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정치테러 참극으로 얼룩진 필리핀
아로요 대통령 집권 동안 진보인사들 다수 희생
오는 5월 주지사 선거를 앞두고 현직 시장이 정적(政敵)을 차단하기 위해 대학살을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어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이 끔찍한 사건은 11월23일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 마긴다나오주에서 발생했다. 이날 아침 불루안시(市) 이스마엘 망우다다투 부시장은 내년 있을 주지사 선거에 후보로 등록하기 위해 아내와 측근, 그리고 지지자들을 포함한 40여 명을 선거위원회 사무소로 보냈다. 여기에는 이를 취재하기 위한 기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그날 오후부터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주지사 선거 도전하자 정적 일행 무참히 학살
11월23일 마긴다나오 산악지대에서 등 뒤로 손이 묶이거나 신체 일부가 훼손된 채로 시신 22구가 발견됐다. 그리고 이튿날 매장된 시신이 추가로 발견돼 24일까지 총 47구의 시신이 발견됐으며, 현재까지 경찰조사 결과 총 57명이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망우다다투 부시장은 오는 5월 있을 주지사 선거에 참여한다고 선언하는 순간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다. 아들에게 주지사 자리를 물려주려고 계획하던 안달 암파투안에게 망우다다투의 주지사 선거 참여는 암초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유로 사건 당일 후보등록 일행에도 망우다다투는 안전을 위해 동행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테러 위험이 적은 여성들을 대거 포함시켰다. 하지만 정치싸움에 남녀노소는 없었다. 무장괴한들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일행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총을 든 100여 명의 무장괴한들은 차로 이동 중이던 망우다다투 일행들을 순식간에 납치해 살해했다. 목격자들은 “괴한들이 피해자들을 밖으로 끌어내린 뒤 여성들을 성폭행하고 곧바로 학살했다”고 진술했다. 사건 직후 필리핀 아로요 대통령은 “문명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만행이 벌어졌다”면서 시신을 수습하고 진상 파악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사건 직후 경찰의 1차 보고에 의하면, 살해된 피해자들은 다투 운세이시의 시장인 안달 암파투안 주니어가 동원한 무장괴한에 의해 제지당했으며, 암파투안 주니어는 아로요 대통령이 이끄는 여당 라카스 캄피 크리스탄 무슬림 민주주의당 소속으로 알려졌다.
사건이 발생한 필리핀 남부는 무슬림 반군 활동이 강한 지역으로, 2001년부터 사실상 암파투안 가문이 지배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망우다다투가 주지사 선거에 참여한다며 직접적으로 도전하자 정적의 일행을 학살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다.
학살 현장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이들이 무장괴한들의 신분을 밝혔으며, 망우다다투 부시장 역시 암파투안 가문을 테러 배후로 지목했다. 망우다다투 부시장은 “나와 가족들은 그동안 암파투안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시신을 묻은 구덩이를 미리 파 놓았다는 점에서 계획된 범행”이라고 맹비난했다.
언론인도 다수 학살됐다. 보기 드문 언론인 대학살이었다. 망우다다투측 후보 등록을 취재하기 위해 일행에 동행했던 기자단도 20명 넘게 희생됐다. 국경 없는 기자회는 “하루 동안 숨진 언론인 수로는 저널리즘 사상 최대 규모”라고 사태의 심각성을 꼬집었다. 기자 단체인 언론인보호위원회(CPI)도 성명을 통해 “이번 사건이 1992년 이후 기자들에 대한 최악의 테러”라며 애도를 표했다.
한편, CNN은 ‘언론인의 위협’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통해 “필리핀은 언론인에게 가장 위험한 국가”라고 11월26일 보도했다. 언론인보호위원회(CPJ) 밥 디에츠 아시아 담당관은 “이 사건은 필리핀이 이라크보다 언론인에게 더 위험한 국가임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암파투안 주니어 “내 양심은 깨끗하다” 혐의 부인
필리핀 검찰은 11월26일 용의자로 지목된 암파투안 주니어를 그의 가족들로부터 인계받아 육군 헬기를 이용해 인근 도시로 이송한 뒤 수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암파투안 주니어는 “혐의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내 양심은 깨끗하다”고 주장했다.
