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종목 쇼트트랙 ‘뜨거운 감자’되다
담합 여부 둘러싼 팽팽한 진실게임, 과연 그 승자는
견고했던 빙상계가 ‘짬짜미’ 이른바 담합 파문으로 연일 몸살을 앓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 3월24일 안현수 부친인 안기원 씨가 안현수의 팬카페에 하나의 글을 올리면서 시작됐다. 안 씨가 작성한 글에 따르면 이정수가 2010 세계쇼트트랙 선수권에서 부상으로 개인전에 출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외부의 강압에 의해 출전하지 못했다는 것. 안 씨는 “부상당한 선수가 있을 경우 그다음 순위의 선수가 출전한다고 공지를 해놓고 4위를 한 김성일 선수 대신 5위를 한 곽윤기 선수를 출전시킨 일도 위범을 저지른 일”이라고 주장했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25일 오전, 빙상연맹 측은 이정수가 직접 작성한 사유서를 공개하며 안 씨의 주장을 강하게 반박했다. 빙상연맹은 보도자료를 통하여 “이정수와 대표선발전에서 4위를 한 김성일이 개인전에 출전하지 않은 것은 자의이다. 김성일은 계주에 중점을 두고자 개인종목을 출전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고 항간에 떠도는 빙상연맹 부조리에 대한 소문을 일축했다.
사유서를 둘러싼 진실여부 논란은 갈수록 가열됐다. 때 마침 시종일관 침묵으로 묵비권을 행사하던 이정수가 입을 열었다. 이정수의 발언은 충격적이었다. 자필 사유서 역시 전재목 코치 강압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것. 진흙탕 싸움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파문이 확산되자 대한체육회(KCC)가 칼을 빼 들었다. 연맹은 지난 3월30일부터 4월7일까지 특정감사를 실시,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결과를 도출했다. 대한체육회는 감사 결과를 토대로 이 같은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지난해 4월 열린 2009-2010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선발전 마지막 경기였던 3,000m 경기 직전 코치와 선수들이 모인 가운데 선수들이 랭킹 5위 안에 들어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고, 국제대회에서 모두 메달을 획득할 수 있도록 담합을 한 사실을 확인했다.” 바로 여기에서 ‘짬짜미’ 논란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는 한 때 죽마고우였던 이정수와 곽윤기가 있다.
영웅에서 역적으로 ‘롤러코스터’ 인생 화제
깜짝 금메달을 안겨준 스포츠계 귀요미 이정수. 그는 분명 밴쿠버동계올림픽 쇼트트랙 2관왕에 빛나는 화려한 별이었다. 누가 잘하고 잘못하고 가리는 일을 떠나 이번 쇼트트랙 짬짜미 파문은 밴쿠버의 영웅 이정수로서는 굴욕적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일까. 침묵을 일관하던 이정수가 4월13일 기자회견을 자처했다. “쇼트트랙선수로서는 가장 중요한 대회가 바로 대표 선발전이다. 스케이트에 입문한 후 오직 올림픽 메달만을 위해 열심히 달려왔는데.” 이정수가 조심스럽게 꺼낸 첫 마디였다. 기자회견 내내 이정수는 국가대표 선발전 당시 승부조작 의혹을 강력히 부인했다. 이정수는 이어 밴쿠버동계올림픽 당시 전재목 코치가 1,000m 종목을 양보하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새로운 사실도 공개했다. 이정수는 “동계올림픽 때 전재목 코치가 나와 곽윤기(연세대), 김성일(단국대)을 불러 놓고 곽윤기에게 1,000m 출전을 양보하라고 이야기했다. 전 코치가 ‘대표선발전 때 도움을 받았으니 양보하라’는 말을 해서 고민을 많이 한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1,000m를 탈 경우 세계선수권대회를 포기하라며 협박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고 그간의 힘들었던 심경을 토로했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는 이정수의 아버지인 이도원 씨와 이정수를 지도했던 이준호 KBS 해설위원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아들의 모습이 안쓰러운지 줄곧 착잡한 표정을 짓던 이 씨는 파문을 조사하기 위해 꾸린 진상조사위원회의 신뢰성에 대해 지적했다. 이 씨는 “빙상연맹에서 발표한 진상조상위원회가 중립적이지 못하다. 객관적인 조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인데, 이들을 믿고 조사를 받으라니. 따라서 우리는 조사위원회 구성에 변화가 없다면 조사에 절대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경히 대처할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곽윤기 “정수야 네가 먼저 도와달라며”
지난 4월20일. 서울 목동아이스링크에서는 이번 사건의 또 다른 주인공인 쇼트트랙 대표팀 전재목 코치와 곽윤기, 송재근, 전 이정수 개인코치 등이 취재진을 맞이했다. 사건에 연루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이 직접 기자회견까지 자처해 입장을 표명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절실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정수의 폭탄발언에 전재목 코치는 황당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날 전 코치는 자신의 의견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전 코치의 주장에 따르면 지난해 쇼트트랙 대표선발전 1,000m 준결승을 앞두고 이정수로부터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이후 곽윤기의 동의를 얻어 합의하에 경기가 치러졌다는 것. 