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공교육 혁명, “가을 은행이 풍년일세”
공교육 부활과 부흥의 흔적, 소리 없이 나이테를 쌓다
바야흐로 풍요와 결실의 계절, 가을이 왔다. 산과 들녘이 알록달록한 옷으로 갈아입고, 한 해 농사를 마무리 하는 농부들의 움직임은 분주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빽빽한 콘크리트 숲으로 이뤄진 도시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좀처럼 가늠하기가 힘들다. 기껏해야 아침저녁으로 느껴지는 기온차와 가로수로 자리 잡은 은행나무의 빛깔변화로 또 한 계절이 지나고 있음을 어렴풋하게 추정할 뿐이다.
가을이 여무는 길목에서 만난 ‘좋은 학교’경기도 시흥시에 자리 잡은 은행고등학교(www.eunhaeng.hs.kr/류경자 교장/이하 은행고) 교정에도 가을이 그윽하게 고였다. 학교 이름만 보고 운동장 주변에 은행나무가 가득하다거나, 은행원 등 금융인을 양성하는 전문학교로 단정 짓는 것은 큰 오산이다. 은행고는 1997년 개교한 시흥시의 명문 공립고등학교로서 1,700여 명의 학생과 120여 명의 교직원이 ‘명예, 진취, 봉사’를 실천하고 있는 인문계 학교이다. 하지만 15년을 훌쩍 뛰어넘은 이 학교의 역사와 궤적을 살펴보면 한 그루의 거대한 은행나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은행고를 이끌고 있는 류경자 교장은 그 세월은 고스란히 창조하는 지성과 소통하는 공감적 감성을 지닌 글로벌 은행인 육성이라는 교육지표를 한 걸음씩 밟아온 시간이었노라고 회고했다. 이 과정에서 경쟁력과 실력을 갖춘 은행인, 더불어 살고 배려할 줄 아는 은행인을 육성했던 것은 그 결실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저희 은행고의 나이테는 지금 이 순간에도 굵고 단단하게 한 줄씩 쌓여 나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맞춤형 교육과정을 수립하고 영어, 수학 수준별 수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진로와 적성에 맞는 창의적 체험활동을 강화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름드리나무는 자람에 있어서 소리를 내지 않는다. 모진 비바람과 모진 낙뢰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세월을 헤쳐 나갈 뿐이다. 오히려 그 세월이 모질수록 나이테는 더욱 선명하고 의미 있게 새겨지기 마련이다. 명실 공히 지역사회의 명문 공립고등학교로 자리매김한 은행고이지만 호들갑을 떨지 않고, 요란하지 않게 명성 위에 또 다른 명성을 쌓아나가고 있는 과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에는 좋은 일이 많았습니다. 지난해에는 경기도교육감 학교표창을 5개나 받았고, 대학진학결과도 좋았지요. 성균관대를 비롯해 가천의대, 부산대, 중앙대, 이화여대 등 명문대학에 진학한 학생 수가 많았습니다.”
아름드리 은행고의 ‘나이테’류 교장은 이러한 은행고의 성과를 그저 ‘좋은 일’이었을 뿐이라며 웃어보였다. 온화하기 이를 데 없는 류 교장의 미소만 보면 아무런 노력 없이 얻어 걸린 행운쯤으로 넘겨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 공립고등학교는 그런 우연함이나 행운으로 거머쥘 수 있는 타이틀이 아니다. 마치 모진 비바람을 이겨낸 한 그루의 은행나무 같은 은행고의 노력은 지역사회에서 이미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수업혁신, 교실혁신, 행정혁신, 학교혁신, 제도혁신 등 5개의 혁신사업을 과제로 삼아 학부모가 만족하고 지역사회로부터 신뢰받는 학교로 거듭나기 위해 류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이 혼연일체를 이뤄 한 걸음씩 내디뎌왔던 것이다. 결국 그 한 걸음 한 걸음은 은행고의 역사이자, 성과이며 또한 나이테로 자리 잡게 됐다.
이렇듯 소리 없이 더해지고 있는 은행고의 신화는 ‘모범적 공교육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학력과 대학진학률이 지상과제가 된 이 시대에 공교육의 붕괴를 우려해야 하고, 사교육의 폐해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요즘이기에 은행고의 행보는 더욱 소중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학교는 진학을 시키는 관문이 아닙니다.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기관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상은 올바른 판단과 결정, 그리고 조직을 리드할 수 있는 전문적인 실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와 함께 가장 중요한 것은 더불어 살아가며 배려할 줄 아는 가슴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류 교장은 지성과 감성을 고루 갖춘 인재양성을 논하며 ‘독서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구상이나 계획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은행고에서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교육과정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학교 차원에서 필독서를 선정하고 학생들이 이를 자유롭게 윤독할 수 있게 함으로써 독서량을 점진적으로 향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독서활동은 토론수업의 활성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됩니다. 토론석상에서 발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고,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잘 정리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거든요. 이런 점에서 저희가 중점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독서교육 활동은 입시교육과도 무관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교장, 좋은 학교, 좋은 선생님지식인과 지성인은 분명히 다른 존재다. 전자는 많이 알고 있는 데에 그치는 반면, 후자는 알고 있는 것을 생활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실천하는 이들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은행고와 류경자 교장의 이러한 교육철학은 유능학고 가슴 따뜻한 지성인을 양성해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에 대한 결정체는 학내에서 운영 중인 ‘굿프렌즈 동아리’라 할 수 있다. 이 동아리는 장애를 가진 학생과 일반학생이 함께 어울려 호흡하고 학습하는 모임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불어 살아간다는 명제는 우리 사회, 나아가 전 세계가 안고 있는 과제일 수 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담론이 은행고에서는 살갗에 닿는 바람처럼, 혹은 손발에 꼭 맞는 낡은 장갑과 양말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게 실현되고 있었다.
‘지성과 따뜻한 가슴을 가진 인재양성’, 어쩌면 닳고 닳은 명제일 수 있는 이 구호를 외치며 미소 짓는 류 교장의 그 따뜻한 미소가 어마어마한 무게로 다가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본 기자가 느낀 그 중압감은 은행고와 류 교장이 하나씩 늘여가고 있는 또 다른 나이테임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었다.
“좋은 교장, 좋은 학교, 좋은 선생님이 어우러져 좋은 학생들을 양성해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인 어려움이 몇 가지 있어요. 본교가 위치하고 있는 시흥시 주변에는 고속도로와 외곽순환도로 등 자동차 전용도로망이 잘 구성되어 있는 편인데, 이에 비해 대중교통망 연결이 조금 부족한 실정입니다. 이론 인해 기간제 교사나 인턴강사를 모시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학생들에게 보다 좋은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바람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데 학교를 둘러싼 환경이 이렇다 보니 아쉬운 점이 적지 않아요.”
인터뷰 내내 미소를 머금고 있던 류 교장의 얼굴에 걱정 가득한 그림자가 잠시 스치는 듯 보였다. 실제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정규교사 인사발령에 있어서 경력 있는 교사가 스스로 자원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결국 은행고의 교사들은 ‘가르침’과 ‘인재양성’이라는 교사의 사명을 다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와 교육당국이 공교육의 부활을 천명하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한 지금. 모진 비바람을 이겨내며 소리 없이 나이테를 쌓아가고 있는 은행고에게 우리가 건네줘야 할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