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덕 자본가가 쌓아올린 사회공헌의 위업

록펠러재단, 연구소 설립, 평생 5억 5,000만 달러 환원

2010-03-12     김미란 기자

전 세계에 걸쳐 석유 및 천연가스 탐사, 생산, 공급, 운송, 판매 등 에너지사업 전 부문에 걸쳐 활동하고 있는 세계 최대 정유회사 엑슨모빌(Exxonmobil)은 2007년을 기준으로 상류부문에서는 석유, 천연가스, 석유제품 생산으로 265억 달러의 수익을 달성했다. 또한 지구온난화 등 환경문제와 에너지 개발의 어려움이 심각해지자 오일샌드와 같은 새로운 에너지 개발과 함께 열병합발전 등 발전방식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또한 카타르, 앙골라, 노르웨이, 카자흐스탄, 네덜란드 등지까지 진출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하류 부문에서는 화학부문 46억 달러를 포함해 141억 달러의 매출을 달성했다. 이는 110억 배럴 상당의 석유 비축과 생산, 그리고 전세계 25개국 45개에서 1일 560만 배럴을 처리하는 정유공장 가동을 통해 가능한 규모다.
엑슨모빌은 2030년 에너지 수요전망에서 2005년 대비 40%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한 온실가스 저감에 대한 전 세계적인 압력과 화석연료 고갈에 대한 우려가 높아져도 석유, 천연가스, 석탄 의존도가 80% 이상 될 것으로 전망한다.
엑슨모빌은 앞으로 탐사, 개발, 생산을 확대하는 상류부문 강화에 초점을 맞춘다는 방침이다. 전체 이익의 70% 이상이 상류부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오일샌드와 심해 자원개발 등 새로운 기술개발에 필요한 R&D 투자를 더욱 확대할 계획이다. 이 밖에도 엑슨모빌은 사회적 역할 강화를 위해 기업시민으로서의 역할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기업시민이란,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기업의 역할을 의미하는 것으로, 엑슨모빌은 이에 대한 경영전략으로 ‘기업도 사회 구성원의 하나로서 그 권리와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엑슨모빌은 에너지 기업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수요의 지속적인 증가에 따른 경제, 환경, 사회적 측면에서 그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엑슨모빌은 경제적 이익과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이뤄나가고 있다.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 미국 내 정유소 95% 지배
엑슨모빌은 엑슨모빌의 모태인 스탠더드오일의 설립자, 미국 정유 업계를 지배한 독점 자본가이자 노조 탄압을 서슴지 않는 악덕 자본가로 악명을 날리던 인물, 존 록펠러(John D. Rockfeller)에 의해 탄생했다.
1839년 미국 뉴욕주 리치퍼드에서 태어난 록펠러는 1859년 친구와 함께 상사회사를 설립하고, 1863년 클리블랜드에 부업으로 정유소를 설립했다. 그런데 이것이 번창해 1870년 자본금 100만 달러로 오하이오스탠더드석유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의 사장이 된 록펠러는 타 회사의 흡수·운임할려계약 등의 방법으로 급속하게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1882년 미국 내 정유소의 95%를 지배하는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를 설립한 록펠러. 하지만 1899년 오하이오 주재판소로부터 셔먼독점금지법 위헌 판결을 받게 됐다. 이에 회사는 지주회사를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던 뉴저지주에 지주회사인 뉴저지스탠더드석유회사를 설립해 석유업계 지배를 계속했다. 이후 자국 내 뿐 아니라 해외에도 유전을 소유한 거대한 회사로 성장했다.
그렇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회사는 1911년 미국 연방최고재판소로부터 같은 이유로 해산명령을 받고 결국 회사는 해체되었다.
