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액션은 고사하고 망신만 당한 국정원 ‘프로젝트’

국정원은 무리수, 청와대는 무대응, 정치권은 격앙된 목소리

2011-03-11     정대근 기자

지난 2월 하순 SBS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첩보액션 드라마 ‘아테나: 전쟁의 여신’이 막을 내렸다. 화려한 캐스팅과 높은 제작비로 방영전부터 기대를 모았지만,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방영 초반을 제외하고 내내 저조한 시청률로 고전했다. 드라마가 ‘첩보액션물’을 표방했던 것만큼 볼거리는 화려했지만 스토리는 엉성했고, 완성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첩보’는 조악하기만 했다. 드라마가 종반을 달릴 무렵 현실에서는 또 하나의 첩보액션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른바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무단침입 절도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정보기관인 국정원이 개입됐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실존하는 첩보요원들의 활동을 두고 큰 관심이 일어났다. 하지만 사건의 불법성 여부를 떠나 졸작 드라마보다 못한 완성도에 비난이 쏟아졌다. 액션은커녕 노련한 첩보기술 하나 없는 참으로 유치한 개그드라마에 불과했던 것이다. 

롯데호텔, ‘6분’의 미스터리

지난 2월16일 오전 9시27분. 서울 롯데호텔 신관 1961호에 검은색 정장을 차려 입은 세 사람이 들어섰다. 둘은 남자였고, 나머지 한 사람은 여자였다. 그들은 비상계단을 통해 19층으로 들어가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이 묵고 있던 숙소를 무단 침입했다.

당시 특사단원들은 이날 오전 10시로 예정돼 있던 이명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위해 숙소를 비운 상태였다. 그런데 특사단원 중 한 명이 돌아오면서 이들과 마주쳤다. 노트북컴퓨터를 만지던 침입자들은 방에 있던 노트북 2대 중 1대를 가진 채 유유히 복도를 빠져나갔다.
특사단원은 복도에 있던 호텔종업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호텔종업원은 2~3분여 뒤 19층 비상통로에 숨어 있던 침입자들을 찾아냈다. 침입자들은 훔쳤던 노트북을 돌려주고 다시 사라졌다. 호텔로비에 설치돼 있던 CCTV 영상에 따르면 이 모든 상황은 단 6분 동안 벌어졌다.
과연 이 세 사람은 누구였으며, 이들이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이 사건은 13시간 뒤 주인도네시아 한국무관인 육군대령이 112를 통해 신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남대문경찰서에 사건이 접수된 후 4시간 만인 17일 새벽, 국정원 직원이 경찰서를 방문해 수사상황을 물어본 뒤 보안유지를 당부했다. 이번 사건에 국정원이 개입됐다는 결정적인 정황증거인 셈이다.

국정원 왜 무리수 뒀나

이번 사건이 일파만파 커지는 가운데 국정원은 상식 밖의 대응으로 일관해 빈축을 샀다. 이번 사건의 책임자로 알려진 국정원 3차장은 2월25일 서울 여의도 한 호텔에서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간담회에 참석해 “최근 발생한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한다”면서도 “국익과 외교적 문제로 인해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여야 의원들은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와 내용에 대해 집중 추궁했으나, 3차장은 줄곧 “확인해 줄 수 없다”와 “업무와 관련된 부분은 무대응이 원칙이다”라는 말로 구체적인 답변을 회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정보위 민주당 간사인 최재성 의원을 비롯한 야당 의원들이 강하게 항의했으며, 공성진 의원 등 여당 의원들도 “국정원의 무성의한 대응은 국민에 대한 모독”이라며 호통을 쳤다. 이러한 의원들의 반발과 추궁에도 불구하고 3차장의 답변에 변화가 없자 의원들은 간담회 시작 20분 만에 집단 퇴장하고 말았다. 이날 간담회에는 국정원의 1, 2, 3차장 등이 참석했으며 원세훈 국정원장의 모습은 끝내 볼 수 없다.
한편 이번 사건으로 드러난 국정원의 전문성 공백과 인사난맥상이 큰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국정원 내부의 권력암투는 둘째치고서라도 명색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 정보기관인데, 요원들의 임무수행 능력이 너무 미숙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는 것. 지난해 이미 리비아에서의 미숙한 정보활동으로 큰 곤욕을 겪은 바 있다.

일각에서는 북한 관련 정보 수집 및 분석 능력이 과거보다 오히려 떨어진다는 지적마저 나왔다. 이는 정권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정원 내부 인사들이 대폭 교체된 것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체제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정권이 내부 정보유출을 엄격히 단속하고 있는 터라 소수 탈북자들의 증언이나 전언에 의존한 정보수집 활동을 펼칠 수밖에 없는 상황도 국정원의 전문성 약화를 부추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외부가 아닌 국정원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원세훈 원장의 지나친 성과주의와 인사정책 실패, 그리고 미흡한 조직운영 방식이 국정원의 잦은 ‘헛발질’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회 정보위 민주당 간사인 최재성 의원은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국방부와 국정원 간 갈등이 치열해지고 있다고 들었다”며 “이번에도 국가기관과 정치세력 간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경우가 아니냐”며 꼬집었다.

