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마케팅 수단으로 변질, 부작용도
계속되는 경기 불황 속에서도 “잘 먹고 잘 살자”는 ‘웰빙’ 열풍은 날로 뜨거워지고 있다. 웰빙 여행, 웰빙 가전, 웰빙 식품 등 ‘웰빙’이란 키워드를 단 상품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과도한 마케팅 수단은 본질을 상실한 웰빙문화로 자리잡는 모습을 낳았다.
마케팅을 위한 웰빙 확산
‘물질적 가치나 명예를 얻기 위해 달려가는 삶보다는 신체와 정신이 건강한 삶을 행복의 척도로 삼는 사람들’ 포털 사이트의 백과사전에서 웰빙족(well-being)에 대해 내리는 설명이다. 복지, 안녕, 행복 등을 일컫는 ‘well-being(웰빙)’에서 출발한 단어인 만큼 그 의미 전달에는 큰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웰빙(wellbeing)족이란 말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1980년대 유럽에서 시작된 슬로우 푸드(slow food) 운동, 1990년대 초 느리게 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등장한 슬로비족(slow but better working people), 부르주아의 물질적 풍요와 보헤미안의 정신적 풍요를 동시에 추구하는 보보스(bobos) 정도가 어렴풋이 그 기원으로 언급됐을 뿐, 그 어디에도 정확한 출생 정보는 없다. 그러나 국내에 회자되기 시작한 시점은 2003년 8월 중순. 한 일간지가 ‘웰빙족과 관련 상품이 인기’라는 기사를 내면서부터다.
마케팅을 위한 웰빙 확산
이를 기점으로 다른 매체(거의 모든 매체)서도 연일 경쟁적으로 웰빙을 써 댔고, 기존 소비 시장이 포화된 상태에서 새로운 사업 모델을 찾고 있던 기업들은 이에 착안해 이른바 ‘웰빙 마케팅 전략’을 전투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이에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에 짓눌려 살던 소비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으로 웰빙(문화)이 확산된 것이다. 웰빙 식품ㆍ의류ㆍ건강ㆍ여행 등 각종 상품에 이어 잡지까지 등장하고, 인터넷에도 많은 웰빙 관련 동호회가 생기게 됐다.
웰빙족의 공통적으로 보이는 소비와 생활 행태를 보면 ▲고기 대신 생선과 유기농산물을 즐기고 ▲단전호흡ㆍ요가ㆍ암벽등반 등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운동을 하며 ▲외식보다는 가정에서 만든 슬로푸드를 즐겨 먹고 ▲여행ㆍ등산ㆍ독서 등 취미 생활을 즐기는 것으로 요약된다. 웬만한 유행이 한 철을 넘기지 못하는데 반해 건강과 행복을 최우선으로 삼는 웰빙 바람은 주 5일제 근무 실시와 함께 더욱 순항중이다. 아예 하나의 시대적 코드로 자리매김 한 상태다.
과거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 하던 시절에서 벗어나 삶의 질을 따지며 살아갈 여유가 생겨 잘 먹고 잘 살자는데 반대할 사람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웰빙 도는 웰빙 문화에 대한 비판이 만만치 않은 게 사실. 몸과 마음, 일과 휴식, 가정과 사회, 자신과 공동체 등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상태가 웰빙이라는 기본 취지가 변질 돼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인 행복 추구로 흐르면서 공동체적 삶과 유리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웰빙이 고소득층의 ‘구별짓기’방편이나 사치스런 소비 행태로 변질되는 경우도 있다.
웰빙열풍에 패스트푸드 철퇴
소비자들 사이에 웰빙 열풍이 불면서 패스트푸드 산업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패스트푸드 산업의 쇠퇴는 콜라시장까지 위축시키고 있다.
