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으로 북위 38도 부근에 휴전선을 그어 놓고, 남과 북으로 나뉜 한반도.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민족은 전쟁과 분단의 역사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가슴에 피멍이 든 채 잠 못 이루는 분단의 희생자들을 비롯해 한국 전쟁 때 북으로 끌려간 납북자들, 그리고 아직 생사 여부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이산가족들은 분단의 아픔을 가득 안고 있는 우리네 역사이기도 하다.
현재 북한에 억류중인 것으로 알려진 신숙자 씨 모녀를 구하기 위한 ‘통영의 딸’ 구출운동이 전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 사건은 참혹했던 한반도의 역사를 느낄 수 있게 했으며, 더불어 그동안은 공개되지 않았던 북한의 인권문제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또한 세계적인 음악가이자 역사적인 인물을 다른 시각으로 재평가하게 하는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점, ‘남의 일이 아니다’라고 느끼는 사람들의 공감대와 위기의식, 그리고 오길남 박사의 기구한 가족사는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기에도 충분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올해로 광복 66주년을 맞이했다. 그러나 해방의 감격을 느끼기보다 분단의 아픔과 동족상잔의 아픔, 남과 북으로 분단된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고 있다. 특히 한반도 전체의 해방이 아니라 남과 북이 따로 느끼는 반 토막의 해방이라는 점은 우리를 씁쓸하게 하고 있다.
‘통영의 딸’ 신숙자 씨 모녀 이야기
1942년에 태어난 오길남 박사는 서울대 독어독문과를 졸업하고 서독으로 유학을 떠났던 학생이었다. 박정희 정권 당시 정부는 광부와 간호사들을 서독에 파견해 서독정부로부터 차관을 얻었을 때였다. 통영에서 태어나 마산간호학교를 졸업한 신숙자 씨도 서독으로 파견 길에 오르게 되었고, 그곳에서 오 씨와 신 씨는 부부의 연을 맺어 혜원, 규원 두 딸을 얻었다.
1972년 유신헌법이 제정 된 후 서독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정부 운동이 전개됐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에 돌아오려던 오 씨도 반정부 운동에 가담하게 되면서 한국에 들어올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 무렵 오 씨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신 씨는 간염에 걸리게 되고 오 씨의 가족들은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 생활을 지켜보던 평소 친분이 있던 김종한 씨는 오 씨에게 “북에 가서 조국을 위해 경제학자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의를 했다. 또한 당시 유학생들 사이에서 작곡가로 명성이 자자하던 윤이상 씨도 ‘북한으로 가서 그동안 배운 지식을 동포를 위해 쓰라’는 내용의 편지를 오 박사에게 보냈다고 한다.
오 씨는 그 길로 가족들을 데리고 북한으로 향했고, 1985년 12월13일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달했다. 이 결정이 현재의 처참한 상황을 가지고 올 것이라는 것을 당시 오 씨는 알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이 독일에서 배운 마르크스 경제학을 북한에서 맘껏 펼쳐 보리라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오 씨의 설명이었다.
북한에 도착한 오 박사 가족은 평양 외곽의 초대소에서 갇혀 3개월간 김일성·김정일 혁명역사와 주체사상 등을 다룬 내용의 세뇌교육을 받았다. 그 후 오 박사가 배치된 곳은 대남방송국인 칠보산연락소였다.
오 박사는 “공화국의 최고 지성인들이 모여 있는 그곳은 요원들은 물론 국장이나 부소장도 풀기 없는 강냉이 국수로 점심을 때워야 하는 실정이었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그 곳에서 오 박사는 민영훈 교수라는 이름으로 원고를 쓰게 되었고 북한사회에 대한 환멸은 시간이 지날 수록 더해갔다. 그 무렵 북한 당국은 오 박사에게 새로운 사업을 제안했다. 그 것은 독일 유학생들을 북한으로 데려오라는 것. 오 박사는 부인 신 씨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고 신 씨는 “순진무구한 유학생을 속여 북한으로 데려오는 범죄에 가담하지 말고 그길로 북한을 탈출하라”며 오 박사를 설득했다.
