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생사의 기로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온 떳떳한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이런 사실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삽시다” 지난 10월31일 서울 남산 자유센터 잔디광장에는 전국 각지에 사는 탈북자 400여 명이 모였다. 한국자유총연맹이 주최한 ‘자유의 함성아! 북녘 땅에도 울려 퍼져라’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이날 북한 요덕수용소 출신인 김영순 씨는 그동안 그녀 뿐 아니라 많은 탈북자들이 증언해 온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인권유린 실태를 언급하며, “북한의 3대 세습 독재 때문에 주민들이 정치범으로 속절없이 죽어간다”고 언성을 높였다. 또한 “헐벗은 북한 주민, 굶주림과 고된 노동에 죽어가는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전하고 외면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올해 들어 북한 주민이 남한으로 탈북했다는 보도가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다. 선진통일연합과 북한민주화위원회가 지난 14일 기자회견에서 북한 주민 14명, 북한이탈주민 524명을 대상으로 한 대면인터뷰 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과 북한주민 78.5%가 즉, 10명 중 8명은 탈북 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식량문제(50.0%)와 더 나은 삶 추구(28.6%)가 주된 이유였다. 이 결과에서도 유추 가능하듯 최근 더욱더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주민들은 지긋지긋한 가난과 배고픔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며, 공산주의로 무참하게 짓밟혀 있는 자유를 얻고 싶어 한다.
현재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수는 2만 3,000여 명을 넘어선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로 그 수가 상당하다. 또한 이러한 탈북자들에게서 속속 터져 나오는 정치범수용소의 실태나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이야기는 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이다.
먹을 것이 없어 쥐를 잡아먹거나 떨어지고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 먹고, 사람이 먹을 수 있나 싶은 것들을 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너무 배가 고픈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인육을 먹는 경우도 있다고. 그나마 제공되는 음식은 소금으로 약간의 간을 한 나물과 소량의 밥 뿐이며, 이조차도 부족해 하루에도 수 십 명이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 또한 먹은 것이 없는 상황에서 무자비하게 가해지는 노동의 양, 그 양을 하지 못하면 주어지는 고문과 매질들은 이들을 더욱 죽음의 문턱으로 내밀고 있다.
이러한 증언들이 탈북자들에 의해 밝혀지며 정치범 수용소에서의 인권유린 문제가 국내를 넘어 국제 사회 전반에 중대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탈북 여인이 털어놓는 北보위부원의 만행
지난 11월1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사단법인 북한인권시민연합 주최로 열린 외신 기자회견 ‘재중 탈북난민 문제 해결방안을 위한 국제사회의 역할’에서 탈북자 이명숙(가명) 씨가 탈북 했다가 강제 북송됐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2006년 4월 대못으로 수용소 벽을 뚫어 탈출을 시도했으나 다시 잡혀 들어갔으며, 중국과 태국을 거쳐 마침내 2008년 12월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겪었던 생활을 바탕으로 북한에서의 삶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2005년 11월29일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인 평안남도 개천 관리소에서 수감 중이던 이 씨는 당시 임신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을 하러 나갔고 천천히 걷는다는 이유로 보위부원에게 엉덩이를 맞고 넘어져 양수가 터지게 되었다. 간부들은 관리소 밖 병원으로 이 씨를 데리고 가면서 ‘오늘 안 낳으면 죽인다’며 협박했다. 산통 끝에 자정 직전 아이를 출산한 이 씨.
“언니가 ‘딸이다’라면서 이빨로 탯줄을 잘랐다. 이 때 국가안전보위부 사람이 와서 아이를 엎어놓더니, 애를 죽일지 살릴지 물었다. 못 죽인다고 하자 구둣발이 날아왔고 어금니가 깨졌다. 애는 몇 시간 울었고, 엎어진 채 울고 또 울던 아이는 결국 숨을 제대로 못 쉬어 죽었다. 다음날 나는 오전 5시에 다시 일을 나가야 했으며, 피가 계속 흘러서 양말로 막고 주변 사람들이 몰래 담요를 잘라서 주기도 했다.”
이러한 그녀의 증언에 당시 취재를 갔던 기자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취재장의 분위기도 숙연해졌다.
