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방국 군인의 헛발질, 미군범죄 예방대책 없나
불평등한 SOFA 등으로 인해 신병확보 등 사법처리 어려워
지난 10월13일 정부는 최근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주한미군 범죄와 관련해 관계부처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주한미군 범죄 관련 관계부처 상설 태스크포스(TF)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안영집 외교통상부 북미국 심의관이 TF 팀장을 맡았고, 이를 중심으로 주한미군이 연관된 범죄를 다루는 수사당국의 의견을 수렴해 미국 측과 협의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날 회의에는 국무총리실을 비롯해 외교통상부, 법무부, 국방부, 경찰청 그리고 한미연합사령부 관계자가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한미군 범죄 예방 TF 현장시찰
지난 10월22일 자정 무렵 ‘주한미군 범죄 관련 관계부처 상설 태스크포스(이하 TF)는 첫 현장시찰에 나섰다. 잇따르고 있는 미군범죄를 두고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이하 SOFA) 개정요구가 거세진 시점에서 관심을 끌 만한 대목이었다.
이날 TF 현장시찰에 참여한 외교통상부, 법무부, 한미연합사, 여성가족부 관계자들은 서울 이태원 지구대를 방문해 경찰서 운영실태를 듣고 이태원 거리를 20여 분 동안 시찰했다. 그러나 당초 예상했던 유흥업소 방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앞서 TF는 이번 현장시찰 결과를 토대로 주한미군 범죄 및 SOFA개정 문제와 관련해 현장의 어려움을 개선하고 관계부처 협의 때 반영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정부 TF는 이번 일선 수사기관 방문을 통해 우리 경찰의 초동 수사과정상 어려움을 청문하고, SOFA 사건의 현장 처리과정을 직접 체험하고 파악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번 방문을 통해 파악된 사항을 토대로 향후 SOFA 운영상 개선 방안을 모색해 나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번 시찰은 불과 40분에 걸친 형식적인 퍼포먼스였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금요일이었던 10월21일 밤 11시 50분경 TF 관계자 10명이 이태원을 찾았고, 이들은 인근 지구대를 방문해 음료수를 마시며 김재권 이태원 지구대장과 30분간 면담을 했다. 그러고는 0시 20분부터 시찰에 나섰다. ‘현장의 속살을 보겠다’던 이들은 정장 또는 형광색 조끼를 입고 이태원역 주변 골목을 순찰하는 것으로 시찰을 시작했다.
TF 관계자들의 현장 시찰 중 한 클럽 앞에서는 입구가 붐비면서 외국인과 내국인이 서로 밀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이들은 별다른 조사활동 없이 그곳을 지나쳤다. 미군이 즐겨 찾는 클럽이 밀집해 있어 폭행이나 성범죄가 빈번히 일어나는 주요 유흥업소 주변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시찰단 일행이 다시 지구대로 돌아온 시간은 0시 44분. 그리고 24분간의 시찰은 그렇게 끝났다.
이런 시찰이라면 미군 범죄에 대한 여론의 비판을 의식한 ‘전시행정’이란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지구대장 면담은 전화통화를 통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었고, 20여 분의 현장 시찰 역시 거리 구경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잇따른 미군범죄, SOFA 개정 요구 높아
지난 9월24일 주한미군 병사인 K 이병이 우리나라 10대 여학생을 성폭행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K 이병은 동두천의 한 고시텔에서 17살 여학생을 수차례 성폭행하고, 5,000원을 빼앗아 달아난 혐의로 기소됐다. K 이병은 이러한 범죄사실에 대해 대부분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0월21일 열린 첫 공판에서 검찰은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사건발생 27일 만에 첫 공판이 열렸다는 점도 그렇지만, 15년이라는 중형을 구형했다는 점이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검찰은 “나이가 어린 학생을 대상으로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만큼, 동정의 여지가 있을 수 없고 만취상태였다는 주장도 입증할 수 없다”며 구형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재판이 이후가 더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피의자인 K 이병이 징역형을 선고받더라도 미군이 신병인도 요청을 하면 SOFA에 의거해 ‘고의적 고려’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세간에 알려지기 전까지 경찰이 증거를 확보하고도 불구속 수사를 진행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여론의 추이에 따라 K 이병이 미군 측에 인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SOFA에 따르면 한국 측에서 재판권을 행사하더라도 미국 측의 포기요구가 있으면 즉시 포기해야 한다. 과거 사례로 비춰볼 때 이러한 SOFA 조항은 주한민군 범죄의 사각지대를 형성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해온 게 사실이다.