“청순한 젊은이들이 당신으로 인해 이곳으로 유인돼와 치욕스러운 방송원 노릇을 강요당한다면 당신은 죄를 짓는 거예요.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예요. 그 범죄 공모에 절대로 가담해서는 안 돼요. 도망치세요. 다시 한 번 부탁해요. 정의를 사랑하는 순결무구한 젊은이들이 대남 공작기구의 제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추악한 삶은 존귀하지 않아요. 혜원 아빠, 이 말 명심하세요. 나가세요.”
이것이 오 박사가 기억하는 신 씨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1986년 11월21일. 오 박사는 북한에 들어간 지 11개월 만에 북한에서 나왔다. 이후 오 박사는 독일로 넘어가 남겨진 아내와 딸들을 구출하기 위해 윤이상을 만나 선처를 호소했다. 하지만 윤 씨의 반응은 싸늘했다. 오히려 신숙자 씨의 편지와 아이들의 육성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건네며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회유를 했기 때문.
가족들을 북한에 둔 상태에 독일에서도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막막했던 오 씨는 1991년 반정부운동에 가담한 사실을 자수할 결심을 굳히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2년 후 1993년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담아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를 펴냈으나 큰 주목을 끌지 못하고 사건은 조용히 잊혀져갔다.
북한 정치범수용소 사진 전시회
국제사회에서 북한인권 문제가 중대한 이슈로 계속해서 제기되면서 한동대 북한인권학회(SAGE) 기독학생들은 2011년 2월2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인사동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그곳에는 사랑이 없다-북한 정치범수용소’ 사진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 전시장에는 정치범수용소에서 당한 고문의 흔적을 담은 사진을 비롯해 통영의 딸 신숙자씨와 오혜원, 오규원 모녀의 사진, 수용소 탈출자 7명의 증언 영상, 수용소 생활과 설명을 담은 펜화와 삽화, 탈북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북한 실상을 그린 포스터 등 70여 점이 전시됐다. 이 전시회를 통해 다시 그의 가족 이야기는 세상에 퍼지기 시작했다.
요덕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 윤 씨가 1991년에 오 씨에게 건네준 모녀사진의 배경이 요덕정치범수용소 내부라는 것이 확인되었고, 당시 이들의 생사가 확인되기도 했다.
오 박사의 책도 지난 6월 <잃어버린 딸 오! 혜원 규원>으로 다시 출판됐다.
신숙자 씨의 고향인 통영에서는 ‘통영의 딸’ 신숙자 씨 모녀의 구출 서명운동이 진행되었으며, 통영 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27개 대학생·시민단체가 함께 ‘백 만 엽서 청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00만 명으로부터 받은 신숙자 씨와 두 딸의 생사확인 및 송환을 청원하는 엽서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내질 계획이며, 유엔특사를 북한에 파견할 것도 요청할 예정이다.
신숙자 씨 모녀 행방확인, 국제 문제되자 옮긴듯
탈북자들을 주축으로 북한민주화운동본부를 이끌고 있는 김태진 대표는 1986년 처음 탈북을 시도해 중국으로 넘어가는 데에 성공, 중국에서 16개월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공안에게 잡혀 북으로 다시 이송된 후 요덕수용소 완전통제구역에서 8개월 동안 ‘반동’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이후 요덕 15호 수용소 ‘혁명화구역’에 4년간 수감된 적이 있으며, 그는 ‘그 곳은 전체 요덕수용소 규모의 10분의 1정도 크기의 별도 구역으로 출신성분 등을 감안해 결정되는 곳’이라고 밝혔다. 그 수용소에서 김 씨는 신 씨 모녀를 목격하기도 했다. 요덕 수용소 안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서독집’으로 불리던 여성이 신 씨이며, 당시 11세와 9세이던 혜원이과 규원이를 기억해 낸 것이다.

