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 박정희 등 포함, 긍정적 평가속 비난 잇달아
경술국치일인 지난 8월 29일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1차로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 3,090명의 명단을 발표해 큰 파문이 일었다. 편찬위는 내년 8월경 2차 친일인사 명단을 발표한 뒤 오는 2007년 친일인명사전을 내놓을 예정이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발표에 대해 시민단체와 학계 등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정치적인 의도가 담겨 있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광복 이후 처음 나오는 ‘친일인명사전’에 올릴 예정인 3,090명의 명단이 공개됐다. 이 명단에는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뒤 광복뒤에도 각계 요직을 차지하는 등 한국 사회의 지배층으로 활동한 인사들이 대거 포함됐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편찬위)와 민족문제연구소는 8월 29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친일인명사전에 실을 1차 예정자 명단 3,090명을 ▲매국 ▲중추원 ▲일본제국의회 의원 ▲관료 ▲경찰 ▲군장교(위관급 이상) ▲판·검사 ▲친일단체 간부 ▲종교 ▲문화예술 ▲교육학술 ▲언론출판 ▲전쟁협력 등 열세 분야로 나눠 공개했다. 이 명단에는 일본 괴뢰정부인 만주국군 중위를 지낸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정일권·김정렬 전 국무총리, 대법원장 3명, 장관 20명, 검찰총장 4명, 육참총장 7명, 대법관 10명, 시도지사 10명 등 광복 이후 정부 요직을 거친 인물들이 상당수 포함됐다.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일본군 장교로 활동한 김정렬 전 국무총리는 광복 뒤 초대 공군참모총장에 국방부 장관을 지냈으며, 일제 때 같은 경력의 정일권 전 국무총리는 육군참모총장과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장관들은 주로 일제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해 관료로 일하다 광복 뒤 요직에 기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법조계도 일제시대 검·판사를 지낸 인물들이 요직을 두루 거쳤다. 경성지법 판사를 지낸 뒤 박정희 정권에서 검찰총장과 대법관 등을 지낸 민복기 전 대법원장은 아버지 민병석 전 중추원 부의장과 나란히 이름이 올랐다. 일제시대 군장교를 지낸 인물 가운데 신태영·유재홍 전 국방부 장관, 이응준·채병덕·이종찬·백선엽·이형근 전 육군참모총장 등 군 고위간부들도 명단에 포함됐다. 민간에서는 방응모 조선일보사 전 사주, 김성수 동아일보사 전 사주, 홍진기 중앙일보사 전 회장 등 언론계 주요 인사들이 명단에 올랐다. 교육계에는 고광만 전 문교부 장관과 김활란 전 이화여대 총장이 광복 뒤에도 교육계에서 활약했다. 예술가 가운데 이순신상과 안중근상 등을 조각해 널리 알려진 조각가 김경승씨와 현제명 전 서울대 음악학부장도 광복 이후 예술계에서 이름을 떨쳤다.
서중석 편찬위 지도위원(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은 “미국이 한국을 손쉽게 장악하기 위해 일제 통치기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제에 충성을 바친 친일파들을 사회 각 분야 요직에 배치했고, 정치적 기반이 약한 이승만 정권도 친일파들을 그대로 중용했다”며 “친일 세력들은 박정희 정권에서도 요직에 기용돼 한국 사회 곳곳에서 지배세력으로 군림해 왔다”고 설명했다.
윤경로 편찬위원장은 이날 기조발표에서 “<친일인명사전>은 어떤 개인을 단죄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 사실에 대한 정리와 역사적 평가를 통해 사회의 가치 기준을 바로 세우고, 후대에 역사의 교훈을 남기는 데 목적이 있다”며 “일시적인 충격이 있더라도 과거에 명백히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들은 반드시 기록되고 평가·기억되어야 마땅하다”고 사전 편찬의 의의를 설명했다. 편찬위 쪽은 친일행위자 선정기준에 대해서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협력한 자, 일제의 식민통치기구에 참여한 자, 항일운동을 방해한 자, 일제의 황민화 정책과 침략전쟁에 협력한 자를 중심으로 했다고 밝혔다. 편찬위는 2001년 12월 사학계를 비롯해 각계 인사들로 지도위원과 편찬위원 100여 명을 구성해 출범한 뒤, 3년 9개월에 걸쳐 친일인사 선정작업을 벌여 이날 1차 수록 예정자 명단을 발표했고, 내년 하반기에 2차 수록 예정자를 발표할 예정이다.
