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0년, 친일파는 살아있다

2005-08-17     글/신혜영 기자
친일청산, 대한민국은 항상 무풍지대였다
일제시대 36년, 광복 60년…엇갈린 역사와 현실로 제거되지 못한 친일잔재

오는 8월15일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 60년이 되는 해로 그 어느 때보다도 친일청산에 대한 목소리가 높다. 해방후 친일청산은 통일민족국가 수립과 함께 민족적 과업이자 역사적 당위였으나 여전히 오늘날까지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이는 해방후 정치?경제?사회 등 실질적 정권을 친일세력에 둠으로써 친일청산에 대한 과업을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 이로 인해 친일파와 독립운동가가 국립묘지에 함께 안장되는 아이러니가 연출 되고, 친일혐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독립유공자로 존경받는 어이없는 현실을 맞이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방관만 할 수 없는 우리의 엇갈린 역사와 현실을 되짚어 이러한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지 반추(反芻)하고 과오를 반성하며 해방 60년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친일후손, 땅 찾기 승소율 50%넘어
지난 5월13일 대법원 2부는 송병준의 증손자 송모 씨 등 7명이 “경기 파주시 장단면 석곶리 일대 토지 5만9,000여 평을 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소유권 확인 등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송 씨 등은 증조부인 송병준이 1916년 7월 국유미간지 이용법에 따라 개간사업에 성공한 뒤 국가에서 무상으로 이 땅을 취득했는데도 6.25전쟁 통에 소유권 등기부 등이 소실돼 1995년 국유지에 편입됐다며 1999년 10월 이 같은 소송을 냈다. 그러나 재판부는 “원고는 이 땅에 대해 선조인 송병준이 일제 강점기 국가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밝히며 원심을 확정한 것.
송병준 후손은 지금까지 국가를 상대로 낸 4건의 땅 관련 소송 중 2건은 패소하고, 1건을 소 취하했으며, 현재 인천 부평구 미군부대 ‘캠프마켓’ 일대 2,956평의 땅을 돌려달라는 1심 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친일후손, 땅 찾기 승소율 50%넘어
이처럼 그들이 남긴 재산을 찾기 위한 후손들의 잇단 소송이 활발해진 이유는 뭘까. 이는 지난 1997년 이완용의 증손자가 부동산 관련 소송에서 승소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서울고등법원 제2민사부는 판결문에서 “매국노의 후손이라도 법률에 의하지 아니한 재산권 박탈은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완용 후손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를 계기로 1990년대 이전에는 1건에 불과했던 친일파 후손들의 소송건수가 모두 23건에 달했다.
지난 5월13일 법무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금까지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유권 확인 소송은 모두 23건. 그중 확정 판결난 17건 중 국가 승소가 5건, 소 취하 4건, 국가 일부 승소 8건으로 집계되었다. 이는 승소율이 무려 50%가 넘는 수치다. 현재 법원에서 심리가 진행중인 사건은 송병준, 이근호, 윤덕영 관련 소송 6건으로 대상 토지는 약 14만평에 시가 3,000억원이 넘는다. 이근호 후손들은 경기도 오산시 궐동,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경기도 안성시 소재 토지에 대한 재산반환소송을 제기해 1심이 진행 중이며, 지난해 10월 15일 경기도 화성시 소재 700평의 토지에 대한 재산반환소송 1심에서 승소했다. 윤덕영 후손들도 경기 파주시 임야 2,525여 평에 대한 재산반환소송을 제기해 1심이 진행중이다.