이후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에 속하였던 몇몇 회사들은 각기 모빌오일, 콘티넨털오일, 아모코 등의 회사를 차려 사업을 계속하고 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회사들은 20세기 후반 거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엑슨+모빌, 세계 최대 석유기업으로 탄생
엑슨모빌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는 1888년 영국에서 석유를 판매하기 위해 앵글로아메리칸 오일컴퍼니가 되는 독일 회사의 지분을 인수해 대주주가 되었으며, 1898년에는 캐나다의 대표적인 석유회사 임페리얼오일리미티드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이후 1926년 에소라는 상호를 여러 제품과 계열사들에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다른 스탠다드오일 회사들이 소송을 하는 바람에 엑슨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계열사들도 엑슨의 이름을 사용했다. 하지만 외국 계열사는 에소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후 세계 80개국 이상에서 사업 활동을 하면서 70개 이상의 정유 시설을 운영하다가 1999년 말 스탠더드오일 후예 기업의 하나인 모빌(mo bil)을 흡수해 지금의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이로써 엑슨모빌은 로열더치셸그룹을 누르고 세계 최대의 석유기업이 되었다.
엑슨과 모빌이 합병하기 이전에 세계 석유업계는 7개의 주요 국제 석유회사들이 장악했다. 미국의 엑슨, 모빌, 걸프, 셰브런, 텍사코 등 5개사와 영국의 브리티시석유(BP)와 영국-네덜란드계열의 로열더치셀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대규모 자본을 앞세워 석유의 생산·유통·정제·판매 등을 통합한 일관조업 회사로서 세계 석유산업을 지배해 온 이들 7대 메이저는 1965년 하루 1,692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 서방측 세계 원유생산량의 68%를 기록한 바 있으며, 한때 중동 석유생산의 99% 이상을 장악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전세계에 걸쳐 석유 및 천연가스 탐사, 생산, 공급, 운송, 판매 등에 관여하면서 거의 210억 배럴에 상당하는 석유를 비축하고 있는 엑슨모빌은 정유시설에서는 매일 600만 배럴 이상을 처리한다. 그리고 엑슨, 에소, 모빌의 브랜드를 통해 118개국 4만 5,000소의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판매하기도 하며 석탄 채굴, 광물, 전력 생산 기업들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미국의 석유 왕’ 록펠러, 사회 공헌에 눈 돌리다
엑슨모빌의 창립자 존 록펠러는 20세기 초 ‘미국의 석유 왕’으로 불렸다. 록펠러는 잔인했다. 미국 석유의 95%를 독점한 그는 무자비하게 타 기업을 흡수·통합하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록펠러를 악덕 기업가라 부르고 엑슨모빌을 ‘악덕기업’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그런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잔인하게 회사를 운영해나갔다. 그에게는 오로지 ‘돈’ 뿐이었다.
그는 거침없었다. 30세에 100만 달러를 모았고, 43세에는 미국 최대의 정유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53세에는 세계에서 최고의 부자가 됐다.
하지만 이 악명만을 유지했다면 세계 최대 정유 회사 엑슨모빌은 없었을 것이다. 경영자의 자리에서 물러나 자선사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시카고대학 설립을 위해 1890년부터 1892년까지 6,0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으며 이후에도 3억 5,000만 달러를 기부했다. 록펠러는 이후 록펠러재단·일반교육재단·록펠러의학연구소 등을 설립했다.
잔인하게 회사의 규모를 키워온 만큼 록펠러는 훗날 자신의 이름을 딴 사회봉사 재단을 설립해 사회공헌의 선구자라는 또 다른 모습을 역사에 남기게 된 것이다.
록펠러의 가문은 미국 사회에서 전설적이다.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돼 이주민들이 몰려들던 서부 시대 개막 10년 전인 1839년 7월 뉴욕 북부 리치포드에서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록펠러.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가끔씩 목돈을 벌어오는 아버지를 보면서 돈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키웠다.
