‘영구결번’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김정일은 지난 12월17일 오전 8시30분경 사망했고, 이틀 뒤인 19일 12시, 북한매체들이 이를 일제히 보도했다. 김일성으로부터 시작된 권력은 아들 김정일에 이어 손자 김정은에게로 넘어갔다. 대북 전문가들은 2007년부터 이미 후계자 준비를 시작했으며 2009년 초반 무렵 후계자로 지명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정확한 과정은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철통보안 속에서 후계구도를 구축했던 탓에 김정은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의 신상에 대한 내용 역시 대부분 추측에 가깝고 심지어 그의 이름이 당초 알려진 ‘김정운’이 아니라 ‘김정은’이라는 사실도 최근에야 밝혀졌을 정도였다.
그러다 지난 2010년 9월28일에 이르러서야 김정은은 북한 관영매체인 조선중앙TV를 통해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이날 북한에서는 44년 만에 노동자 대표자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북한 노동당은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당 중앙위원으로 선임했다.
당 중앙군사위원장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선임됨에 따라 북한군의 지도기관인 당 중앙군사위에서 김정은이 김정일 위원장 바로 아래의 2인자 지위에 올라서게 됐다. 또한 김정은이 인민군 대장 칭호를 받은 데 이어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과 당 중앙위원을 맡게 돼 당과 군의 실권을 장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풀이됐었다.
‘김정은 지도체제’ 연착륙 가능성
김정은은 지난 12월19일 김정일 사망 발표직전 당 중앙군사위원회 명의로 전군에 ‘명령 1호’를 하달했다. 그것은 “전군은 훈련을 중지하고 원대복귀하여 경계근무에 힘쓰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그가 장악하고 있는 중앙군사위가 권력 핵심기구로 떠오르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김정일 생존 당시 국방위원회가 최고권력기구였던 점을 상기하면, 이후 국방위원회가 무명무실해지고, 중앙군사위가 실질적 권력기구로 부상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과거 김정일이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선언한 후 스스로 주석직에 오르지 않았던 것처럼 김정은 역시 김정일에 대한 우상화 차원에서 그를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남겨놓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만 김정일은 유교적 관점에서 3년상을 치른 후 4년 후에 주석제를 폐지했지만, 상대적으로 신세대인 김정은은 1~2년 이내에 헌법을 개정해 국방위원회를 폐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당 중앙군사위의 부상은 작년 9월, 김정은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당 대표자회 때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 없다. 당시 북한은 노동당 규약을 개정해 ‘중앙군사위가 국방사업 전반을 지도’하도록 규정했고, ‘상설 최고군사기관’으로 격상시킨 바 있다.
특히 개정된 당 규약은 김정은이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직만 갖고도 김정일 사망 시 노동당을 장악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당 규약 22조에 따르면 ‘당 총비서는 당 중앙군사위원장으로 된다’는 조항을 넣어 김정일 위원장의 유고 시 김정은이 당 중앙군사위원장 대리를 맡으면 이 조항에 따라 당 총비서 대리가 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완비해 둔 것이다.
앞서 대북전문가들은 김정은이 2012년 1월8일 자신의 생일이나 2월16일 김정일 위원장의 생일 또는 4월15일 김일성 주석의 생일 등을 전후해 정치국 확대회의나 최고인민회의 등을 열어 중앙군사위원장이나 군 최고사령관, 총비서 등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본 바 있다.
한편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북핵’이 새롭게 등장한 김정은 체제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튈 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대 유산이라 할 수 있는 핵을 둘러싼 김정은의 행보는 세계적인 관심거리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외교가의 시나리오는 다양하다. 김정일이 그랬던 것처럼 핵을 보유한 상태에서 외교력을 극대화시키는 벼랑끝 전술을 지속할 것이라는 전망에서, 파격적인 핵 포기 선언이나 핵도발에 대한 우려를 내놓기도 한다.