패스트푸드의 매출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작년부터였다. 모 패스트푸드 업체 관계자는 “패스트푸드산업은 외환위기에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고 급성장을 거듭했고 2002년에 시장규모가 1조4,000억원에 이르면서 절정에 달했다”며 “그러나 웰빙 열풍이 불면서 시장 규모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패스트푸드의 쇠퇴는 소비자들의 인식변화 때문. 주요 고객인 10, 20대 여성들의 다이어트 열풍은 패스트푸드 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줬다.
웰빙 열풍이 불면서 가족단위로 와서 패스트푸드를 즐기던 풍속도 쇠퇴하고 있다. 아이스크림이나 피자산업의 성장세를 보면 패스트푸드의 몰락은 ‘건강추구’라는 말로는 다 설명이 되지 않는다. 젊은층이 패스트푸드점에 대해 갖는 이미지의 변화도 쇠퇴를 촉진시켰다. 패스트푸드점은 몇 년 전까지 학생들에게 첨단, 미국적인 것, 세련됨, 편리함이라는 이미지를 줬으나 요즘에는 진부함, 질이 낮다는 이미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라는 것. 패스트푸드 업계는 호밀 빵, 샐러드 메뉴 강화, 저칼로리 햄버거 등을 내놓고 있지만 하락추세를 막지 못하고 있다. 패스트푸드점을 찾는 고객 자체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패스트푸드업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업계 내부에서 힘을 얻어가고 있다. 고급피자를 내놓아 ‘싸구려’ 이미지를 탈피하고 성장세를 이어가는 피자업체들의 전략을 참고하고 있다.
실버 세대들도 웰빙바람
건강을 지키는데 있어 운동 기구나 의료용 기구, 건강 보조용품도 빠질 수 없는 품목. 특히 건강이나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 고민하는 실버 세대들을 위한 실버 웰빙 바람이 대표적이다. 혈당계와 혈압계는 값이 저렴하면서도 가정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돼 인기다. 전자혈당계는 5초 이내에 채혈과 검사가 완료되며 혈압계도 팔뚝에 감아 스위치만 누르면 맥박과 함께 표시돼 편리하다.
디스크나 허리통증으로 고생하는 노인들을 위한 허리 보조용 의료기구도 최고의 효도 선물로 꼽히는 웰빙 상품. 허리를 받쳐 줘 통증을 줄이고 바른 자세의 유지를 돕는다. 안마기, 발마사지기, 지압기 등도 다양하게 나와있다. 발 마시지기는 기본적인 마시지 기능 외에도 차가운 발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온열 기능을 갖춘 제품도 나왔다. 이 같은 의료용ㆍ건강보조용 기구의 기능이 장착된 첨단 제품도 등장했다.
한국은 개인주의 성향의 웰빙
이런 가운데 한국의 웰빙열풍은 사회적인 복지와는 무관하게 개인적 웰빙을 추구하기 위한 상품 구매에 집중되고 있어 다른 나라와는 큰 차이가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웰빙 문화의 등장과 향후 전망’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웰빙 열풍은 도입 과정에서부터 사회대안운동으로 출발한 서구사회와는 뚜렷이 다르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한국의 경우 2000년대 이후 신문과 방송 등 대중매체의 적극적인 소개로 웰빙 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됐고, 황사와 광우병 등에 대한 공포로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기업 마케팅과 신상품 개발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이에 반해 서구사회에선 사회대안운동 차원에서 채식주의와 생태주의 등의 영향을 받아 1990년대 이후 자연스레 생활 속에 웰빙 현상이 파고들었다는 것. 또 서구사회와 일본에서는 고령자와 여성 장애인 등의 복지와 관련된 사회적인 웰빙도 중요시됐지만 한국의 경우 오로지 개인적인 상품 구매 쪽으로만 웰빙 열풍이 심하게 불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서구의 웰빙 시장은 주로 요가 관련 상품이나 유기농 등 자연식품과 여행상품 등에 국한돼 있지만 한국은 식품과 가전 섬유 건설 등 전 산업 분야에까지 웰빙 열풍이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공기청정기 시장이 빠르게 확대되고 포도주 출고량의 증가와 해산물과 야채로 만든 패스트푸드의 확산 현상도 모두 웰빙 바람에 따른 것이라는 설명이다.