그중 대표적인 친일파인 이완용과 송병준이 보유한 것으로 확인된 토지는 95만 평으로 시가 수조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송병준은 80만평 규모의 토지와 임야를 일제시대에 제공받았으며 이완용도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를 조사한 상황에서 14만5,000여 평의 토지를 제공받았다. 하지만 국가자료가 정리된 곳이 주로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향후 전면적 조사가 이뤄진다면 이들 명의의 일제시대 부동산 규모는 수백만평 이상에 달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당시 친일파들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이들의 재산을 돌려받기 위해 후손들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지난 2월 열린우리당 최용규 국회의원에 의해서 발의된 ‘친일재산환수법’은 당시 169명이나 되는 여야의원에 의해 동의를 받고 많은 국민들의 서명을 통해 지지를 얻은 법안이지만 지금껏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4월에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이 법안에 대해 회의를 했고, 빠르면 지난 6월에 국회 본회의에 상정될 거라고 했지만 지금껏 처리가 지체되고 있는 상황이다. 최용규 의원이 마련한 이 법안은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과 직위을 받았거나 을사보호조약 등의 체결을 주장한 고위공직자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고, 이들이 당시 취득했거나 이들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국가가 환수토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한 포털 사이트는 2만2,200명을 상대로 ‘특별법 제정’에 대한 의견을 물은 결과 89%가 찬성한다고 답하는 등 시민단체와 네티즌들은 대부분 ‘친일파 후손의 땅찾기 소송’을 원천 봉쇄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한 네티즌은 “친일파 재산은 소급 적용해 국유화하고, 독립유공자에게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다른 한 네티즌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지금이라도 친일파 후손들에게 나라 땅을 빼앗기는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법을 빨리 만들어 달라”고 촉구했다. 또한 “선거를 통해 친일파 재산문제에 소홀한 정치가들에게 국민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하는 등 다양한 의견을 보였다. 한편, “친일자손들이 법조계에 상당수 포진해 있기 때문에 친일파의 손을 들어주는 거다”라고 꼬집는 네티즌들도 있었다.

명분만 앞세운 보훈사업
그동안 정부는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세우고 독립유공자들의 공로를 후세에까지 전한다는 취지 아래 매년 광복절 등 역사적인 기념일날 이들에 대한 포상을 실시해왔다. 그러나 그동안 정부에서 선정한 유공자 등에는 다수의 친일파들이 섞여 있는 웃지못할 역사적 아픔이 재연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차원의 보훈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50년 4월 14일 군사원호법이 공포?시행되면서다. 이 법은 공비를 토벌하다 전사한 사람이나 군 복무 중 순직한 자의 유족에 대한 원호 업무가 목적이었던 사업으로 항일 독립유공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보훈 지침도 들어 있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강력한 후원아래 친일세력과 연계해 반공을 국시로 성립된 권력이었기 때문에 김구를 비롯한 우파 독립운동 진영은 부담스런 정적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훈의 첫 출발을 반공으로 삼았고 그러한 유공 과정을 통해 친일세력들은 ‘반공 애국투사’로서 대한민국에 당당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기에 들어서며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과 포상이 본격화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다양한 형태의 국가적 기념사업과 독립유공자에 대한 보훈사업을 전해하였고, 1962년 4월 16일 군사정부는 군사원호칭을 원호처(現 국가보훈처)로 승격시키고 그 대상도 군사원호 대상자 중심에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추가로 포함시켰다. 같은해 문교부 산하에 독립유공자 공적 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1963년 내각 사무처에 독립유공자 상훈심의위원, 1968년 총무처에 독립유공자 상훈심의위원, 1977년 원처에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 등을 설치해 이전의 정권과는 달리 적극적인 보훈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독립유공자에 대한 공적 조사와 상훈 심의는 친일 행위자를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을 임명하거나 수상자로 포함시키면서 원칙과 순수성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친일단체나 일제 통치기관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국립현충원 내 국가 유공자 묘역, 애국지사 묘역 등에 진짜 독립유공자들과 함께 안치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기도 했다.


국립묘지까지 지배한 친일파들
이처럼 국가 서훈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몇몇 친일인사들이 국립묘지에 순국지사들과 나란히 누워 있다는 사실 또한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힘든 친일청산의 과제 중 하나다.