“이번에 신 씨 모녀를 다른 수용소로 옮긴 이유는 충성서약을 받기 위한 차원”이라고 해석하는 최 대표는 “신 씨는 그동안 북한 체제에 ‘충성의 서약’을 하라는 요구를 거듭 거부해 탄압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며, “두 딸은 결혼을 금지당한 채 신 씨와 함께 있다”고 밝혔다. ‘충성의 서약’은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충성 맹세문을 혈서로 쓰는 것으로 장래에 있을지 모를 남측의 송환 요구에 맞서 유리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강요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통영의 딸 구출운동 전국적으로 확산
‘통영의 딸’ 신숙자 씨와 두 딸의 구출 서명운동이 그녀가 태어난 고향인 통영을 시발점으로 각 지역과 서울, 그리고 미국 외 전세계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인사동에서 열렸던 ‘그곳에는 사랑이 없다-북한 정치범수용소’ 사진 전시회를 신숙자 씨의 고향인 통영으로 옮겨 다시 개최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전국적인 구명운동이 시작됐다. 이 운동은 마산과 순천 등 남도를 중심으로 옮겨가기 시작했고, 신 씨 모녀의 구출을 홀로 호소하던 남편 오길남 씨도 본격적으로 등장 하면서 더욱 확산되고 있다.
통영에서 사진전을 개최한 현대교회를 비롯해 많은 교회에서는 통영의 딸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과 기도회가 이어지고 있으며, 지난 2008년 서울평화상 수상에 빛나는 북한인권운동가 수잔 솔티 북한자유연합 대표는 최근 한국을 찾아 두 차례 기도회를 하고, 청계광장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서명을 권유하는 등 ‘통영의 딸’ 구명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지난 10월13일 오전에는 서울 청계광장에서 북한민주화위원회와 대북 민간단체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에 억류된 신숙자 씨 및 두 딸의 생사확인과 송환을 위한 ‘구출! 통영의 딸 백 만 엽서 청원운동’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LANK·한국대학생포럼·북한인권학생연대·바른사회대학생연합·자유북한청년포럼 소속 대학생들도 서명운동에 동참, 매일 오후 늦은 시각까지 청계광장에서 촛불집회와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이 자리에는 오규남 박사도 참여하여 함께 촛불을 들고 시민들에게 서명운동의 참여를 촉구하기도 했다. 또한 북한인권단체연합회, 선진화시민행동 등 78개 사회단체로 구성된 시민네트워크도 거리음악회를 통해 서명운동의 확산을 도왔다. 지난 11월19일에는 신숙자 씨의 모교인 통영여중에서 신숙자 모녀와 납북자 구출을 기원하는 1,700리 국토 대장정도 열렸다.
‘극과 극’의 삶을 사는 두 가족
전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활발한 구명운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오길남 씨에게 가족과 함께 월북하도록 권유하고, 신숙자 씨 모녀를 북한으로 보낸 장본인인 윤이상(1995년 사망)과 그의 가족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현재 윤이상의 미망인 이수자 씨와 윤정 씨 모녀는 김일성이 선물한 평양 인근의 전원주택에서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알려졌으며, 독일이 국적인 이수자 씨 모녀는 독일과 평양을 자유롭게 오가며 살고 있다고 전해졌다.
이 씨는 2001년 한겨레신문사에서 펴낸 책 <나의 독백-윤이상 부인 이수자의 북한 이야기>에서 자신의 평양생활에 대해 소개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이 씨는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접한 북의 최고 책임자께서 나를 간곡히 초대했다. ‘남편의 생애를 내 손으로 쓸 때까지는 절대 죽을 수 없다’는 일념에서 김 주석이 선물로 내주신 비워두었던 북의 집으로 떠났다. 나의 집은 평양 중심지에서 자동차로 25분 거리에 있다. 낮은 산이 집 주변을 두르고 있어서 산자락이 모두 정원인 셈이다. 철 따라 철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정겹기 그지없다. 집 주변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산에는 온통 밤나무가 우거져 있다”고 피력한 바 있다.
