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예방과 극복에는 국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계 기상방재분야 최고 권위 ‘킨타나상’ 수상한 소방방재청
백성들의 고통에 가슴 아파하며 한 푼의 구휼비가 아쉬웠던 세종, 그리고 그의 개혁정책을 못 마땅하게 여기던 신하들 사이의 격론은 꽤 치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세종은 자신의 부덕함을 인정하고 종묘에 나아가 고개를 숙이고 제를 올렸다. 엄숙하고도 성대했을 그날의 제사가 천재지변을 극복하는 데 얼마만큼의 기여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날이 세종이 장영실과 함께 펼친 조선 초기의 ‘과학 르네상스’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생명수호의 소중한 울타리
5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우리는 여전히 자연재해, 천재지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매년 폭우, 폭설, 태풍 그리고 가뭄 등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런 불행을 겪을 때마다 천재지변 뒤에 숨은 인재(人災)의 기미를 찾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들도 있다. 이는 마치 세종대에 임금의 사죄를 요구하던 신하들의 모습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칭찬에는 유난히 인색하나 약간의 허술함에도 비난과 원망을 서슴치 않는 언론과 여론. 그 한 가운데 서 있는 소방방재청과 기상청의 가슴앓이를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소방방재청이 세계 최고 수준의 재난관리시스템을 갖추고 눈부신 실적으로 국제사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2000년대 초반 우리는 불행한 재난을 많이 겪었다. 2002년 태풍 루사를 시작으로 이듬해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매미 등 기상재해를 비롯해 사망자만 192명을 낸 대구지하철 참사 등 인재도 끊이지 않았다. 이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1990년대 이후 일련의 대형사고들이 거의 해마다 되풀이 되었고, 이에 따라 국민들의 불안과 불신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는 ‘재난및안전관리기본법’ 등 관련 법률을 제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종합적인 재난관리 전담기구를 준비했다. 이 결과 2004년 6월1일 지금의 소방방재청이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디뎠고, 태풍, 집중호우, 지진, 폭설 등 천재지변은 물론이고 화재, 테러 등 각종 재난으로부터 국민의 소중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는 든든한 울타리를 갖게 됐다.
세종대왕의 마음을 새긴 그 후예들
출범한지 채 10년이 되지 않았지만 소방방재청은 명실 공히 재난예방과 대비, 대응, 수습 그리고 복구에 관한 총괄조정을 수행하는 컨트롤타워이자 재난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중앙기구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여전히 불친절한 것 같다. 이미 발생한 재난상황의 참혹함에만 집중할 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미리 대처하고 훈련하며 피땀을 흘렸던 이들의 노고는 너무 간단하게 간과해 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재난이 클수록 불합리한 평가의 수위는 더욱 높아지는 것 같다.
오히려 국제사회에서 그 노고를 더욱 값지게 평가받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지난 1월17일에는 UN ESCAP/WMO 태풍위원회 총회에서 우리 소방방재청이 기상방재분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킨타나상(Kintana Award)을 수상했다. 이는 매년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태풍재해 저감을 위해 기여하고, 공로가 큰 기관에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상이다.
“재난 예방과 극복에는 국경이 있을 수 없지요. 따라서 저희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사회를 무대로 태풍피해를 줄이기 위한 활동을 끊임없이 펼쳐 왔습니다. 특히 저개발 국가에 지원한 태풍재해정보분석시스템이 좋은 평가를 받았던 모양입니다.”
수상소감에 답하는 박연수 소방방재청장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는 국제사회에 기여한 보답으로 받은 상이 아니라, 우리가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개발한 기술과 정책들이 선진국 수준으로 평가받았다는 것이 더욱 기쁘다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재해관리분야에서 우리나라의 소방방재청의 위상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계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무슨 상을 얼마나 받았느냐, 혹은 국제사회에서 얼마나 위상이 높아졌는가는 부수적인 부분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지속적인 발전을 통해 재난과 재해를 효율적으로 대비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박 청장은 앞으로도 소방방재청이 개발한 각종 기술과 시스템을 태풍위원회 회원국에 보급하여 적용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특히 지난해 개최됐던 ‘제4차 UN 재해 경감 아시아 각료회의 방재실천계획’의 일환으로 ‘기후변화 적응을 위한 방재기술, 정보 공유 플랫폼’을 소방방재청 주도로 개발할 계획이며, 재해정보시스템을 9개 회원국으로 확대 구축하고 기능과 성능을 개선해 회원국 간 원활한 정보공유와 공동대응이 가능하도록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뿌리 깊은 유교사상과 한말까지 고집했던 쇄국정책으로 인해 과학과 현대문명에 늘 뒤쳐져 있었다고 자괴해 왔던 우리가 적어도 소방방재 분야에서 당당히 선진국임을 내세울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무한한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과 안전, 안심해도 좋습니다”
최근 들어 급격한 기후변화와 테러리즘의 확산으로 각종 재해와 재난이 주요 이슈로 부각하고 있다.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자 철저한 매뉴얼 시스템을 자랑하던 이웃나라 일본이 규모 9.0의 강진에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지는 광경을 목도하며 이에 대한 불안과 우려가 가중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은 우리의 힘으로 지킨다는 신념으로 차근차근 성실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비롯되는 천재지변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이를 사전에 대비하고 수습하는 시스템을 철저하게 갖춤으로써 보다 안전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요. 국민 여러분께서는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결코 격앙되지도, 장황하지도 않았다. 소방방재청의 각종 재해대비 정책을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차분한 신뢰가 묻어나왔다. 실제 그가 장담하는 ‘생명과 안전’을 위한 조치들은 소리가 낮으나 철저하고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이미 기상특보 및 재해발생 정보는 ‘재난문자방송 서비스’를 통해 실시되고 있으며, 향후 아날로그 방송의 전면중단 이후에는 디지털 방송 및 DMB방송을 활용한 재난방송 전달체계를 구축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기자는 문득 500여 년 전 종묘에서 무릎을 꿇었던 세종대왕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소리 없이 흘린 눈물은 재앙을 내린 하늘을 향한 원망이나 사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백성들의 고통과 비명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으며, 그것을 반드시 막아내겠다는 세종대왕의 의지였을 것이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강과 하천을 정비하고 물그릇을 키워 수해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며, 소방방재청의 소리 없는 도약과 헌신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상기후와 자연재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참혹한 광경 앞에서 좀 더 친절해야져야 할 것이다. ‘더 큰 피해’ 그리고 ‘더 많은 희생자’를 막아낸 세종대왕의 후예들을 떠올린다면 분명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