당청 갈등으로 옮아가는 ‘국정원사태’

정치권에서는 원세훈 국정원장을 문책해야 한다는 요구가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목소리에는 야당은 물론 여당 의원들도 가세하고 있어 향후 원 국정원장의 거취가 주목된다. 홍준표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2월23일 최고위원 및 중진의원 연석회의 석상에서 “이번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국제적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며 “국정원 쇄신을 위해 국정원장을 경질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최고위원회를 통해 “국정원 해임 문제를 떠나 이명박 대통령이 국정원 등 모든 국가기관을 제자리에 돌려놔 민주주의의 기초를 다져나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손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이 개인참모를 국정원장에 임명함으로써 국정원을 권력기관화 했고, 이에 국정원이 대통령과 권력에 충성을 다하기 위한 경쟁에 몰입할 수 밖에 없었다”며 이번 사건의 발생 원인제공처가 청와대임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원 원장에 대한 문책이나 경질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는 이번 사태에 국정원이 개입됐다는 의혹이 불거졌던 사건초기부터 “책임을 논할 문제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또한 여전히 청와대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국정원장은 물론 3차장의 문책에 대해 거론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향후 추이를 지켜본 후 사건의 파장이 잦아들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실무책임자에 대한 인사 조치를 취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국정원장의 경우 후반기 여권 내 권력구도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경질 등 최악의 조치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우세한 상황이다.
이렇듯 청와대와 국정원이 미온적이 태도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당청 간의 갈등으로 옮아가는 모양새다. 한나라당 지도부 입장에서는 이번 사건이 가져올 파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당 내부에서는 당장 2달여 앞으로 다가온 4.27재보선은 물론 내년도 총선까지 미칠 파장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나라당은 여러 경로를 통해 원 원장 경질을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사건을 깔끔하게 털고 가는 것이 당은 물론 정권 입장에서도 부담을 덜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판단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진화나선 양국, 국익 위한 이심전심

이번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정작 피해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인도네시아 정부는 연일 “문제가 없다”는 해명을 내놓고 있다.
지난 2월22일 인도네시아에서 발행되는 영자지인 ‘자카르타포스트’ 인터넷판은 하따 라자사 경제조정장관과의 인터뷰를 통해 “특사단 숙소 침입사건은 단순한 오해였다”고 보도했다. 하따 장관은 전날 대통령궁에서 열린 각료회의에서 “3명의 침입자는 방을 잘못 알고 들어온 호텔 손님이며 자기들 방인 1961호 대신 인도네시아 산업부 관리들이 머물던 2061호에 우연히 들어갔던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하따 장관은 “손님들이 열어본 노트북 컴퓨터에는 한국관리들에게 설명하려고 준비한 인도네시아 산업현황 프리젠테이션 자료가 들어있었다”며 “이와 관련한 어떠한 도난 사실도 없었으며, 특사단의 예정된 일정 또한 순조롭게 진행됐다”고 덧붙였다.

우리 외교부의 고위 당국자 역시 “이번 사건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는 것이 과연 국익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고려해 봐야 한다”며 ‘보도자제’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양국이 이번 사건에 대한 진화에 나섰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사건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보다 조용히 덮고 넘어가는 게 양국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배경에는 우선, 특사단 방문 성과에 양국이 모두 만족하고 있다는 점이 거론되고 있다. 2월15일 서울에서 열린 김관진 국방장관과 푸르노모 유스지안토로 인도네시아 국방장관 간 회담에 대해 인도네시아 측이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이 회담에서 국산 T-50 초음속 훈련기 수출도 사실상 성사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인도네시아 국방장관은 우리와의 방산협력에 대해 상당한 신뢰를 갖게 됐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인도네시아 정부 입장에서 볼 때 우리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얻는 실익이 훨씬 크다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인도네시아에서 우리는 6번째로 큰 교역 상대국이다. 더구나 우리 방산업체로부터 상륙함, 차륜형 장갑차, 통신장비 등 각종 군사장비를 지속적으로 도입해 국방강화를 도모해 온 바 있다.

여기에 이명박 대통령과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이 서로를 형제라고 부를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두 대통령의 관계가 사건의 조기수습에 크게 기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특사단이 부산신창만 방문할 때 대통령 전용기와 공군헬기 등을 활용할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유도요노 대통령은 최근 극비리에 작성한 2025년 인도네시아 경제개발 계획을 이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