이는 이정수가 주장한 말과는 상반된 내용이었으며, 선발전 담합을 전 코치 스스로 인정한 셈이 됐다.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내내 전 코치는 좀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전 코치는 “처음 곽윤기가 동계 올림픽 개인전에 출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정수의 부탁을 거절했다. 하지만 이정수는 도와주기만 하면 개인종목은 곽윤기에게 전부 양보하겠다고 말했다. 너무 간절한 나머지 곽윤기 역시도 이를 승낙했다”고 이야기 했다. 그는 이어 “이후 이정수가 선발전 때 한 약속이 기억 나지 않는다며 밴쿠버동계올림픽에서 출전을 강행했다. 솔직히 황당하고 어이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이정수와 곽윤기가 서로 논의하게 한 후 올림픽 1,000m는 곽윤기가 출전하고 세계 선수권은 이정수가 나가기로 한 것이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이날 전 코치보다 주목을 받은 건 곽윤기였다. 쇼트트랙 5,000m 남자 계주 부문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후 시상대에 올라 그룹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시건방 춤’을 완벽히 소화하던 ‘깝윤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시종일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두운 표정으로 한 마디 한마디를 이어갔다.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곽윤기는 “대표 선발전 1,000m 준결승 당시 코치의 지시를 받고 이정수를 돕는 경기 운영을 했다. 만약 지시가 없었다면 이정수도 충분히 추월할 수 있었지만 친구인 정수의 약속을 믿고 결국 게임을 포기했다”고 자신의 입장을 해명했다. 이어 곽윤기는 올림픽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며 “정수가 고집을 부려 출전한 1,500m에서 금메달을 땄고 이후 1,000m에서 정수를 빼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대표선발전 당시에도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건지 몰라 한참을 고민했다. 솔직히 내가 올림픽 개인전 전 종목을 타게 될 줄 알았는데. 당시에 양보한 것이 너무 속상했다”고 이야기했다.
‘편 가르기 싸움’ 제3자 성시백 가세
1라운드에 이어 2라운드까지. 한창 시끌벅적하던 쇼트트랙 짬짜미 사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성시백(연세대). 출중한 외모로 ‘섹시백’이란 별칭을 얻으며 많은 관심을 받은 성시백은 말 한마디 잘못했다 졸지에 ‘배신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다. 딱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꼴이였다.
성시백은 자신의 미니홈페이지를 통하여 지난해 대표선발전에서 동료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이정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동영상을 올리며 곽윤기의 입장을 옹호했다. 성시백은 지난 4월18일 오후 자신의 미니 홈페이지에 ‘이정수는 과연 1,000m 준결승에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았나?’라는 제목의 동영상과 글을 게재하며 “한쪽의 입장만 보지 마시고 이런 영상도 봐주셨으면 합니다. 결코 누구의 편을 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빙상 문제가 하루 빨리 해결됐으면 하는 선수의 입장에서 올린 글입니다. 이 글조차도 왜곡하지 말고 바라봐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남겨 누리꾼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성시백이 남긴 글은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동료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이정수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셈이었다. 성시백은 “동영상을 보시면 다들 아시겠지만 마지막 바퀴에서 이정수가 넘어질 뻔했는데 이를 곽윤기가 손으로 받쳐주었습니다. 만약 곽윤기가 이정수를 도와주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면 절호의 기회에 치고 나가지 않았을리가 없습니다”고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결국 곽윤기는 이정수를 밀어주려다 그 힘에 자신이 뒤로 밀리게 됐고, 그로 인해 넘어졌다는 것.
줄곧 이정수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표명한 성시백은 네티즌들을 의식했는지 글 말미에 “단순히 정수나 윤기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제가 느끼고 봐왔던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면서 “제가 하는 말에 어떠한 보탬이나 재해석을 하지 않았으며 한다”고 당부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성시백의 이러한 행동은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격이 됐다. 동영상을 본 네티즌들은 ‘영상을 보니 더욱 확실해 졌다. 어딜 봐서 곽윤기가 도움을 줬다는 건지’, ‘본질은 빙상연맹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글 같은데 왜 영상은 올렸냐’, ‘성시백 너나 똑바로 잘해. 어차피 너도 다 똑같은 쇼트트랙 인간 아니냐’, ‘ 곽윤기를 옹호하는 글이 아니라면서 누가 읽어도 곽윤기는 옹호하고 이정수는 못깎아 내려 안달난 글이네. 돈이라도 받았냐’라며 경솔한 성시백의 행동을 맹비난했다.