지나친 웰빙 건강 해쳐
그런가 하면 웰빙 열풍 속에 무리한 운동을 하다 병원을 찾는 ‘웰빙 부작용’ 환자들이 늘고 있다. 자신의 몸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운동을 하거나 갑자기 생활패턴을 바꾸면서 오히려 병을 얻고 있는 것이다.
한 달에 3,000여 명의 환자를 진료하는 강남 J정형외과의 경우 평균 1,200여 명가량의 환자가 운동에 따른 부작용을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한 정형외과 전문의는 “러닝머신을 하다 연골이 손상되거나 등산을 즐기다 인대가 늘어나는 경우도 빈번하다”며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환자도 덩달아 급증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는 최근 들어 요가 학원이나 헬스클럽 등 웰빙 관련 시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전문지식을 갖추지 못한 강사들의 수준 낮은 강습으로 피해를 보는 사례가 잦아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요가 시설은 자유업이라 ‘체육시설 설치 이용에 관한 법률’에 의한 규제를 받지 않고 있어 사업자 등록만 하면 누구나 강습소를 차릴 수 있다. 한국요가협회, 대한요가협회 등 국내 주요 요가 협회에 등록된 지부는 전국적으로 300여 곳. 지난해 초보다 100곳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여기에 사설 요가강습소나 체육센터 등의 요가 강좌 등을 합치면 전국적으로 요가를 가르치는 곳이 수천 곳에 달한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대한요가협회 관계자는 “체조 등을 가르치던 학원들이 요가 학원으로 업태를 바꾸거나 3개월 정도의 교육을 받고 수강생에게 요가를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며 “사람마다 신체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요가를 배우기 앞서 전문가로부터 정확한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웰빙 식이요법이나 반신욕에 따른 부작용도 많다. 회사원 이모(29.여)씨는 날마다 한 시간가량 반신욕을 즐기다 부스럼이 생겨 피부과를 찾았다. 김씨의 병명은 ‘주부습진’. 건성피부인 사람이 무리하게 반신욕을 즐기면 피부질환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엄격하게 식단을 조절하다 빈혈에 걸리거나 극단적인 채식을 하다 단백질 부족으로 건강이 악화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병원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웰빙의 대안 ‘로하스 족’
웰빙 바람이 이기적인 라이프 스타일로 굳어지고 있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와 환경까지 생각한 ‘로하스(LOHAS)족’이 출현하게 됐다. ‘로하스’는 미국의 내추럴마케팅연구소가 2000년에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건강과 지속 성장성을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Lifestyle of Health and Sustainability)’의 약자. 즉, 친환경적이고 합리적인 소비 패턴, 또는 이를 지향하는 사람들까지 포함된다.
건강과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웰빙족과 로하스족은 겉보기에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가령 자기 집의 실내 공기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웰빙족이 공기 청정기를 구입한다면, 로하스족은 재생 가능한 원료를 사용했는지 또는 환경 파괴 성분을 배출하지 않는지 등의 여부를 고려해 제품을 구입한다. 즉, ‘사회적 웰빙’의 원칙에서 소비하는 생활 패턴을 보이는 것이 이들의 특징이다.
일회용품 줄이기, 장바구니 사용하기, 천기저귀나 대안생리대 쓰기, 프린트 카트리지 재활용 캠페인 등이 ‘로하스’의 대표적인 활동이다 한 대학교수는 “웰빙도 좋지만, 끝모르고 개인주의로 치닫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며 우리 사회 웰빙족들의 소비 행태에 일침을 가했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적어도 절대 빈곤으로 굶주리거나, 영양 실조로 고통 받는 사람은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