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3일 오전 5시(우리 시각) 미국의회에서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본부장과 롭 포트먼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 한미FTA(자유무역협정, Free Trade Agreement)에 대한 협상시작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6월5일 워싱턴에서 시작된 1차 협상부터 10개월의 협상을 진행한 끝에 2007년 4월2일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양국 당국자들은 한미FTA 타결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해에는 우리나라와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새롭게 들어선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이미 진행된 한미FTA에 대한 재협상을 공식 요청했다. 이에 이명박 정부는 2010년 재협상을 수용해 우리가 자동차 부분을 추가 양보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재협상안이 12월 타결됐다. 그리고 지난 10월13일 미국을 국빈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하는 동안 미국의회는 한미FTA 이행법안을 통과시켰다.
與野 한 목소리, “그때는 잘 몰랐다”
미국 의회와 행정부를 거쳐 날아온 한미FTA는 우리사회에서 숱한 논란과 만만치 않은 진통을 낳았다. 그리고 지난 11월22일, 집권여당인 한나라당 주도로 비준안이 국회에서 기습 강행 처리됐다. 이어 일주일 만인 지난 11월29일 오전 이명박 대통령이 이에 서명하면서 한미FTA 발효를 위한 절차는 완료됐다.
찬성 측에서는 “경제영토를 넓히는 역사적 계기가 열렸다”고 하고, 반대 측에서는 “경제주권을 팔아넘긴 매국행위”라고 비난한다. 야당은 일체의 국회활동을 거부하고 장외투쟁에 돌입했으며, 서울을 비롯한 전국 도심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집회가 연일 열리고 있다. 국론분열 양상까지 보이고 있는 한미FTA, 그러나 화살은 이제 시위를 떠난 모양새다.
그런데 정치권이 보여주고 있는 역설적이고 기이한 ‘자리바꿈’이 재미나다 못해 씁쓸하다. 오늘날의 한미FTA를 태동시킨 구 여당은 야당으로, 야당은 여당으로 자리를 바꿔 앉았다. 바뀐 것은 비단 정권만이 아니다.
구 여당에서 강력한 한미FTA 찬성론자였던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은 열정적인 한미FTA 반대투사가 되어 시민들과 함께 장외투쟁을 벌이고 있다. 또한 구 야당에서 누구보다 그것을 반대했던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어느새 ‘국익’과 ‘경제영토 확장’을 위한 찬성론자로 돌변해 기습 날치기 국회통과를 주도했다. 무엇이 이들을 돌변하게 했을까. 정확하게 정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선 그들이 입 맞춰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때는 잘 몰랐다”는 것.
노무현의 FTA, 이명박의 FTA
참여정부의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우리 경제의 근간인 일본식 성장모델에서 벗어나 한층 향상된 경제모델을 만들어 가자는 의미에서 한미FTA를 추진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를 받아들인 노무현 대통령 역시 한미FTA를 우리경제의 향후 50년을 준비하는 대사(大事)로 판단했다. 우리는 수출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국가다. 60~70년대 노동집약적 공업으로 출발해 21세기에 와서는 기술집약적 IT사업으로 연명하고 있다. 이렇듯 수출을 근간으로 하는 나라가 필수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것은 광활하고 풍부한 시장이다. 이런 점에서 당시 미국은 더할나위 없는 황금어장이었다.
게다가 남북 그리고 미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미FTA를 통해 한국, 미국 그리고 북한의 개성공단이 하나의 테두리 속에 들어오게 된다면 중장기적으로는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권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2008년 10월, 미국 리먼브라더스 파산을 시작으로 미국발 금융위기가 불어 닥쳤다.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가치는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초강대국 미국의 위상도 큰 상처를 입었다.
그 후 금융위기는 남미와 유럽으로 옮아가며 세계경제를 재편하기 시작했다. 신흥공업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위상이 급속히 높아졌고, 경제는 물론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미국과 대등한 관계로 발돋움하게 됐다.
그때쯤 한미FTA는 중단됐어야 했다. 당초 노무현 대통령이 구상했던 그것은 ‘양국 간 이익균형에 따른 통상협정’이었다. 비록 한미 간 국력차가 크지만 통상에 있어서 상호간의 이익균형을 잘 조율한다면 충분한 수익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로서 미국시장은 그만큼 매력적이고 풍요로웠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경제는 급속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는 당초 우리가 판단했던 개척시장으로서의 매력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참여정부 당국자에 의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던 4대 선결조건과 ISD(Invester-State Dispute Settlement, 투자자와 피 투자국 정부 간 분쟁해결 제도)가 독소조항으로 부상했다.