사후 40년 만에 안두희에 의해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어 세간의 화제를 불러모았던 전 특무부대장(현 기무사) 김창룡. 그는 일본 관동군 헌병대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는 일에 앞장섰던 인물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김씨의 묘는 김영삼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로 정권이 이양되던 98년 2월 어수선한 시기를 타서 이장되었다. 민족문제 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김창룡에게 무슨공이 있어서 과를 덮을 만큼 그 공을 얘기를 하는 건지 설사 그 공이 있다하더라도 그 공이 민족반역 행위 친일 구역행위를 넘을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토로했다. 이에 시민단체들은 정권인수기의 어순선함을 노려 전격 이장된 것으로 기무사 내부의 누군가에 이해 조직적으로 계획된 일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김창룡의 묘를 이장하라고 요구했지만 국방부는 이장 요구를 받아들일만한 법적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또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서 81년 3월 사망 당시 성대한 국민장을 치르고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갑성. 그에 대한 뚜렷한 친일행적은 밝혀진바 없지만 아나키즘 계열의 독립운동가 김성수가 결정적인 단서를 내놓았으며 이밖에 임의택(임정서무국장), 유우석(유관순 열사의 오빠) 등도 이갑성의 친일행적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애국선열 관련단체의 한 관계자는 “도대체 누구의 가치판단으로 이루어졌는지 몰라도 그 역시 같은 친일파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선영이나 일반묘지에서 호화묘지를 꾸민다 해도 눈총을 받을 것인데 하물며 국립묘지에 묻힌 것은 분명히 재고되어야 한다”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 혐의자’를 보면 66년 국민장을 받은 윤익선을 비롯해 77년 대통령표창을 받은 김동호, 대통령장을 받은 김성수, 서춘, 이은상, 이갑성 등 총 21명에 달한다. 이러한 독립유공자 사이에 뒤섞인 친일 경력자를 찾아내기 위한 1차 조사가 1980년대 초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였던 고 임종국 선생과 광복회가 나서 진행했다. ‘광복회원친일유공자 명단’이라는 이름으로 작성된 문건에는 친일 경력을 가진 23명의 명단이 포함돼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를 이어받아 지난 2004년 2월 ‘독립유공자 가운데 재심이 필요한 사람’들의 명단 20명을 국가보훈처에 제출했다. 이 가운데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으로 대통령장을 서훈받은 이갑성 등 9명은 ‘조사가 더 필요한 사람’으로, 같은 대통령장이 서훈된 김성수 등 11명은 ‘친일 행위가 뚜렷한 사람’으로 꼽혔다. 국가보훈처는 그동안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1996년 한 차례 서춘, 김희선, 박연서, 장응진, 정광조 등 5명의 친일 전력자에 대한 서훈을 박탈하는데 그쳤다.

친일예술인 55명 124개 상 휩쓸어
친일잔재는 정치?경제?사회를 비롯해 문화?예술에도 많이 남아있다. 특히 문화?예술인들이 친일은 그들의 작품이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데다 친일은 했어도 뛰어난 재능으로 예술 발전에 공헌했다는 재능론이 겹치며 객관적인 평가를 어렵게 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조사한 ‘친일파 상훈 현황’을 보면, 현제명, 윤극영, 유치진, 김기창 등 친일행적이 뚜렷한 예술인 55명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듬해인 1962년 3.1문화상, 5.16민족상 등 각종 상을 124개나 휩쓴 것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현제명과 홍난파는 분명 한국이 낳은 훌륭한 음악가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친일행적이 속속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부 중학교 음악 교과서에서는 민족음악의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다시 친일파로 둔갑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고 있다.
뿐만 아니다. 1969년 8월 23일 서울 남산공원에 있는 10m높이의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은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기 세운 것으로 이 동상을 만든 사람은 바로 해방 이후 홍익대와 이화여대 조각과 교수를 지낸 김경승(1915~92)이다. 그는 동생 김인승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친일 미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1942 6월 3일자 <매일신보>에서 “구라파 작품의 영향과 감상의 각도를 버리고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 것은 새 생명을 개척하는 대동아전쟁 하에 조각계의 새길을 개척하는 것이다. 나는 이같이 중대한 사명을 위하여 미력이나마 다하여 보겠다”고 말해 천황을 위해 화필보국(畵筆報國)을 맹세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인 화가의 다수는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에 호응하며 친일미술활동에 복무했다. 해방후 친일파 청산이 안되면서 이들은 그대로 미술계의 권위있는 원로가 되었다. 그는 이 동상 말고도 남산 안중근 의사상, 서울 도산공원 안창호 선생상(1973), 서울 종묘공원 월남 이상재 선생상(1989) 등 독립투사들의 동상을 도맡아 제작했다.