후손-시민단체의 반응
거명된 당사자의 후손들은 대체로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선친 박정희 전 대통령이 포함된 것과 관련, “(명단을 발표한 사람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 아닌가. 거기에 대해 특별히 할 말은 없다. 국민과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사람들도 언젠가는 자신들이 저지른 왜곡에 대해서도 평가받을 날이 있지 않겠느냐”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한국화가 월전 장우성(1912~2005) 화백의 아들 학구(65)씨는 “부친의 친일행적 근거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며 억울한 심정을 피력했다. 월전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인 그는 “일제시대 화가로 입문하기 위해 상을 받고 활동을 했을 뿐인데 그것마저 친일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우리 집안은 물론 아버지도 창씨개명을 한 적조차 없다”고 말했다. 명단에 설립자(김성수)나 초대 총장(김활란) 등이 포함된 고대와 이대는 이번 발표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시민단체와 학계 등은 '늦었지만 잘한 일'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는 부정적 시각이 엇갈렸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윤순철 정책실장은 "해방 이후 60년이 흘렀음에도 사실 규명 자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며 환영했다. 흥사단 조직부 오평석 간사도 “합리적”이라고 평가하고 “당시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직접적 피해를 주었던 이들이 빠진 것은 앞으로 짚어나가야 할 과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자유시민연대 반핵반김국민협의회 김구부 사무총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군 중위 시절 얼마나 친일행위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후 대통령이 된 뒤에 성취한 경제발전의 공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비판했다.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홍진표 정책실장도 “공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로 분류한 것은 기계적인 접근”이라며 “이들이 어떤 친일 활동을 했는지 명확히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일괄적으로 친일 인사로 규정한 것은 지나치다”고 주장했다.
친일명단발표는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어두웠던 역사의 청산’이라는 총론에 있어서는 큰 이론이 없으나 선정기준이나 선정절차라는 각론에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을 안고 있다. 지난 29일 친일명단 발표는 해방후 좌절된 반민특위의 정신과 민주화 이후 관심이 높아진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방이후 권력을 잡은 친일파와 이어 권력을 계승한 독재 세력에 의해 공정하게 기록되지 못한 과거사를 바로잡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편찬위는 이번 친일명단선정을 ‘역사청산’보다는 ‘역사 화해’에 무게를 두었다.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에 바탕한 엄정한 반성을 통해서 과거잘못을 되풀이하지 말 자라는 것이 편찬위에서 밝힌 취지다.
윤경로 편찬위원장은 “누가 누구를 처벌하기 위한 정치적 입장 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며 “부끄러운 역사이지만 솔직히 밝히고 역사의 엄중성을 후손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한 고백성사 ”라고 설명한 것도 응징보다는 화해를 강조한 것이다. 편찬위는 또 지난 2003년 국회의 예산삭감으로 친일인명편찬사업 이 위기에 몰렸다는 보도가 나가자 네티즌들이 자발적으로 7억5,000만 원의 성금을 전달, 친일사전의 꺼져가는 불씨를 살렸다는데 남다른 의미를 찾고 있다.
선정기준에 대한 논란도 만만치 않다. 소위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명단에 오른 가운데 신기남, 김희선 의원 등 여당의원들의 부친은 명단에서 제외됐다. 편찬위는 “신기남 의원의 경우 부친이 오장(하사관급), 김희선 의원은 순사였기 때문에 이번 선정대상에 아예 포함되지 않았다”고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별과정에서 정치적 편견이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되고 있다. 또 일부 황실인사들이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것을 이유로 친일명단에 올랐으나, 일본황실과 결혼하고 일본군 장교 경력이 있는 영친왕은 신분상 특수한 지위를 감안, 친일명단에서 제외돼 형편성 논란이 일었다.
각 분야 선정기준에서 직급(판사·검사·위관·군수·고등관)으로 판단한 것도 지나치게 자의적일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직무에 따라 업무 성격이 다른데도 직급만으로 친일여부를 가린 다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다. 문화예술계에 대한 잣대의 경우 음악, 그림, 소설 등 각 부문별 기준이 달라 형평성에 맞지 않으며 이름을 도용하거나 누군가가 대리로 작성하였을 경우에도 본인이 아닌 이상 직접 해명하기 힘들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편찬위원들의 구성과 이들의 의견수렴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일각의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다 선정과정에서 일부 지도위원이나 편찬위원들이 사퇴한 것도 논란의 불씨를 남겨두고 있다. 또 편찬위가 국사편찬위원회로부터 지원금(8억원)을 받을 것을 두고 “국책사업이 아니냐”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은 “일부 위원들의 사퇴는 개인적인 사정일 뿐 특정인사를 배제한 것은 아니다”며 “이번 명단발표는 순수민간단체의 학술적 행위로 편찬위원회 지 원금은 모든 학술단체가 프로젝트를 통해 지원받는 방식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없다”고 밝혔다.
친일 인사기준 선정 불합리 논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3,090명의 친일 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가운데 해방 후 여러 분야에서 우리 사회의 지도자급으로 활동했거나 항일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인물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 충격과 파문을 안겨줬다다. 광복 60년이라 는 새로운 시작점에서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해 짚을 것은 짚고, 미진한 것은 정리하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취지의 친일사전 편찬은 나름대로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이번에 적용된 기준은 일제의 국권 침탈 협력자, 일제 식민 통치 기구 참여자, 항일운동을 방해한 자, 일제 황민화정책·침략전쟁 협력자 등으로 되어 있고, 이를 13개 분야에 걸쳐 일정한 직급 이상자에 적용하여 대상자를 선정하고 있다. 즉, 관료는 군수 이 상으로, 경찰과 헌병 등은 하사관까지, 군인은 직업장교 이상으로 범위를 정했다.
