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은 없다”, 전 임직원 ‘끈기·오기·열기’로 이뤄낸 기적

“제 삶의 멘토말입니까? 평생 바뀌지 않을 분이 계시죠”

2011-09-07     공동취재단

이제는 ‘지방경제시대’이다. 각 지자체들은 우수한 기술력과 자본을 갖춘 기업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으며, 이들 기업들에게 일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 제공을 위해 다양한 정책적 지원에 대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수한 기업들은 해당 지역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으며, 지역 고용창출에도 큰 기여를 한다. 하지만 기업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본사가 서울에 있는 것과 지방에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선 뜻 지방으로의 이전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향토기업은 지역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매우 크며, 이들 기업에 대한 다양한 정책적 지원이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다. 대구시 향토기업인 (주)남선알미늄(이하 남선알미늄)의 경우 IMF가 터진 후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현재 업계 1위 자리를 고수하며 대구시 향토기업의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으며, 임선진 대표 역시 전문경영인으로서 그의 경영 스타일 및 자질이 빛을 발하고 있다. 

뼈를 깎는 아픔,
그리고 다시 찾아온 영광

지난 IMF 경제 금융위기 이후 한국경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며 세계경제에서 주목을 받아 왔다. 하지만 2011년 올 한해는 지난 IMF때 보다 더 힘든 것 같다는 얘기들을 여러 곳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계속되는 청년실업과 소득 대비 연일 치솟기만 하는 물가는 서민들에게 큰 고통으로 다가왔으며 8월 세계증시는 일제히 폭락하기도 했다. 여기서 국민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앞으로의 경제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렇듯 어두운 경기침체 속에서도 열정과 패기, 도전정신으로 업계의 별이 되고 있는 기업들이 있으며, 우리는 이들에게서 한국경제의 청사진을 내다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남선알미늄을 꼽을 수 있다. 지난 1947년 ‘남선경금속공업사’에서 출발한 남선알미늄은 지난 64년이란 긴 세월 동안 업계를 리드해 왔다.

하지만 IMF가 터지면서 외환위기의 파고에 회사는 부도 직전의 상황에 직면했지만 탄력적인 기업 구조조정을 거치며 2007년 워크아웃을 졸업한 후 지난 2009년 6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하며 고속성장을 이뤄가고 있다.

이러한 남선알미늄의 새로운 도약에 대한 성공스토리는 수많은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으며, 성공적인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기업으로 모범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는 결코 실패한 적이 없다. 잠시 속도를 줄였을 뿐”
그렇다면 이렇듯 힘든 과정을 이겨내며 단기간에 업계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그 힘의 중심엔 바로 전문경영인 임선진 대표가 있었다.

임 대표가 남선알미늄에 합류한 지난 2007년은 워크아웃이 진행 중인 상태였기에 당시 내부 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으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했다. 이에 임 대표는 가장 최우선적으로 직원들의 사기증진에 매진했으며, 직원들과의 조촐한 술자리의 시간을 통해 업무적 관계를 떠나 솔직담백한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소통의 시간을 넓혀갔다. 한걸음 더 나아가 동기부여의 일환으로 진행된 각종 성과급과 급여인상은 직원들의 사기증진에 큰 도움이 되었다.

기업이 어렵다고 해서 모두가 기진맥진한 상태로 “어렵다, 힘들다”라고만 외친다면 그 기업은 죽은 기업과 다를 바 없다. 임 대표를 포함한 임직원들의 이러한 파이팅은 강한 자신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시장점유율 1위라는 쾌거를 이루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남선알미늄의 지난 워크아웃을 실패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잠시 속도를 줄였을 뿐인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임 대표의 지나온 길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1948년 충남 광천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한 그는 덕수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상고 출신이다.

지금의 화려한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보일 수 있는 그의 프로필은 더 이상 핸디캡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1964년 광천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덕수상고 졸업과 동시에 당시 수출실적 1위 기업이었던 대성목재에 공채 입사를 했다. 1972년 육군 만기제대 후 1977년 대우그룹 건설회사인 대우개발에 입사하면서 그의 본격적인 인생스토리가 시작된다.

그의 특별한 재능은 결국 지난 1993년 대우그룹 고졸 출신 첫 임원 승진이라는 유례없는 진기록을 세우며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 후 대우그룹에서 계열분리 된 경남 알루미늄에서 상무, 전무, 사장을 거쳐 2004년 경남윈스텍 사장, 2007년 SM그룹에서 M&A된 남선알미늄 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취임 전 임 대표는 일간지에 나온 남선알미늄 대표직 채용공고를 보고 SM그룹에 이력서를 보냈다. 그 후 우오현 회장의 면접요청이 왔고 임 대표는 우 회장과의 면접 다음 날 남선알미늄의 부사장으로 첫 출근하고 4개월 후 대표이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제 삶의 멘토이신 박기영 전 사장님은 제게 스승이자 부모 같은 존재입니다”
요즘 TV를 보면 각 방송사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얼마 전 종영 된 MBC ‘위대한 탄생’은 멘토링 시스템을 이용해서 타 방송사와의 차별성을 꾀했다. 해당 프로그램 방영 이후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모든 시청자들에게 ‘멘토’는 매우 익숙한 말이 됐다.

사실 멘토는 기업 경영에 있어서도 상당수의 CEO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임 대표의 삶의 멘토는 그에게 있어 스승이자 부모 같은 존재이며, 지금껏 그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 사회생활을 할 당시 임 대표의 직장 상사였던 멘토와의 나이 차이는 불과 12살 차이였지만 언제나 부모님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대성목재 입사당시 자금과장이었던 그의 추천으로 대우그룹과 인연을 맺었으며, 대우건설에서 계열사인 경남금속으로 전보되어 근무하던 중 그의 멘토가 경남금속 대표이사로 부임한 것이다. 그가 바로 박기영 사장이다. 임 대표는 그렇게 박기영 사장과의 인연을 오랜 시간 이어가며 삶에 대한 많은 부분을 멘토링 받게 된다.
임 대표는 “제 삶의 멘토이신 박기영 사장님에 의해 제 삶 전체가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라며 “심지어 개인 취미생활까지 박기영 사장님을 닮아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삶의 멘토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던 임 대표의 모습 속에서 오래전 그에게 스승이자 부모와 같았던 박기영 사장과 지내온 지난 세월에 대한 진한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올해로 76세인 박 전 사장과 종종 연락을 하고 가끔씩 찾아뵙는다는 임 대표는 “박기영 사장님을 만나 뵈면 저는 지금도 오래전으로 돌아가 변함없이 총괄부장일 뿐입니다”라며 환하게 웃음 지었다. 이런 말이 있다. “넘어진 자리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 실패한 자이고, 넘어진 자리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자가 성공한 자이다.” 따라서 남선알미늄은 결코 실패한 적이 없는 기업이다.

성공이란 수식어만이 따라 붙는 대구의 대표적인 향토기업인 것이다.

임 대표는 “제가 언제까지 수장의 자리를 맡을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회사에 몸을 담고 있는 동안만큼은 회사의 발전과 전 임직원의 삶의 질 향상에 모든 것을 쏟아 붙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한편, 남선알미늄은 현재 주력인 알루미늄 창호사업을 토대로 사업다각화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