여군으로 북한군 중대장까지 지냈다는 이 씨는 1996년 12월 군 생활을 정리하고 장사를 시작했으며, 같이 장사하던 사람이 중국에 가면 부자가 된다고 해서 2003년 12월 탈북을 시도했다. 그녀는 “8,000위안(약 140만 원)에 40대 중반의 조선족 장애인에게 팔려갔지만 중국에서의 삶도 지옥”이었다고 울분했다. 남편의 폭행에 시달리고 고된 일을 했기 때문이다. 버티기 힘들었던 이 씨는 심양으로 건너갔고 “그 곳에서 다행히 좋은 남자를 만나서 생활이 훨씬 나아졌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2005년 8월 밀고 신고를 받은 중국 공안이 집에 들이닥쳤고, 당시 임신 7개월이었던 이 씨는 지역 공안국 구치장을 거쳐 중국군대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군인들은 앉았다 일어나기를 시키면서 임산부인 이 씨에게 구타를 서슴치 않았고, 잡혀온 사람들 중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데리고 나가 놀기도 했다. 3일간 조사를 마치고 북한 자강도 만포 보위부로 호송됐던 이 씨의 생활은 보위부에서도 참혹하긴 마찬가지였다.
이 씨는 “보위부에선 옷부터 벗겼다. 식당 아줌마에게 돈이 있는지 자궁을 검사하라고 시켜서 아줌마는 장갑도 없이 씻지 않은 손을 그곳에 집어넣었다”며 “이러한 자궁 검사와 치욕스러움은 임산부도, 세 살이 안 된 여자 아이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울먹였다. 또한 그녀는 오전과 오후, 하루 두 번의 조사를 받을 때는 수도 없는 구타를 당해내야 했고, 조사가 끝나면 배추심기나 밭일 같은 노동에도 시달렸다고 호소했다.
그러한 반복된 생활을 하던 이 씨는 재판도 없이 6년 형을 선고 받고 개천관리소로 수감되어 갔으며 개천관리소 역시 요덕수용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1반에 18~20명씩 19개 반이 있었는데, 19반에는 병에 걸린 사람들만 있었다. 죽으면 창고에 눕혀 놓았다가, 시체가 모이면 들것에 실어 아무 데나 묻었다. 창고에서는 쥐가 사람을 다 뜯어 먹는다. 못 먹어 죽고, 맞아서 죽고, 거의 매일 수 십 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정치범수용소 규모 커지고 탈북자 대응 강경해져
북한의 인권유린 실태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는 가운데, 각종 뉴스에서는 정치범 수용소의 크기와 실태에 대한 보도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지난 11월13일 KBS 1TV <취재파일 4321>는 탈북자 총살 증거 장면을 최초로 취재해 보도했으며, 기획특집 탈북실태보고 ‘살아서 건너라’를 방송했다. 이 방송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고 있는 3대 세습체제 이후에 더욱 강경해진 북한의 탈북자 대응방식, 긴장감 도는 북-중 국경지대와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중국 내 탈북 난민, 강제 북송된 탈북자들이 수감되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위성사진 등을 통해 북한 인권문제를 다뤄 보도했다.
특히 북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사람과 그 외 반동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수감하고 관리하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한 이 방송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규모가 최근 수년 사이에 더욱 확장, 강화된 점을 2003년과 2008년의 위성사진을 비교하며 보도했다. 현재 북한의 관리소는 6곳으로 정치범과 그의 손자까지 일가족 3대가 재판 없이 수감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이 방송은 “요덕 관리소의 경우 보위부원 사택 주변으로 5년 사이 수십 채의 건물이 늘었고, 석회석 광산 주변에도 새 건물이 발견됐다”며, 이 같은 점으로 보아 “수용된 정치범의 수가 그만큼 늘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전했다. 또한 “북창 관리소에도 수감자 처벌 장소 아래로 5년 전에 없던 경비대원 사택이 들어서 수감자가 늘었음을 알게 한다”고도 예측했다.