또한 북한 문학예술출판사가 2003년 간행한 <금수산기념궁 전방문록실화집(2)-영원한 추억>에 따르면 ‘윤이상이 사망하자 김정일은 자신 명의로 화환을 보냈고, 평양에서 국가적 추모회도 개최했다. 김정일은 이 씨가 독일에서 칠순을 맞자 생일상까지 보내줬다’는 내용도 찾아 볼 수 있다.
오 씨는 1991년 윤이상이 자신에게 북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며 가족의 육성이 담긴 테이프와 사진을 건넸다고 주장했으며,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 책에서는 부인인 이수자 씨에 대해 “북한도 살 만하다는 뜻으로 ‘북에도 2,000만의 사람이 살고 있어요. 그런데 왜 망설이시죠’라고 했다. 탈북해 독일로 윤이상 부부를 찾아가 처자식의 구명을 요청했을 때 이 씨는 ‘평양에 있는 가족을 잊어버리고 재혼하세요. 재혼해서 잘 살면 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현재 이 씨 모녀는 경남 통영시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말 평양에서 열린 ‘제 30차 윤이상 음악회’에 참석한 뒤 중국 베이징을 거쳐 통영시가 윤이상을 기념해 매년 개최하는 ‘윤이상 국제음악 콩쿠르’에 참석하기 위해 이달 중순 한국으로 입국한 것이다.
윤이상 추모회, 규탄 집회 동시 개최 ‘갈라진 통영’
‘통영의 딸’ 신숙자 씨 모녀 구출 운동으로 전 국민이 떠들썩한 가운데 친북 행적 논란에 휩싸인 윤이상 씨의 콩쿠르와 추모 행사가 통영에서 예정대로 개최되고 있어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10월29일부터 11월6일까지 올해로 9회째를 맞고 있는 ‘통영 국제 음악제’는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라고도 칭하며, 윤 씨의 행적과 예술적 업적을 알리기 위해 2002년부터 열려 올 해 3주기를 맞았다. 또한 작곡가 윤이상 씨의 16주기 추모식도 그의 고향인 통영에서 지난 11월3일 오전에 열렸다.
통영 지역 문화 예술인 단체 <통영 예술의 향기>의 주최로 열린 윤이상의 추모제는 통영 도천동에 위치한 윤이상 기념관에서 열렸으며 예술의 향기 수석부회장 박금석과 부회장 박우권 등 통영지역의 문화 예술계인사 20여 명이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박금석 수석부회장은 추모사를 통해 “당신을 버린 조국은 또 다시 거짓의 굴레를 씌워 진실을 왜곡하려 한다”며 “당신을 향한 어떤 투기와 질투에도 굽힘없이 우리는 당신을 자랑으로 가슴에 품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으며, 이용민 통영국제음악제 사무국장은 “두 모녀는 통영 밖의 모처로 이동해 있다”며 “모녀가 통영에서 제사상도 차려주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날 열린 추모식에는 미망인 이수자 씨와 장녀 윤정 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반면 같은 날 오후 윤이상 기념공원에서 1㎞ 떨어진 항남동에 위치한 문화마당에서는 베트남 참전 유공 전우회,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 등 보수 단체로 구성된 ‘대한민국 대청소 500만 야전군’의 주최로 ‘통영의 딸 신숙자 3모녀 북측에 넘긴 윤이상 규탄대회’가 열렸다. 통영 외에도 각 지에서 모인 130여 명의 참가자들은 “윤이상의 이름을 깨끗이 지우자”, “윤이상의 처와 딸을 추방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고 전해졌다.
