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스 협력자 사형 선고

2010-09-10     신혜영 기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괴뢰정권을 수립해 나치스 독일에 협력했던 비드쿤 아브라함 레우리츠 욘쇤 크비슬링(Vidkun Abraham Lauritz Jonssøn Quisling, 1887년 7월18일~1945년 10월24일). 1945년 오늘 전범재판에서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노르웨이의 퓌러(Führer, 총통:히틀러의 칭호)로 불렸던 크비슬링은 노르웨이의 군사사관학교 생도중 가장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후 노르웨이군에서 소령까지 진급했고, 1931년부터 1933년까지는 농민당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1933년 5월17일 크비슬링은 지방 검사 요한 베른하르드 요르트와 함께 민족 단일당(Nasjonal Samling)을 창당했다. 단일당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정당을 본 따서 반 민주주의 노선을 취한 지도자 중심의 정당이었다.

크비슬링은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왕과 정부가 북쪽으로 피난 간 혼란을 틈타 뉴스 시간에 세계 최초로 쿠데타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크비슬링은 독일이 자신을 지지해 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노르웨이를 직접 지배하기를 원하던 독일은 요제프 테르보펜(Josef Terboven)을 노르웨이의 통치자로 앉힘으로써 크비슬링이 수립한 정부는 닷새 만에 해체된다. 그 후 1942년 크비슬링을 총리 대통령(총리에 해당)으로 임명, 1943년 2월1일부터 직책을 맡게 했다.

그러나 크리슬링은 독일 점령하의 노르웨이에서 총리 대통령직을 지내다 독일의 패전으로 대전이 끝나면서 1945년 9월5일 체포되고 같은 해 9월10일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10월24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당시 망명 정부는 나치독일의 점령기간 동안의 나치협력자들에 대한 종전 후 재판을 대비해 사형제도를 부활시켰었다.

그의 이름 ‘크비슬링’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반역자의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