특히 미대 원로교수들의 친일행적을 거론하며 친일미술사 청산 소신을 밝혔다가 98년 교수재임용심사에서 탈락한 김민수 전 서울대 미대 교수의 6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는 복직투쟁은 친일미술이 왜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인지 느낄 수 있게 한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는 “예술의 자살이라 할 전쟁미술과 친일미술의 고통스런 기억과 대면하면서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 정리문제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상범 의문사위원회 위원장은 “예술로 우리 정서에 독약을 뿌리고 마취시킨 이들은 총칼을 든 친일파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다. 김원웅 열린우리당 의원도 “친일청산이 없는 대한민국의 애국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나라”라며 “민족을 배반했던 사람들이 지배하는, 주류로 남아있는 나라가 어찌 애국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대학가에서도 친일청산 봄바람
대학가에서도 친일청산의 목소리가 높다. 지난 5월 이화여대에서는 유관순 열사의 동상 건립을 위해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날 약 3,500여 명이 참여하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이화여대 학생모임 ‘이구동성’의 장유진(철학과 4년) 대표는 “전체 학생 5분의 1이 서명에 참여할 만큼 이화인의 친일청산 욕구는 높다”며 “이화여대의 부끄러운 역사로 남아있는 김활란 초대 총장보다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유관순 열사가 이화여대의 자랑스런 선배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초대 총장인 김활란은 ‘여성박사1호’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할 때 조선의 여성들에게 그 전쟁에 협력하라고 선전했으며 조선의 여성들이나 또는 청년들에게는 천왕의 군인이 되어서 나가 싸우다 죽으라고 얘기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 근대 여성교육의 선구자로 지칭되어 그의 친일행위가 가려졌지만 이제는 독재권력의 협력자였다는 사실이 같이 기억돼야 한다는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이에 장유진 대표는 “이화여대의 부끄러운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 과오는 철저히 비판하고 공은 높이 사 기려야 한다”며 “유관순 열사의 동상을 이화인의 힘으로 세우자”고 이같이 주장했다. 이와 관련 이화여대 학생처 한 관계자는 “이제야 학생들의 정식 요구사항을 받을 만큼 적절한 절차를 통해 검토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 뿐만 아니다. 지난 95년 연세대는 일본재단으로부터 무려 75억 원의 기금을 유치했다. 문제는 일본재단의 설립자인 사사카와 료이치가 A급 전범이라는 것. 95년 당시 일부 교수와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 등 반대하고 정 받을 수 밖에 없다면 이념성이 없는 이공계 분야에만 받을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재단은 역사?사회분야의 지원만을 고집했다. 이는 친일문제를 규명하고 이를 교육해야 할 주체인 대학이 친일행위의 포로가 된 것을 잘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학교에 남아 있는 친일문제를 청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학생들은 친일청산 위원회를 발족해 친일행적이 있는 초대 총장들의 동상과 기념사업폐지를 요청하고 나서는 등 친일청산의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다.

해방, 그리고 친일세력들의 득세…
되풀이 된 잘못된 역사 바로 잡아야
그렇다면 해방된지 60년이 지나도록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지난 93년 김원웅 의원은 이완용 후손들이 친일의 대가로 형성한 재산을 되찾는 것을 보고 친일파들의 재산몰수를 위한 ‘민족정통성회복특별법’을 추진했으나 상정도 되지 못하고 무산됐다. 이에 김원웅 의원은 “결국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이 친일측 기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라고 토로했다. 실제로 해방이후 부일협력자 관료직 진출 상황을 보면 총 155명 중 국무총리가 배두진, 정일권, 최규하 등 7명에 달하며, 내무부장관이 18명, 법무부 장관이 13명, 치안국장이 7명, 대법관이 14명이다. 이러한 배경엔 ‘미군정3년’과 60~70년대 이승만 정권이 친일세력을 정부요직에 대거 등용시킨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36년이라는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독립하였다. 그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고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자행된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승만이 이끄는 집권당인 한민당에는 정치?사회?경제 부문 등에 다수의 친일파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더욱이 경찰과 군대의 90%정도가 친일파나 과거 일본군에서 복무하는 자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처럼 실질적 정권을 친일세력에 둠으로써 이승만 정권은 약점을 메우기 위해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강제로 반민특위를 해체시키기에 이른다. 친일청산을 목적으로 등장한 반민특위는 8개월 간의 활동을 끝으로 ‘반공’정신에 가려져 그 빛을 보지 못한채 사라졌다. 그 뒤 4.19 혁명이후 친일파 청산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일본군 사관학교 출신인 박정희의 정권장악으로 인해 친일파 청산은 더욱 어려워졌다.