이렇게 성장한 록펠러는 후에 자신의 자녀와 손자들에게도 금전교육을 엄격히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나중에 맨해튼 은행장을 지낸 데이비드에게 록펠러는 아이였을 때 일주일에 용돈 25센트를 주고 지출 내용을 빼놓지 않고 노트에 기록하도록 했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일주일 동안 기록한 노트를 보며 손자와 함께 용돈을 결산하곤 했다. 후에 데이비드는 당시에 할아버지인 록펠러가 이런 말을 했다고 밝혔다. “네가 사용하는 용돈은 결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여러 사람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너에게 작은 돈이지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늘 돈이 생기면 그 중 일부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한다.”
이렇게 록펠러는 작은 돈이라도 그 쓰임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교육했고 수입 대부분은 자선단체에 기부하도록 했다. 이것이 록펠러재단, 연구소, 록펠러 가문의 원동력이 되어 사회에 더 많은 공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후에 “55년을 쫓기듯 살았지만 나머지 43년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록펠러.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5억 5,000만 달러나 되는 금액을 사회에 환원했다.
1937년 5월23일 록펠러는 98세의 일기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부에 관한한 개인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정점을 보여준 록펠러. 그의 장례식이 열리던 5월25일 전 세계의 스탠더드 오일 계열사에서는 5분간 일손을 놓고 뜨거웠던 ‘석유왕’을 추모했다.

틸러슨 회장, 모빌 인수 작업 지휘 성과 인정
현 재 엑슨모빌은 렉스 틸러슨(Rex W. Tillerson)이 2005년 8월부터 회장 겸 CEO 직무를 맡아오고 있다.
렉스 틸러슨에 앞서 엑슨모빌을 책임졌던 인물은 리 레이몬드 회장. 레이먼드 회장은 23세 때인 지난 1963년 엑손에 입사, 무려 42년 동안이나 엑슨모빌에 몸 담았다. 한 직장에 근무하면서 승진계단을 한 걸음씩 디뎌 결국 CEO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는 그야말로 ‘엑슨맨’으로서의 면모를 철저하게 남겼다. 93년 회장 겸 CEO로 임명된 그는 99년 경쟁업체 모빌 인수에 성공해 석유업계는 물론 전세계 모든 상장기업을 통틀어 최대인 엑슨모빌을 탄생시켰다.
엑슨과 모빌의 결합은 텍사코와 셰브론, 필립스 페트롤리엄과 코노코가 서로 손을 잡는 계기가 되는 등 미국 석유업계에 거센 합병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한 레이먼드 회장은 은퇴하기 전인 2004년 360만 달러의 급여와 390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았으며, 은퇴당시 보유중인 엑손 모빌 주식은 310만주, 스톡옵션은 460만주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화석연료 소비가 대기오염과 지구온난화를 초래하는 주범이란 환경운동가들의 주장을 강력히 비난해온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 뒤를 잇고 있는 틸러슨 회장은 전임 레이먼드 회장과 함께 1999년 석유 기업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인 852억 달러 규모의 모빌 인수 작업을 지휘하는 등 굵직굵직한 사업 추진을 맡아왔으며 2004년 3월 사장으로 임명된 데 이어 2005년 회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틸러슨 회장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임 회장. 레이먼드 회장이 직접 지목한 후계자이기 때문에 어깨가 무겁지만 또 그만큼 대중의 신임을 얻을 수도 있게 되었다. 레이몬드가 있던 엑슨모빌의 12년은 엑슨모빌 사상 최고의 중흥기를 누린 시기였다. 주식 시가 총액이 80조 원에서 360억 원으로 성장, 세계에서 가장 비싼 상장가가 되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면, 이후 틸러슨 회장도 전임 CEO의 뒤를 이어 30조 원 가량을 더 늘렸다.
틸러슨 회장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엑슨모빌에서 보냈다. 그리고 앞으로 엑슨모빌에서 보낼 시간이 얼마나 더 있는지는 그의 능력과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
지난 연말 틸러슨 회장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 최고경영자 정상회의 연설에서 엑슨모빌은 2030년까지 인구증가와 경제성장이 계속해서 글로벌 에너지 수요를 더 높게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에너지와 함께 쌓아온 엑슨모빌의 위업은 과연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인가. 세계와 역사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