이는 구 여권의 핵심인사였던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이나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다. 당시 세계경제 여건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거나, 잘 몰랐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집권 이후 한미FTA는 지속적으로 추진되었고, 변화된 세계시장환경에 맞춰 보완하기는커녕 미국에게 오히려 자동차 분야 등을 양보하는 재협상을 실시했다. 또한 현재의 시장환경에서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독소조항들을 전혀 제거하지 못해 더욱 큰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협정문과 독소조항을 검토하기 전에
이번에 체결된 한미FTA 협정문은 A4용지로 1,500여 장 분량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면을 통해 한미FTA의 내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ISD 등 독소조항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향후 지면을 통해 지속적으로 분석, 해설하는 것으로 하고 이에 대한 문제를 단적으로 짚어 볼 수 있는 측면의 이야기를 몇 가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참여정부에서 최초로 타결된 한미FTA 초안은 미국의회에서 4년 이상 계류됐다. 미의회는 충분히 검토했으며, 또한 준비했다. 이 기간은 자국의 이해타산을 분석하고 산출해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 결과 이명박 대통령보다 조금 늦게 취임한 오바마 대통령은 한미FTA 반대를 주장하게 된다. 자동차 분야에서 미국이 불리하게 협상했다고 판단했는데, 이는 오바마의 지역기반이 미국 자동차산업의 메카인 디트로이트에 근거한다는 점과 맞닿아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진행된 재협상에서 자동차 분야를 양보하게 된 경위도, 이러한 오바마 행정부의 요청이 적극 수용된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지난 10월 이 대통령이 미국을 국빈방문했을 당시 정상회담 및 미의회 비준통과 이후 디트로이트를 찾아 자동차산업 노동자들을 위한 연설을 한 것도 이런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미국 내에서 장기간 검토되고, 수정되어 ‘전혀 달라진 FTA’를 한나라당과 이 대통령은 왜 그토록 빨리 비준하려했는가 하는 부분이다. 결국 재협상안 그대로 통과시켰다 하더라도 최소한 미국이 검토하고 수정했던 기간 동안 우리 국회가 국민들이 충분히 검토하고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왜 주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정부와 한나라당의 태도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한미FTA가 국익에 도움이 되고, 우리 경제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협정이라면 왜 그토록 반대하는 야당의원들과 반대시민들을 설득하지 못했느냐다.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기습 상정의 연유와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이 터지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하면서까지 통과시켜야 하는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다.
기습 통과 이후 이 대통령이 언급한 대로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다소 반대가 있더라도 추진해야 한다”는 말이 진심이라면, 한미FTA에 찬성한 151명의 의원들이 매국노로 지탄받으며 인터넷과 신문지상에 사진과 이름이 게재되는 상황에서 왜 침묵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한미FTA가 진실로 국익에 도움이 되고, 그러한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했다면 왜 당당하게 명예훼손을 주장하지 못하느냐다. 오히려 기습 강행 통과 다음날 한나라당 지도부는 각 의원들에게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사용을 당분간 자제하며 자숙하라”는 지시를 내렸을까. 또한 외통위 남경필 위원장은 왜 비준안 통과 직후 자진 사퇴를 선택해야 했을까.
독소조항들의 습격
이렇듯 한미 FTA비준안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했지만 재협상이 예고된 ISD 제도를 비롯해 스냅백, 래칫 등 또 다른 독소조항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한미FTA가 발효될 경우 정부의 규제밖에 있는 일부 조항으로 인해 국내기업들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의견이 해당 업계 내부에서 속속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국내 제약산업의 경우 의약품 분야 허가, 특허 연계제도가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이는 복제약을 만들어 식품의약품안전청에 승인 절차를 밟을 때 원래 약의 특허권자에게 통보하도록 하는 제도다. 제약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통보를 받은 다국적 제약사가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하면 허가절차를 중단해야 하며 국내 제약산업에 큰 원동력인 복제약 시장에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입을 모았다.
자동차산업도 마찬가지다. 협정 위반 또는 관련 이익을 무효화, 침해하거나 심각하게 판매 및 유통에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될 경우 6개월 내 철폐된 관세가 즉시 복귀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한국 정부가 미국과 약속한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못하면 미국이 한국에 부여한 자동차 관세 혜택을 언제든지 일시에 철폐할 수 있는 조항이라며 미국의 무역보복이 일상화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역진방지(Rachet) 조항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이는 서비스투자 분야에서 일단 개방하면 이전 수준으로 되돌릴 수 없도록 하는 강제조항이다. 예를 들어 한국영화시장을 보호하는 제도인 스크린쿼터의 경우 협정에는 73일 이상으로 돼 있지만 우리 정부가 60일 등으로 축소하면 나중에 다시 73일로 복원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영리병원 허용 문제나 공기업의 민영화도 마찬가지다.
미래 최혜국대우 조항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이는 협정 발효 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새로운 협정을 맺어 더 많은 개방, 더 좋은 혜택을 약속하면 미국에도 자동적으로 그렇게 해줘야 한다.
우리가 다른 나라와 협상을 할수록 미국에게 더 많은 것을 내줘야 한다는 얘기다.
서비스 시장의 개방 방식인 ‘네거티브식’ 개방도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다. 미리 개방하지 않기로 정한 부분은 개방을 막을 수 있지만 미래에 새롭게 만들어진 시장은 자동적으로 개방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정책적으로 필요할 경우 규제할 수 있다고 반박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미국의 한미FTA 이행법안에는 미국법률과 한미 FTA 협정이 저촉·충돌하는 경우에는 법적 효력이 없다고 되어 있지만 우리나라는 한미 FTA가 특별법 우선 원칙에 따라 국내법에 우선하는 효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미국 쪽에서 한미FTA로 피해를 볼 경우 이를 법적 효력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의 경우는 피해를 보더라도 이를 제지할 법적 근거가 미약해 제대로 된 규제가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