또한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의 개혁바람을 타고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가운데 친일 협의자의 서훈 취소를 검토하다가 무산됐다. 이는 검토대상에 모 신문사 창업주가 포함되자 국회 보건사회위원회에서 당시 친일행위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보훈처를 거꾸로 질책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처럼 해방이후 친일청산의 노력을 보이는 듯 했으나 사회적?정치적 배경 때문에 남한에서는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친일행위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는 한 친일문제는 현재형일 수 밖에 없다. 역사적 과오를 덮어두는 것은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프랑스의 반민족행위자 처리과정을 보면 처벌대상이 150~200만 명중 실형선고가 15만 8천명, 사형선고가 1만1,500명, 그중 사형집행이 3,800여 명에 달한다. 그러나 우리나의 경우 처벌대상 7,000여 명중 조사대상은 682명, 기소 221명, 실형선고는 7명에 불과하며 실제 형집행은 단 한명도 없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동안 우리나라의 친일청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잘 알 수 있다.
당시 친일행위를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난 상태다. 그들에 대해 형집행은 할 수 없지만 잘못된 판단으로 그들이 독립유공자로 둔갑해 서훈을 받고 국립묘지에 나라를 위해 싸운 독립투사들과 나란히 안장되어 있는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 그들의 친일행각을 알리고 부끄러운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며 60년이란 세월의 엇갈린 역사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 출범
밀정이나 헌병행위 등 모두 20개 항목으로 규정

지난 5월 31일 친일진상규명위원회가 현판식을 갖고 공식 출범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친일진상규명위 위원장에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광복 60년 기념사업 추진위원장)와 노경채 수원대교수, 정근식 서울대교수 등 대통령 국회 대법원장이 선임한 10명의 민간인 위원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친일진상규명위원회는 일본제국주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1904년) 발생 때부터 광복때까지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진상조사 활동을 통해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나갈 것이다. 지난 6월 1일부터 활동이 시작된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는 앞으로 4년간 각종 제보와 발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친일반민족행위조사대상자를 선정하는 등 조사활동을 벌인다.
친일 반민족행위의 범위는 밀정이나 헌병행위 등 모두 20개 항목으로 규정돼 있다. 떼문에 일제시대 일본 만주군 장교로 복무한 박정희 전 대통령도 일단 법적으로는 조사대상에 포함된다.
특히 조사과정에서 기존 독립유공자 중 친일 반민족행위 전력이 드러나면 매월 지급되는 보훈연금 및 유족연금, 자녀학자금 등 법률에서 보장되는 모든 혜택이 중단된다. 또한 위원회는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관련기관 등에 대한 현지조사를 할 수 있고 정당한 사유없이 출석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동행명령장을 발부하거나 과태료도 부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행위가 최소한 60년이 지난 과거의 일인 만큼 사료와 증언을 통해 친일 반민족행위임이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을 경우 판정과정을 둘러싼 논란도 예상된다.

#광복절에 친일행위자 4,000여 명 명단 발표
김활란, 김성수, 방응모 등의 각 분야를 망라한 사람들 다수 포함
지난 7월 6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2007년 발간할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친일인사 4,000여 명의 명단을 오는 광복절 전후해 1차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국회에서 일제식민지 민족반역행위자 708명의 명단이 발표됐지만 광복 이후 이정도 규모의 친일인사 명단이 발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에 공개되는 친일인사 명단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학계의 근?현대사 전문가들이 지난 15년간 축적된 자료를 토대로 선정한 것으로 이번 친일명단엔 군수와 소위, 판·검사 등 고등관 이상을 지낸 인물 및 고등계 형사 이상의 인물이 대부분 선정대상에 올랐으며, 일제하에서 직위는 없어도 친일행위를 한 사람(행위당연범)까지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번에 공개되는 명단에는 방응모, 김성수, 김활란 등 문화·예술·언론·학술·군·경찰·관료·법조·경제 등 각 분야를 망라해 친일활동을 한 사람들이 포함된다. 또한 제헌의원도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현직 국회의원의 부친 등의 친일경력 논란도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해외에서 활동한 친일인사에 대해서는 활동특성상 지위에 따른 친일인사(지위당연범)보다는 실질적 친일행위자(행위당연범)가 많아 선정기준을 마련 등 시일이 걸려 내년쯤 발표할 계획이라고 한다. 편찬위는 지난 14일 명단선정을 위한 상임위를 열고 최종 선정작업에 들어가 내년에 발표될 해외파 친일인사 명단을 포함한 1차 친일인사 명단은 2차 선정작업을 거쳐 2007년 발간될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계획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