특히 이번에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인물이 위암 장지연(韋庵 張志淵)이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날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오늘 목놓아 통곡한다)’ 이라는 논설을 써서 일제의 만행에 온 몸을 던져 규탄했고, 1910년 경술국치일에는 진주 ‘경남일보’에 매천 황현의 ‘절명시’를 실었다가 신문이 강제 폐간 당하는 시련을 겪었다.
‘시일야방성대곡’이 없는 당시의 언론은 죽은 언론이나 다름없다. 이 때문에 우리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2004년 국가보훈처는 ‘11월의 운동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그 는 지금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항일 언론가로 소개되고 있지만 이번 친일명단 발표에 포함되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역사학계 전문가들도 대체로 "친일인사 규명은 필요하지만 신중한 검증도 중요하다"며 "개인에게 역사적 책임을 묻는 건 때로 너무 가혹할 수 있다"고 신중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60년만의 작업 ‘친일명단’ 해결법은
광복 60주년이 되는 2005년은 안팎으로 한국 근현대사와 관련된 문제가 계속 터지는 등 시끄러운 한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한일협정 문서 공개에 이어 이번 민족문제연구소에서 13개 분야 3,090명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상자’ 명단 발표 역시 마찬가지. 비록 예상자이기는 하지만 기존 발표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은 숫자다. 1949년의 반민특위 때도 559명이 특별 검찰에 송치되어 221명만이 기소됐고, 2002년 광복회와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에서도 708명만을 친일파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친일은 과거행위였지만 친일 문제는 현실 문제로 적용된다. 현재의 시점에서 친일 문제를 발표하는 것 자체가 정치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친일진상규명 작업은 객관성을 유지하기 힘든 역사행위이다. 객관성 유지는 개개인의 구체적인 행적을 상세히 규명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새로운 문헌자료를 발굴하고 광범위한 증언을 청취할 필요가 있다. 또 친일반민족행위를 역사적 분석 작업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주요분야 친일인사 행적 정리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사 명단에는 ‘을사오적’ 이완용 등 친일행위가 명백한 대표적 친일파 외에도 일반인이 잘 알지 못하는 인사들이 대거 포함됐다. 특히 이들 중 상당수가 해방후 국무총리와 장관 등 국가 요직을 지낸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문화·예술계 인사 중에는 시와 소설 등 문학과 미술작품이 중·고교 교과서에 실린 작가들도 다수 포함돼 있어 향후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작위(爵者) 수여자와 관료=‘을사오적’으로 한·일합방에 협조한 공로로 ‘훈1등 백작’이 된 이완용과 일진회 조직후 후작에 오른 송병준이 포함됐다.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하고 고종 퇴위를 강요한 조중응도 명단에 올랐다.
관료로는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합격후 화순군수, 해방후 국방·내무부장관을 지낸 현석호, 고등문관 사법과 출신으로 진도군수, 해방후 내무·통일원장관을 맡은 김영선, 조선총독부 식산국 사무관을 지내고 해방후 농림부장관에 오른 임문환도 친일명단에 들어갔다.
또 고등문관 행정과, 해방후 농림부장관에 오른 이해익, 광주군수 출신으로 해방후 건설부장관을 맡은 전예용도 포함됐다.
▲군장교 및 판·검사=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해방후 국방부장관을 지낸 신태영, 일제 때 전투기 비행중장, 해방후에는 초대 공군참모총장과 국무총리에 오른 김정렬도 포함됐다.
만주군 헌병대위 출신으로 해방후 합참의장,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해방후 교통부장관을 맡은 백선엽도 이번 명단에 올랐다. 판·검사 분야에는 해방후 대법원 판사 등을 지낸 민복기가 해방전 경성지법 판사를 지낸 사실로 명단에 포함됐다.
또 전주지법 판사, 해방후 법무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맡은 홍진기도 친일인사로 분류됐다.
▲종교와 문화·예술계 인사=종교계에서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참사를 맡은 박희도가 포함됐다.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한 정인과, 불교계 ‘이완용’으로 불리는 이회광, 40년 국민총력연맹 참사를 지낸 권상로도 친일 종교인으로 분류됐다.
문학계에서는 22년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이광수, 전쟁독려시 ‘권군취천명’을 쓴 김동환, 42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간사를 맡은 모윤숙이 포함됐다. 또 43년 조선문인보국회 시부회장을 맡은 주요한도 명단에 들었다. 음악·미술계 인사로는 37년 조선문예회 회원을 맡은 전력의 현제명과 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을 지낸 홍난파가 포함됐다.
또 43년 ‘조선지원병 실시 기념음반’에 수록된 ‘아들의 혈서’ 등을 작곡한 박시춘도 친일작곡가에 분류됐다. 미술계에서는 40년 ‘선전’ 추천작가로 활동한 김기창이 명단에 올랐다.
친일단체 현대극장 대표를 지낸 유치진과 ‘군용열차’ ‘지원병’ 등에서 주연을 맡은 문예봉이 공연예술계 친일인사에 포함됐다. 이밖에 41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을 지낸 김활란 등도 이번 명단에 포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