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의 숨은 조력자, 고향 발전에 솔선수범

재력과 덕망을 갖춘 기업가이자 本이 되는 삶의 모델, 이영웅 회장

2011-06-02     취재_박은경 기자

   
김해 주촌면 천곡리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기업인 이영웅 회장의 김해 사랑은 남다르다. 지금의 김해시가 있기까지 고향과 경남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솔선수범해온 실천가 이영웅 회장을 만나, 고향을 생각하는 ‘진정한 마음(眞心)’으로 향우들의 구심적 역할 속에서 본(本)이 되어온 그의 삶을 조명해 보았다.

자랑스러운 김해시 출향인, 이영웅 회장

“찬란한 가야문화의 발상지인 김해는 수로왕릉, 구지봉, 여기저기 발굴되는 가야 토기 등 곳곳의 수많은 문화 유적과 유물이 산재해 시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박물관이자 보물이다”라고 말하며 김해시의 자랑으로 인터뷰를 시작하는 이영웅 회장의 눈빛에는 김해시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가득하다.
김해 주촌면에서 태어나 14살에 부친을 여의고 어려운 가정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학업에 정진해온 이영웅 회장은 국립체신대학을 졸업한 뒤 1963년 한국통신공업(주)에 입사하여 중앙전기공업 상무이사, 공장장을 역임했으며 1984년 성화통신을 설립했으며 현재 연 매출액 1,000억 원에 이르는 6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성실 납세자로 재정경제부장관 표창을 두 번이나 받았으며, 기업경영을 통해 지역발전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2002년 세종경영인상 수상 및 부산외국어대학교 명예 경영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대한세팍타크로(족구) 협회장 및 세팍타크로국제연맹 부회장, 아시아연맹 부회장을 맡은 이 회장은 특히,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비인기 종목이었던 세팍타크로 선수단을 전폭 지원하여 남자팀 금메달, 여자팀 동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었으며 2004년 체육훈장(맹호장, 제433호 노무현 대통령), 스포츠강국 발전 공적 감사패(이연택 대한체육회장)를 수상했다.
연세대 경영대학원, 세종대 경영대학원을 수료한 이영웅 회장은 재경 경상남도시군 향우회 및 연합회 초대회장으로 재경 경상남도 도민회을 창단한 초대회장이며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김해 중학교 총동창회 회장 등 다양한 공겭瑩汰?역임했으며 현재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고향의 발전과 향우들의 화합을 위해 뒤에서 힘을 실어주는 숨은 조력자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김해 향우의 구심체로, 지역 발전의 숨은 주역이 되다

   
“어린 시절 김해 그 곳의 물을 마시고 자라고 배우며 꿈을 키웠다”고 말하며 고향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이영웅 회장은 “큰 뜻과 희망을 품고 출향했던 수많은 김해 시민들이 수도권 일원의 각계 각 분야에서 긍지와 자부심으로 생동감 있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들의 관심과 참여를 독려하여 고향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다”고 덧붙인다.

전국 각지의 출향인 뿐만 아니라 재향 김해시민들까지 아우르는 구심체로, 김해향우회를 발전적 친목 모임으로 승화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해온 이영웅 회장은 지역의 장학 사업을 선도적으로 추진해온 인물이자 지역개발사업이 유치되고 활성화 될 수 있도록 노력한 숨은 주역이다. 또한 김해시민뿐만 아니라 상경한 경상남도 도민들이 정을 나누고 정보를 교류할 수 있도록 재경 경상남도시군 향우회를 창단한 주역이도 하다.
고향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이 회장은, “향우들이 서로들 가슴을 열고, 서로들이 용서하고, 부르며 대답도 하고, 인정도 품앗이라는데 혹시나 가까이 살면서도 멀어졌던 사람들과 서로 정을 나누고 정보를 교류할 수 있도록 노력해 왔다”고 말한다. 고향 김해 향우들과 경남인들의 삶을 하나로 꿰매고 정과 정보를 교류할 수 있도록 촉매제 역할을 자처했던 이 회장의 숨은 노력이 오늘의 김해를 만드는 원동력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중국사상가 노신은 처음부터 길은 없다. 단지 사림들이 지나고, 또 다녀서 생긴 것, 그 것이 곧 길이다. 앞으로도 향우들과 함께 고향의 향수를 달래고, 교향을 위해 솔선수범하며, 앞으로도 선배는 끌어주고 후배는 밀어주는 재경향우들의 구심체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재력과 덕망을 갖춘 포용력 있는 기업가로

   
지금의 한국의 정보통신산업은 세계적 수준이지만 이영웅 회장이 이 분야를 개척해 나갈 1980년대 당시만 해도 모든 제품을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었으며, 기술 수준 또한 많이 낙후되어 감히 초고속 정보통신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물론이고 전화 가입자를 확대하는 것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통신망의 ‘선진화’ 사업에 참여하기로 하고 1984년 서울 독산동에 있는 신발공장의 한 구석을 임대하여 10여명이 채 못 되는 인력으로 정보통신사업에 출사표를 던지게 된 이 회장은, 당시 대기업들도 개발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던 ‘PCM 단국장치’와 ‘중계 장치’를 전량 국산화하여 지금의 KT에 납품하게 되었다.

성화통신(주)는 또한 1985년 이스라엘의 첨단 정보통신장비 회사인 ‘테디란’사와 공동사업협약을 체결하여 국내 및 국제 통신망의 원활한 소통을 위하여 사운을 걸고 선진 기술을 접목한 ‘AD.PCM개발’에 성공하였다. 또한, 1990년부터는 초고속 통신망에 꼭 필요한 최첨단 전송 신호분배 장치 ‘DXC외 개발’을 위하여 이스라엘에 기술진을 파견, 1991년 당시 중동지역의 걸프전으로 모두의 우려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총성과 포화가 끊이지 않는 전쟁터에서 제품개발을 독려하여 ‘테디란’사의 책임자와 담판을 통해 제품의 조기 완성에 성공하기도 했다.

“세계 유수 회사들의 견제와 국내 대기업의 도전에도 밀리지 않고 꾸준한 매출을 기록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 유무선 전화 가입자 총 통화량의 약 49%가 성화통신(주)가 제조한 제품(DXC외)를 통하여 편리하게 음성과 데이터를 사용하고 있는데 자부심을 가진다”고 말하는 이영웅 회장은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인생 선배의 입장에 서서, “마른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항상 긴장감을 가지고 겸손과 덕을 쌓으며 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기업인으로서 고향과 경남의 발전을 위해 솔선수범해온 이영웅 회장은 고향의 자랑스러운 출향인이자 본(本)이 되는 삶의 롤 모델이다. 고향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열정으로 앞으로도 숨은 조력자를 자처하겠다는 이영웅 회장을 통해 이 시대 고향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