“우리 화해 했어요”, 거짓말 같은 화해
초등학생 다툼도 이처럼 유치하지는 않다. 결론이 나오지 않는 진실공방 속에 상대방 헐뜯기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 지난 4월23일엔 문화체육관광부-대한체육회-빙상연맹으로 구성된 공동조사위원회의 감사 결과가 만천하에 공개됐다. 조사위원회는 “이정수측은 부인하고 있지만 선발전 당시 정황상 담합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며 이정수와 곽윤기에게 1년 자격정지, 전재목 코치에게는 영구제명을 권고했다. 자격정지 최소 1년이란 중징계는 이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며칠 후면 상벌위원회가 열린다는 점을 인식한 이정수와 곽윤기는 급한대로 때 아닌 화해모드를 조성했다. ‘우리 화해했어요’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26일에는 약식 기자회견을 열었다.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한 이정수의 자택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이정수와 곽윤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화해’를 거듭 강조했다. 두 사람은 극도로 말을 아끼면서도 눈빛만 봐도 통할만큼 절친했던 사이가 이번 사건으로 인해 멀어졌다며 그간 쌓인 오해를 모두 풀었다고 이야기했다. 이정수는 “좋지 않은 일을 겼었다. 24일 아는 형의 중재로 친구인 윤기를 다시 만나게 됐다. 솔직히 처음엔 어색했는데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오해가 있었던 부분에 대해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에 뒤질세라 곽윤기도 “친구끼리 화해의 자리가 민망하기도 했는데 이번 일로 우정이 더욱 돈독해 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또 이들은 “앞으로 더 좋은 선수가 되어 그간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해 보답하고 싶다”며 향후 지속적인 선수활동에 대해 넌지시 언급했다.
특히 이날 곽윤기의 모습은 단연 압권이었다. 사건 발생 직후부터 줄곧 이정수의 담합을 강력히 주장해오던 곽윤기는 이날만큼은 ‘담합’을 인정하지 않았다. 곽윤기는 담합여부에 대해 “담합은 없었다. 이정수가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도와준 것”이라고 주장을 번복해 보는 이들을 적잖이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누가 봐도 찜찜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 이상한 ‘사과’였다.
3년 정지, 과하다 VS 부족하다
마침내 심판의 그날이 찾아왔다. 지난 4월29일 대한빙상경기연맹 쇼트트랙 상벌위원회가 열렸다. 사건 당사자와 관계자들이 모두 모여 다시 한 번 진술을 마친 후 몇 시간 쯤 흘렀을까. 상벌위원회가 내린 결론이 공개됐다. 결과는 충격 이상이었다.
이날 두 선수와 전 코치에게 내려진 징계는 조사위원회의 권고사항보다 훨씬 크고 가혹했다. 일벌백계의 의미를 담아 이정수와 곽윤기에게는 3년 자격정지가 내려졌고 전재목 코치는 처음과 같이 영구제명을 통보받았다. 이는 연맹측이 대한체육회의 감사와 쇼트트랙 공동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가 변함없이 ‘담합 있었음’으로 나오는 만큼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담합은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또 상벌위원회는 감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정수와 곽윤기가 짬짜미 파문에 대해 반성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서로의 결백만 주장해 괘심죄가 추가, 3년이라는 중징계 처분을 내렸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정수와 곽윤기는 오는 2013년 대표선발전 금지는 물론,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도 출전할 수 없게 됐다. 선수생활이 끝장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에 이정수 측은 “자격정지 3년이면 선수생활을 그만두라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며 어른들의 잘못으로 어린 선수들이 받는 조치가 너무 가혹하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준호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코치는 이정수 선수 징계와 관련해 이의신청은 물론, 더불어 법적 소송도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코치는 지난 5월6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의신청은 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이의신청도 빙상연맹에 하는 것 아니냐”며 한국빙상경기연맹을 불신임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어 이 코치는 “빙상연맹, 대한체육회, 문화체육관광부 등에 탄원서를 제출할 것이고, 소송이 필요하다면 소송도 불사할 것”이라고 이번 징계 처분에 강경 대응할 것을 재차 강조했다.
사실상 이번 결정은 한창 때인 이들에게 선수생명 끝을 의미한다. 때문에 징계를 두고 찬반 의견이 선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네티즌들 일부는 ‘너무 가혹하다’, ‘장차 우리나라의 쇼트트랙을 책임져야 할 선수들에게 3년 간 정지라니’, ‘두 선수 모두 피해자이다. 아무런 걱정 없이 운동만 열심히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등 두 선수를 향했던 비난이 순식간에 동정론으로 바뀌었다. 또 다른 네티즌들은 ‘담합을 했다는 사실이 버젓이 밝혀졌는데도 고작 3년이라니. 징계를 더 늘여야 한다’, ‘저런 선수들은 분명 또 다시 짬짜미를 할 것’, ‘전재목 코치랑 같이 영구제명 시켜라’ 등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던 만큼 더욱 엄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간 빙상스포츠와 빙상연맹은 실력보다는 학벌과 지연, 권력이 중요하게 작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정정당당하다’의 뜻을 망각한 그들을 심판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일까. 뿌리가 썩을 대로 썩은 나무에서 어찌 잎이 돋아날 수 있겠는가. 한심하고 개탄스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