이에 따라 SOFA 개정에 대한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다.
전국여성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평화를만드는여성회 등 25개 여성단체는 지난 10월10일 오전 서울 광화문 미국 대사관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주한 미군 범죄를 솜방망이 처벌하는 SOFA 개정을 위해 한미 당국은 당장 협상에 착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한 미군 관련 범죄가 자주 발생하는 경기 북부지역 여성들은 지역 내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모임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수윤 의정부두레여성회장은 “경기 북부지역 여성단체와 여성상담소를 중심으로 미군 범죄로부터 여성과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연대 활동을 펼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지난 10월20일에는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SOFA와 관련해 “우리 외교부로서는 개정의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다”고 밝혔다. 김 장관은 이날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정례브리핑을 통해 이 같이 말했다.
김 장관은 “현재도 강간이나 살인 등 중대 범죄에 대해서는 우리가 바로 신병을 인수할 수 있게 되어 있다”며 “다만 이것을 어떻게 경찰에서 실효적으로 확보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우선 초점을 맞춰서 논의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주한미군 사령관도 만나 현재 우리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우려와 주한미군들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도 직접 전달했기 때문에 미국 측도 심각성을 알고 있을 것”이라며 “한-미 양측에서 서로 주한미군 범죄를 감소시키는 노력을 해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다”고 말했다.
한편 주한미군 범죄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올해 국내에서 발생해 우리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주한미군 범죄자가 9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중 실형을 선고받은 미군은 4명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
주한미군사령부 홈페이지의 ‘한국 법원 주한미군범죄자 선고’와 ‘미 군사법원 처분’에 관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강도, 강간, 폭행 등 각종 범죄로 재판을 받은 주한미군은 모두 91명으로, 이 중 음주운전 혐의를 받다 무죄를 선고받은 1명을 제외한 90명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하지만 이 중 실형이 선고된 미군은 4명에 불과했으며 집행유예는 3명에 그쳤다. 나머지 83명은 벌금형을 받았다.
미군은 감축, 미군범죄는 감축 이전보다 증가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이 외교통상부로부터 제출받은 미군인 범죄 통계에 따르면, 주한미군이 감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군범죄는 감축 이전보다 증가한 사실이 확인됐다.
과거 이라크 병력 차출 등을 이유로 미측에서 제안한 주한미군 병력 감축안에 대해 한미 양국은 2004년 단계적으로 주한미군 12,500명을 2008년까지 감축하는 데 합의했다. 미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2004년 38,000여명에 이르던 주한미군 수가 2009년 20,600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2004년 298건 324명에 이르던 한국 내 미군 범죄는 2010년 316건 380명에 이르고 있다. 2010년 미군인 수가 전년도와 변동이 없다고 가정할 경우 감축 이전인 2004년보다 증가한 것이다. 김 의원은 감소 추세를 보이던 미군범죄가 증가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주한미군사령부의 야간 통행금지 해제 조치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지목했다.
또한 미군범죄의 증가 원인으로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후유증이 제기되기도 한다. 전쟁 트라우마를 치유하지 못한 군인들이 이유 없는 묻지마 폭행을 저지르는 사례들이 미군범죄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바 있다. 전쟁 트라우마가 야간 통행금지 해제와 맞물려 미군범죄 증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월터 샤프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2008년 8월부터 야간통행금지 정책을 완화하다가 2010년 7월 폐지하였다. 야간통행금지정책 폐지는 2000년 9.11사건 이후 테러공격의 우려 때문에 취해진 조치로서, 이 정책이 수립되기 이전에도 미군범죄는 꾸준히 감소하고 있었다.
