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듯 지어올린 ‘비트플렉스’, 그 다음 작품은
역지사지와 화이부동을 화두로 인류를 보듬는 꿈을 꾸다
왕십리의 재발견
서울의 중심가에 자리잡고 있지만 변두리 취급을 받았던 왕십리. 그 고즈넉한 지역이 새로 들어선 건물 하나에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다. 각종 놀거리와 살거리 먹을거리를 찾는 젊은이들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가수 김흥국의 명곡 ‘59년 왕십리’가 자아내던 애잔함과 서글픔은 없다. 톡톡 튀는 트렌드와 활기로 달아오른 2011년이 가득 차 있을 뿐이다. 오늘날 왕십리역은 국내에서 유일무이하게 4개 환승노선이 교차하는 사통팔달 교통의 요충지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고 교통이 편리하다보니 자연스레 서울 상권의 심장부라 할 만하다. 이 모든 것이 지난 2008년 9월에 오픈한 왕십리 민자역사 비트플렉스가 들어선 후 일어난 일종의 ‘기적’이다.
비트플렉스는 44,162㎡(13,382평), 연면적 99,003㎡(약 30,000평)의 규모에 유럽형 테마파크 패션쇼핑몰 엔터식스와 이마트, 국내 최대 멀티플렉스 극장인 CGV IMAX, 포시즌워터파크, Dome골프장, 테라스 푸드카페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최고의 브랜드들이다. 게다가 주변에는 2km에 걸쳐 걸을 수 있는 건강거리와 아트파크, 기네스파크 등 건강테마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야말로 고객과 건물이 하나가 되어 행복과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비트플렉스(BITPLEX)는 BIT(Beauty of Intelligence and Tough)와 PLEXUS(문화, 오락, 체육, 교통, 물류의 복합망)의 합성어입니다. 지성과 야성미가 어우러진 새로운 개념의 세계라는 뜻이지요.”
비트플렉스 조준래 회장의 목소리에는 단단하고 야무진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결코 투박하거나 거칠게 느껴지지 않았다. 건물을 짓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뚝심은 분명히 느껴졌지만 뭔지 모를 섬세함 같은 것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몇 걸음 떨어져서 올려다 본 비트플렉스 건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눈에 다 담을 수 없는 그 거대한 건축물은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는 듯 웅장하고 기이했지만, 눈이 아닌 코로 맡아지는 향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를테면 거대한 한 송이 꽃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시를 쓰듯 지어올린 건축물
비트플렉스라는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을 완성하기까지 겪었을 신산스러움을 묻는 질문에 조 회장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낮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조용히 시(詩) 한 편을 읊조렸다.‘새벽 / 여명이 밝아오는 시간 / 설레는 마음으로 / 당신을 기다립니다. // 한낮 / 눈부신 햇살 아래 들려오는 / 당신의 해맑은 웃음소리는 / 곧 나의 기쁨입니다. // 해질녘 / 황혼의 아름다움보다 / 당신이 함께 한 시간 시간들이 / 더 큰 아름다움으로 남습니다. // 한밤 / 꿈속에서는 / 당신이 주신 마음으로 // 내일을 준비합니다.’
이는 조 회장이 비트플렉스를 기획하고 건축하는 과정에서 지은 자작시라고 했다. 갑작스런 시 낭송에 잠시 당황했지만, 음절과 어절로 엮인 그 시어들이 마음 속에서 자리 잡는 순간 그가 비트플렉스에 쏟아 부은 애정과 노고가 어떠했을지 비로소 짐작되기 시작했다. 때론 백 마디의 말보다 한 줄의 시가 더 많은 의미와 내용을 담을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제서야 조 회장의 목소리에서 느꼈던 섬세함과 비트플렉스 건물에서 맡았던 경이로운 향기의 연유에 대해 깨닫게 됐다. 이 건물을 지은 사람은 시를 쓸 줄 아는 사람이며, 그는 마치 한 편의 시를 짓듯 한 층 한 층 섬세하게 층수를 채워나갔던 것이다.
“전문적으로 시를 쓰는 시인은 아니지만, 즐겨 읽고 또한 자주 쓰는 편입니다. 시는 머릿속에서 떠도는 많은 생각들의 함축이자, 농축이라 할 수 있겠지요. 수천수만에 이르는 고객들의 목소리가 그런 시어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트플렉스를 진행하는 동안 그 목소리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고 새로운 가치와 실질적 요구의 접점을 찾아내는 것. 그건 마치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비트플렉스의 첫 번째 경영철학인 역지사지(易地思之)도 그렇게 탄생한 것이기도 하고요.”
세상을 원고지 삼은 시인
조준래 회장은 좀 특이한 시인이다. 고즈넉한 작업실, 단아한 책상 앞에 앉아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원고지 삼고, 자신의 가슴에 고인 열정을 잉크로 삼아 시를 쓰는 사람인 것이다. 끊임없는 도전과 실천 그리고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칠전팔기의 집요함이 저토록 단단하고 웅장한 시를 완성시켜줬던 것이다.“녹록치 않았던 지난 삶을 자양분으로 삼아 이 위치에 오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아니, 이겨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군요. 작은 수레를 하나 끄는 데도 그토록 많은 땀을 흘려야 하는 법인지라, 제 삶을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데에도 큰 힘이 되어준 분이 있었지요. 그 분은 바로 저의 선친입니다.”
조 회장의 선친은 정치가 조철제 선생이다. 철기 이범석 장군과 민족청년운동을 함께 한 선친은 좌우의 이념 갈등이 극심했던 시절에 입신출세를 위해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해 초지일관 정도를 지키셨던 참 정치인이셨다.
“어렸을 때부터 나라를 위해 해야 할 일에 대해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선조와 선친을 뵈며 자긍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지요.”
선친인 조 선생이 가지고 있던 강직함과 애국심은 조 회장의 용맹스럽고도 섬세한 감각으로 이어지게 됐다. 호불호가 뚜렷하고, 승부욕이 강하되 주위를 둘러볼 줄 알고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그의 성격의 근간에는 이렇듯 ‘핏줄’의 뜨거운 역사가 흐르고 있었던 셈이다. 비트플렉스의 경영철학 역시 선친의 가르침과 가훈으로 가득 차 있다. 역지사지는 선친의 철학이었고, 화이부동(和而不同)은 그의 집안에 자리 잡고 있던 가훈이었다. 조 회장은 이 두 가지 가치를 진정한 리더십이라고 믿고 있다.
“함안 조가(家)의 백세청풍(百世淸風), 영겁의 세월을 지나도 오염되지 않는 화이부동은 무조건 반대가 아닌 화음을 이루는 다름으로 조화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이끌어낸다고 믿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리더십이 아닐까요.”
시를 쓰는 건축가, 사람과 역사를 돌볼 줄 아는 사업가, 조준래 회장의 꿈과 도전은 비트플렉스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는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보듬어 줄 수 있는 미래의 자본주의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