통영예술계, ‘윤이상 월북권유 주장’ 대응
경남 통영지역 윤이상 선생을 생각하는 통영예술인 일동은 지난 11월18일 ‘또 다시 상처받은 용, 윤이상을 생각하며…’란 제목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신숙자씨 모녀를 북한으로 보낸 장본인’이 윤이상이라는 오 박사의 주장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윤이상에 대해 비판의 시각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친북주의자’, ‘간첩 윤이상’이라는 일부 언론의 보도도 잇따르고 있다.
이들은 이 기자회견에서 “윤이상과 오길남, 신숙자 부부의 월북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북한에 있던 오길남의 구출을 위해 백방 노력했다”고 주장하며 반박했다.
이들은 통영현대교회 방수열 담임목사가 8월12일 조선일보를 통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께 드리는 호소문-통영의 딸을 구해주세요’라는 전면광고에서 오길남은“1992년 1월 작곡가 윤이상이 나에게 다시 월북하라고 회유하기 위해”, “조국을 위해 경제학자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작곡가 윤이상의 제의를 믿고 아내 자녀와 함께 월북했다”라고 적고 있어 윤이상 선생의 월북 권유가 사실인양 오보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용문 통영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사무국장은 “산자인 오길남의 말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지만 정작 윤이상 선생은 고인이 되어 한 마디도 할 수 없게 되었다”며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당시 서독의 <한인회보>에 실은 ‘오길남 사건과 나’라는 윤이상 친필을 발견했다며 공개했다.
그는 또한 “오길남 가족의 헤어짐은 오길남의 월북으로 인해 기인한 것이지 결코 윤이상 선생의 탓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선생의 월북 권고에 대한 증거는 없으며 이는 일방적인 매도”라고 비판했다.
이 기자회견에 함께 참석했던 김홍종 회장은 “‘통영의 딸’ 신숙자 모녀를 구출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백번 동의한다. 하지만 이 서명 운동이 통영의 아들 ‘윤이상’을 간첩으로 몰아가는데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을 통영 예술인들이 살려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통영의 딸’ 신숙자 VS ‘통영의 아들’ 윤이상 진실은?
경상남도 통영이 ‘통영의 딸’ 신숙자와 ‘통영의 아들’ 윤이상을 두고 두 편으로 갈라지고 있다. 같은 지역 출신인 두 사람이기에 지역사회는 더욱 시끄럽다.
이미 92년과 03년에도 이슈가 된 바 있던 이 사건의 재부활로 이 같은 논쟁은 더욱 뜨겁게 들끓고 있다. 이 사건들은 당시 영구 미제로 처리 된 사건이었다.
‘재독 동포 오길남 재망명 사건’은 당시 92년 5월, “윤이상과 송두율 뮌스터대 교수가 월북을 협박했다”며 오 박사가 공항에서 기자회견을 했고, 이에 대해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윤이상과 송두율이 북한 공작조직과 깊이 관계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었다. 그러나 다음날 윤이상과 송두율이 서독에서 반박 성명을 발표했으며, 서독 교포월간지 <한인회보>에 반박문을 실었으나, 국가안전기획부는 “억지 주장”이라고 일축했었다.
이후 2003년 송두율 사건으로 다시 한 번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당시 검찰은 공소시효가 지났지만 사건을 재조사하며 이들을 추궁했고 국가정보원도 대질신문을 벌였다. 반면 검찰은 사전구속영장 신청 단계부터 오 씨의 입북 권유 혐의 등은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범죄 사실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더 이상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통영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윤이상이 반국가 활동을 했으므로 통영의 대표 인물로 추앙해서는 안 된다’는 보수 진영의 입장과 ‘예술과 과거 행적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예술인 등의 의견이 맞서고 있다. 이에 오 박사의 월북에 윤이상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따른 진실만이 이 사건을 잠재울 수 있는 열쇠가 될 전망이다. 그러나 당사자 중 윤 씨는 이미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진실을 가리기는 힘들 것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