따라서 김 의원은 “야간통행금지 정책은 주한미군사령부의 미군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일 뿐, 주한미군사령부의 미군범죄 대책도 아니며 한국인을 위한 정책은 더욱 아니다”라는 것이다.
김 의원은 이에 대해 “주한미군사령부는 야간통행금지 정책 폐지나 전쟁 트라우마 치유 등을 점검하고 미군범죄 예방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김 의원은 우리정부에게도 “미군범죄 수사나 재판에 영향을 미치는 SOFA 조항의 개정”을 촉구했다.
김 의원에 따르면 “미군은 현행범으로 한국 경찰에게 체포되어도 미군 헌병대가 자신을 데리고 부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알고 있기에 한국 경찰의 초동수사에 비협조적”이라는 지적이다.
한편, 현행 SOFA 조항은 피의자 미군의 신병인도 시기와 범죄 유형을 구분하여 한국의 수사권을 제한하고 있다. 이에 법원이 구속여부를 결정한 경우 시기와 유형을 구분하지 않고, 한국이 미군 피의자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도록 개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에 보수정당인 자유선진당이 SOFA 개정을 요구해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보수 정당인 자유선진당에서도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 소파)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자유선진당 임영호 대변인은 10월11일 논평을 내고 “최근 주한미군과 그 가족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며 “주한미군 사령관이 잘못을 깊이 사과했지만 사과만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임 대변인은 “대책은 고작 앞으로 30일간 한시적으로 주한미군의 야간 통행을 금지하는 것뿐인데 턱 없이 부족한 졸속 대책”이라고 지적한 후 “주한미군 범죄가 2008년 234건에서 2010년 316건으로 크게 늘었고 성폭행 사건은 5건에서 지난해 24건으로 5배 대폭 상승한 가운데 사과와 야간 통행 금지만으로는 주한미군 범죄를 근절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경청해야 한다”며 “살인, 강간, 방화 등 12개 주요 미군 범죄자도 피의자의 신병을 검찰 기소 후 넘겨받을 수 있도록 한 소파규정은 미군에게 특권 의식을 줘왔다”고 말했다.
임 대변인은 “현행 소파규정은 다른 미군 주둔 국가의 관련 규정과 비교해도 편파적이며 불공정한 소파 때문에 반미 감정이 고조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는 만큼 이제 주한미군의 소파개정은 더 이상 미뤄둘 수 없는 시급한 현안”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한미군은 아무나 하나”
한편 최근 잇따르고 있는 주한미군 범죄의 이면에는 미군이 전과자나 정신장애가 있는 문제 병사들을 무분별하게 선발하는 데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지난 2008년 미국 하원 정부개혁위원회 의장 헨리 왁스먼이 공개한 미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강도나 폭행 등 중범죄 전과가 있는 미군 신병이 2006년 249명에서 2007년 511명으로 2배 이상으로 늘었다. 이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전쟁으로 병력이 부족하자 무분별하게 신병을 모집한 결과로 풀이된다.
또한 참전군인 중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문제병사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주요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실제 우리나라에 파병된 미군 중에도 이런 사례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4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20대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실패해 1심에서 실형이 선고된 주한미군 한 병사는 참전 후유증을 호소해 무죄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상황이 이러한데도 미군 범죄가 증가하고 있음에도 이들을 처벌할 규정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SOFA 가운데 형사재판권을 규정한 22조 5항을 보면 주한미군이 ‘살인과 같은 흉악범죄 또는 죄질이 나쁜 강간죄‘를 범한 경우에도 우리 경찰이 해당 미군을 현행범으로 검거했을 때만 신병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미군은 우리 수사당국의 조사나 재판 과정에서 가해 미군의 권리가 조금이라도 침해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면 우리 측 구금 요청에 응하지 않아도 된다. 또 미국이 우리 쪽에 재판권을 넘기라고 요구하면 ‘범죄 사안이 특히 중요하다고 결정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미군 범죄자에 대한 재판권을 포기해야 한다. 이 때문에 한국이 미군 범죄자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한 경우는 전체 주한미군 범죄의 5% 수준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