복수의 대북소식통들에 따르면 이미 김정은은 완전한 핵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정황도 포착되고 있다. 김 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지난 2008년 8월 이후 권력이양이 빠르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핵문제를 가장 먼저 인수인계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북핵이 체제안정과 서방과의 협상력 극대화 등 핵이 북한의 생존과 직결돼 있는 카드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관진 국방부 장관 역시 국회에 출석해 “김정은이 핵 통제권을 보유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김 위원장 사망 발표 직후인 12월21일,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를 재개하고 식량지원과 관련된 접촉을 벌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날 협의는 북한이 먼저 제안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향후 김정은 체제가 진행하게 될 외교의 향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대화였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애도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식량지원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면서 북미대화가 김 위원장 사망 직전과 다름 없이 원활하게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성 김 주한 미대사 역시 “김 위원장 사망발표 직전까지 북미 간 대화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는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이처럼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은 김정은 체제의 조기 안정화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2012년은 북한이 오래 전에 선포한 ‘강성대국 원년의 해’이며, 이는 곧 ‘모든 인민들이 잘 먹고 잘 사는 해’로 선전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성대국이 실질적으로 이뤄지기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최소한 경제 및 식량 분야에 있어서는 가시적인 성과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자립이 어려운 경제 구조 속에서 김정은은 민생을 책임져야 하는데, 이는 외부의 지원이나 원조 없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북한이 쥐고 있는 유일한 카드인 ‘핵’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김정일 체제가 지속해 왔던 것처럼 핵을 지렛대 삼아 지루한 외교전을 펼칠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하지만 강성대국 원년의 해가 코앞에 다가왔다는 점에서 지난 20년 가까이 끌어온 지루한 협상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다음 카드는 파격적인 핵 포기와 함께 개혁개방을 단행하는 카드가 남아 있다. 하지만 이는 단시간 내에 많은 원조를 이끌어냄으로써 이를 통해 북한 민심을 다잡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군부 등 강경파가 이에 불복해 쿠데타 등을 일으킬 수 있는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한편에서는 극단적인 핵 도발의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낮은 수이긴 하나, 과거에도 북한이 핵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이후에도 핵개발을 지속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3차 핵실험을 강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북한이 보유한 핵탄두는 적게는 8개, 많게는 20여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결국 북핵의 향방은 김정은 체제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연착륙하는가에 달린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은 당, 군, 정에 대한 그의 장악력이 떨어지고, 민심이 동요할수록 핵을 도발용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치열한 외교전
김정일의 사망과 김정은 후계구도의 전면화로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전이 치열해지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을 제외하고 직접적인 이해 당사국들인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국제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김정은 체제’를 승인하는 모양새다. 주로 조문외교를 통해 이러한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대한민국 내에서 ‘조문파동’으로 시끌벅적한 사이 이미 미국은 ‘주민에 대한 애도’와 ‘북한의 안정화’를 발표함으로써 사실상 김정은 체제를 인정했고, 일본 역시 다소 간의 잡음이 있었지만 정부 차원의 ‘애도’를 통해 이에 힘을 실었다.
러시아 역시 조전을 통해 일찌감치 김정은 체제를 뒷받침했다.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인 것은 중국이었다. 대규모 조문사절을 북한에 파견함으로써 북한과의 동맹을 더욱 공고히 다졌던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각국이 북한에 미칠 영향력의 지분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으로 풀이된다.
미국은 김 위원장 사망 직전, 식량지원의 대가로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의 잠정중단을 약속하는 실무합의를 했고, 사망발표를 했던 그 주에 베이징에서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북미 간 3차 고위급 회담을 열기로 돼 있었다.
이는 대북문제에 있어서 중국이 주도권을 잡는 상황을 막기 위한 미국의 파격적인 조치로 풀이됐다. 미국 측이 김 위원장 사망 직후 뉴욕에서 회동을 가짐으로써 6자회담의 불씨를 살릴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본격적인 대화는 장례와 체제정비가 완료된 3월 이후로 예상되고 있다.
