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사상의 대부’에서 ‘북한 실상 파헤치는 비판자’로

황장엽 前 북한 노동당 비서의 파란만장한 삶

2010-10-11     정대근 기자

지난 10일 사망한 황장엽 前 비서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당 국제담당 비서 등을 지내다 1997년 2월 김덕홍 전 북한 여광무역 사장과 중국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한 뒤 그 해 4월 필리핀을 거쳐 입국했다. 그는 남측으로 망명한 북측 인사 중 최고위급이다.

황 前 비서는 1923년 함경북도에서 출생해 김일성종합대학, 모스크바종합대학 등에서 수학했으며, 1954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활동하다 북한의 유일사항체계인 주체사상의 완성을 주도한 ‘주체사상의 대부’로 불린다.

그 후 1970년 당중앙위원, 1980년 당비서, 1984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1987년 사회과학자협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신임을 받아 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세습과정에서 이른바 ‘김정일 백두산 출생설’을 전파하는 등 후계구도 확립 과정에서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국제세미나 참석차 일본을 방문한 뒤 귀국을 위해 베이징 북한대사관에 머물던 중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하자, 남북 당국은 물론 국제사회에 큰 파문이 일었다.

황 前 비서의 망명 신청이 알려진 다음날 북한 외교부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며 “만일 그가 북경 한국대사관에 있다면 분명 납치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황 前 비서의 망명 의사가 확인된 뒤에는 “변절자여 갈 테면 가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북한은 김일성 주석 사망 뒤 식량난 등 이른바 ‘난의 행군’ 기간 중이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황 前 비서의 망명이 북측 고위층의 잇따른 이탈과 북한 정권의 붕괴의 시작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황 前  비서는 망명 이후 줄곧 직설적인 어법으로 북한체제를 비판해 왔다. 김일성 주석의 지도자 자질은 인정한 반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서는 “정치가로서 빵점”이라고 혹평했고, 지난해부터는 북한의 ‘3대 세습’ 움직임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내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기초를 다진 주체사상이 김 부자 숭배를 위한 봉건사상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하며 “개인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사회정치적 생명은 무한할 수 있다”는 주체사상의 사회정치적 생명관을 “수령 절대주의”로 왜곡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지난달 30일 <자유북한방송>의 ‘황장엽의 민주주의 강좌’에서 “개인은 죽어도 집단은 영생합니다”라고 강조하는 등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 정치철학을 중시했다.

이로 인해 북한으로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실제 2006년 12월에는 빨간 물감이 뿌려진 사진, 손도끼, 협박편지가 든 우편물이 배달되었으며, 지속적인 살해 위협을 받아왔다.

급기야 지난 4월에는 그를 살해하라는 지령을 받고 북한에서 남파된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총국 소속 간첩 2명이 체포돼 구속되기도 했다. 이후 경호팀은 국무총리보다 높은 등급의 경호시스템을 통해 24시간 밀착 경호해온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