이 프로그램의 관계자는 “지난달 말 북한 양강도 혜산 너머 중국의 압록강변에서 벌어진 탈북자 총살 현장을 최초로 촬영했다”며 이를 공개했고, “올해 들어서만도 여러 차례 총살이 있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도 확보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중국에서 비밀리에 운영되는 탈북 난민 은신처를 비롯해 인신매매, 강제송환 후 재 탈북, 영양실조, 가족과의 생이별 등 극단의 생존 상황에 내몰린 탈북자의 기막힌 사연들도 집중 보도됐다.
압록강 둔치에서 쓰러져 있는 한 남성을 다른 두 남성이 살펴보는 사진을 공개한 이 방송은 “북한 주민인데, 대낮에 밀수범인지 내막은 전혀 모르고… 중국 땅을 밟으니까 총으로 쏴버린 것”이라는 목격자의 증언도 담았다. 이는 국경을 넘는 것이 적발되면 그대로 현장에서 사살해 버리는 북한의 달라진 국경경비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탈북자 총살 장면이 실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현지 동포들과 탈북자들은 “몇 달 전부터 총살이 있었다”고 증언했으며, “실제 중국에 은신중인 탈북자들은 이에 강제북송을 염려해 붙잡히면 죽겠다는 각오로 수류탄을 들고 다니기도 한다”고 전했다.
이 방송은 “또 다시 찾아온 국경의 겨울, 오늘도 삶의 한계상황을 견디지 못한 동포들이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고 있고, 그들의 또 다른 비참한 삶도 함께 시작되고 있다”며 마무리 했다.
북한주민인권을 위한 국제의원연맹 회의 개최
국내에서 정치범수용소의 실태에 대한 탈북자들의 증언과 더불어 이들의 생활을 담은 사진전이나 영화가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가운데, 북한정치범수용소의 실태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인권유린의 문제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는 국내를 넘어 국제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으며 본격적인 대책마련의 시급성을 시사했다.
이러한 가운데 현지시각으로 11월14일 미국 워싱턴에서 있는 의사당에서 ‘북한정치범수용소 및 납북자 문제, 북한인권 개선의 새로운 과제’를 주제로 ‘북한 자유이주민 인권을 위한 국제의원연맹(IPCNKR)’의 제 8차 회의가 열렸다. 국제의원연맹은 전 세계 61개국 국회의원 200여 명이 탈북자 인권문제 해결을 도모하기 위해 2003년 결성한 단체이다.
이날 한국에서는 자유선진당 박선영 정책위의장을 비롯하여 홍일표, 차명진, 이은재, 신지호 의원이 참석했으며, 이 자리에서 박 의원은 “북한인권문제는 한반도의 문제가 아니라, 전 인류의 문제”라고 전제하고, “나치의 잔악무도한 집단학살 이후 최대의 인권침해가 벌어지고 있는 곳이 바로 북한”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탈북자를 사살하고 탈북자들을 강제 송환해 공개처형하는 북한을 국제사회에 고발하고, 국군포로와 전시·전후 납북자는 물론 신숙자씨 모녀와 일본여성 메구미상을 구출하기 위해서도 국제연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이 날 미국을 포함해 8개 나라에서 온 16명의 주요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했으며, 이들은 북한의 인권 개선 방안에 대한 논의를 활발히 전개했다.
“인간 아닌 죄수로 태어났다”
이날 유엔총회에는 정치범수용소에서 태어났다는 신동혁 씨가 증인으로 나섰다.
“세상에는 간수와 죄수밖에 없는 줄 알았습니다. 일 잘하는 죄수들에게 주어지는 ‘표창 결혼’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제도를 통해 아이들이 수용소에서 태어납니다. 저도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신동혁 씨는 1982년 북한 정치범 수용소 제 14호 개천 관리소에서 태어났다. 신 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1965년 개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의 부모는 간수들의 말을 잘 듣고 일을 잘한 대가로 ‘표창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수용소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 속에서 자신과 형이 태어났다고 증언했다.