김정은 체제 하에서는 중국의 영향력이 향상될 것으로 추정된다. 1994년에 있었던 제네바 합의 때도 그랬지만, 2005년 9.19선언과 2008년 영변 냉각탑 폭파 등 6자회담의 성과가 있을 때는 북한과 미국 간의 사전 조율이 6자회담의 의제를 좌우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북미대화 못지않게 중국과의 사전조율도 큰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 중간자 역할을 수행해 왔던 러시아의 역할도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이미 사망 넉 달 전 시베리아를 방문해 러시아와의 ‘전통적 우호관계의 복원’을 선언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각국이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과정은 김 위원장 사망 이후 김정은 체제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흐름을 대변하고 있다. 중국은 후진타오 주석을 비롯해 정치국 상무위원 9명 전원이 조문에 나서 김정은 체제를 강하게 지지하고 나섰다. 이에 앞서 중국은 김 위원장의 사망발표 직후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비롯한 4대 권력기관의 공동조전 형식으로 김정은 체제의 승인을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다.
미국도 이러한 행보에 힘을 보태는 분위기다. 힐러리 클린터 국무장관이 “북한의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전환을 원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한편 백악관 대변인은 김정일의 후계자로 김정은의 이름을 공식 언급하며 사실상 김정은 체제를 인정했다. 러시아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직접 조전을 보내는 형식으로 그의 체제를 지지했다.
김정은이 공식 등장할 당시 3대 세습에 대한 우려와 혐오로 가능했던 국제사회의 반응과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다. 이는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이 김정은 체제가 흔들릴 경우 동북아시아의 큰 혼란이 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냉랭했던 남북관계, 화해무드 조성되나
우리 정부는 김 위원장 사망발표 후 ‘유연한 대북정책 기조’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북한의 반응은 신통치 않은 상황이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 이후 경색된 남북관계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우선 우리 정부는 김 위원장 사망발표 직후 류우익 통일부 장관을 내세워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과 관련해 북한 주민을 위로한다”는 뜻을 신속하게 밝혔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 정부차원의 조의표명을 거부하고 이른바 ‘조문파동’이 일어났던 상황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또한 제한적이긴 하지만 김대중 던 대통령과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유족의 방북을 허용했으며, 민간의 조전발송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내놨다. 이어 휴전선 인접 지역인 김포 애기봉 등 전국 4곳의 전방에 설치한 크리스마스트리 점등도 보류했다. 최대한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줬던 것이다.
나아가 정부는 남북관계 경색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혔던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사건에 대한 책임도 김 위원장으로 한정했다. 새롭게 등장하게 될 김정은 체제와의 대화채널을 열어놓겠다는 정부의 의지로 풀이된다. 최보선 통일부 대변인은 “김 위원장의 사망과 천안함, 연평도에 대한 북한의 책임 있는 조치 등과는 별개의 사안으로 보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북한의 대남선전매체인 ‘우리민쪽끼리’는 민간단체의 조문을 불허한 우리 정부에 대해 ‘패륜적인 행위’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원색적으로 비난했으며 “이번 김 위원장 조문과 관련한 정부의 성의와 조치를 보아 향후 남북관계의 방향을 결정지을 것”이라는 논평도 내놨다.
이명박 대통령은 12월22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대표회담에서 “우a리가 취한 조치들은 기본적으로 북한을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북측에 보이려 하고 있고, 북한도 우리가 이 정도까지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로서는 할 수 있는 조치들을 최대한 했다는 것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수립하고 있는 대북정책의 구체적인 기조변화에 대해 결정된 바는 아직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정부는 ‘비핵개방3000’으로 요약되는 대결위주 대북정책을 추진해오다 지난해 북한이 천안함과 연평도 도발을 일으키는 바람에 남북관계는 지금까지도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남북대화 등 진전된 관계개선을 위해서는 도발행위에 대한 성의 있는 사과표명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는 “천안함과 연평도 도발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김정일 위원장한테 있다고 봐야 한다”며 “김 위원장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정부가 일련의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할 일이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우리 정부가 김 위원장의 사망 이후 한결 부드러워진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만큼 이를 받는 북한 당국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최종적인 반응이 주목되고 있는 상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