또한 태어나서 그가 처음으로 받은 교육은 간수로부터 ‘나는 인간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인간이 아니라 죄수들이다. 네 부모는 원래 죽어야 했지만 살아남았다. 살아 있는 데 대해 감사하며 노동으로 보답하라’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표창 결혼으로 태어난 아이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바로 죄수로 등록된다는 말이다. 간수들은 아이들에게 국어와 수학, 관리소의 법, 노동 방법만 가르쳐줬기 때문에 관리소안의 아이들은 인권이라는 단어를 모르고 자란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수용소에서 일 년에 두 번씩 공개처형을 해 항상 공포심을 조성하고 있으며, 눈을 뜨면 매 맞는 것으로 시작해 눈 감을 때까지 항상 긴장해야 하는 것이 북한정치범수용소의 현실이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 씨는 매 맞고 총 맞아 죽는 것을 보면서 이게 우리의 운명이구나 생각했고 다른 생각을 할 수조차 없었다고 털어놨다. 총을 들고 서 있는 간수는 일을 시키는 사람이고 죄수복을 입고 있는 자신은 늙어 죽을 때까지 죽도록 일을 해야 하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2005년 탈북할 때까지 수용소에서 매를 맞고, 거꾸로 매달려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 불고문도 당했다는 그는 현재 자신의 몸에 있는 수많은 상처들이 북한 수용소 실태에 대한 생생한 증거라고 제시하기도 했다.
신 씨는 1996년 수용소를 탈출하다가 붙잡혀 공개처형을 당한 어머니와 형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버지와 함께 총살 현장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더욱 큰 고통이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 그는 너무 배가 고파서 탈출을 결심했다며 2005년 1월2일 수용소 탈출에 성공해 중국으로 도망갔다고 증언했다. 신 씨는 탈북 후 어렵게 한국에 정착해서 새터민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현재는 미국에 머물면서 북한 인권 상황을 고발하고 있다.
UN총회 ‘북한인권결의안’ 채택
유엔 총회는 지난 2005년부터 7년 연속 북한의 인권상황을 우려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있다. (현지시간)11월17일, 18일 양일 간 뉴욕에서는 제 66차 유엔총회가 열렸다. 그리고 이 총회의 제 3위원회에서는 ‘북한인권결의안’을 표결했다. 특히 이번 결의안은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북한 정치범 수용소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 인권결의안은 위원회를 통과하면 본회의를 걸쳐 최종 채택되게 된다.
이 날 표결된 결의안은 북한 내에 많은 숫자의 정치범 수용소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강제노동이 자행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제 3국에서 송환되거나 추방된 탈북자들에 대한 처벌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모든 나라는 유엔의 농-르플루망 원칙(본국에 송환됐을 때 자유와 생명을 위협받을 경우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에 근거해 탈북자들을 보호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북한에서 빈번하게 자행되는 것으로 알려진 고문을 비롯해 비인간적인 처벌, 공개처형 등의 문제도 지적했으며, 이산가족 상봉의 조속한 재개를 북한에게 촉구하는 내용도 담겨져 있다.
올 해 결의안은 2008년부터 4년째 유엔총회 북한 인권결의안에 공동 제안국으로 참여 중인 우리나라를 포함, 유럽연합(EU)회원국 49개국이 공동으로 제안했다.
유엔 북인권 보고관 “납북자 문제, 인권문제 등 해결위해 노력하겠다”

그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탈북자들의 처우개선, 특히 중국의 강제북송에 우려의 뜻을 나타내는 한편, 지속적인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별도의 방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와 함께 “한국의 주변 국가는 탈북자들을 보호하고 인간적 대우를 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1951년 유엔 난민협약의 내용대로 탈북자들의 강제송환 금지 원칙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탈북자 대다수가 제 3국에 있을 경우, 강제북송을 당하고 있어, 여러 NGO와 외교당국이 이에 대한 우려를 가지고 있다는 다루스만 보고관은 그 스스로 주변국을 방문하면서 강제북송을 억제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으며, 인도주의적 대북지원에 대해 “북한식량 상황은 매우 심각한 만큼, 북한의 아동·여성·노인·장애인 등 취약계층에게 식량·의약품 등 인도주의적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전했다.
한편,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은 2004년 유엔 인권위 결의로 신설됐으며 북한의 인권상황을 조사하고 결과 및 권고사항을 유엔에 보고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010년 8월 특별 보고관으로 임명된 다루스만 보고관은 내년 3월 이번에 조사한 내용 등을 포함한 북한인권보고서를 작성하여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