이번 사건에는 암파투안 가문 뿐 아니라 현직 경찰관도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치안유지를 담당해야 할 고위 현직 경찰관 4명이 오히려 이번 사건에서 직접 역할을 담당하고 사건 후 자신들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 사건을 무마하고 은폐하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필리핀국립경찰 펠리시시모 쿠 감사반장은 이들이 사건 당일 100여 명의 테러범들이 학살을 자행한 도로에서 2.5㎞ 떨어진 검문소에 있었음을 포착, 직무유기 혐의와 함께 사건 발생 후 상부보고 태만 등 사건을 무마시키고 은폐에 가담한 혐의를 찾아냈다고 밝혔다. 기소된 다카이 경감과 디온곤 경감은 각각 마긴다나오 지역 경찰 부책임자, 이동경찰반장을 맡고 있다. 나머지 2명은 코타바토 시에서 군무하는 모카마드와 마리가 경사로 특히 모카바드 경사 집에서는 학살에 사용된 M16 수류탄 등의 무기류를 압수했다. 이들 4명은 현재 퀘존시 캠프 크라메로 압송되었다.
아로요 대통령 국정수행 신뢰도 갈수록 하락
이번 테러사건으로 암파투안 가문과 정치적 동맹을 맺고 있는 아로요 대통령도 위기에 봉착했다. 아로요 대통령의 부친은 1961년∼1965년 대통령을 지낸 디오스다도 마카파갈로, 아로요 가문은 대대적으로 전통적인 정치 가문이다. 아로요 대통령은 2000년 제2차 민중봉기를 통해 조지프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2001년 1월 사임, 당시 부통령이던 아로요가 대통령직을 물려받았다. 아로요는 코라손 아키노에 이은 필리핀 두 번째 여성 대통령이며, 또한 코라손 아키노에 이은 피플파워로 집권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피플파워는 한국의 6월 항쟁과도 비슷한 1986년 2월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대통령의 독재정권에 대항해 일어난 시민혁명이다.
2004년 5월 선거에서 다시 한 번 40%가량의 득표율로 대통령직에 앉게 된 아로요는 여러 차례 쿠데타 의혹에 시달렸다. 야당은 2004년 선거에 부정이 개입되었다고 주장했으며 2005년 이후에는 매년 한 차례씩 아로요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의회에 제출하고 있다. 그녀의 임기는 2010년 6월에 끝이 나지만 아로요 대통령은 이미 내년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이라고 선언해 놓은 상태다.
아로요 정권의 가장 큰 약점은 집권 기간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실종되거나 살해되고 있다는 것이며, 대다수는 이것을 아로요 정부와 연결시켜 ‘정치적 살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집권 5년 동안에만 해도 800명이 넘게 살해당했으며 200여 명이 실종되는 정치 탄압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고 있다. 희생당한 이들 대부분은 재야 정치인, 언론인, 종교인, 학생 등 진보 활동을 하던 이들이었다.
이렇다보니 아로요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신뢰도도 갈수록 하락하고 있다. 제아무리 피플파워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그녀라 할지라도 독재에 가까운 정치를 수년간 일삼고 있는 그녀를 지지할 리 만무하다. 대통령 불신임지수는 지난 2008년 10월 46%선을 유지해오다가 금년 10월에는 51%를 기록했다. 하지만 말라카냥궁은 이 결과가 국민의 일부 목소리일 뿐, 전체 국민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없다고 일축했다.
그렇지만 펄스 아시아의 여론조사 결과 지식층의 신임도는 14%에 불과했으며, 친서민정책을 펼쳐왔다고 홍보한 말라카냥궁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빈민층 비율이 가장 높은 민다나오 지역에서도 불신임 지수가 43%에 달했다. 한편, 민다나오 지역은 지지율이 24%로 가장 높은 지역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아로요 대통령, 마긴다나오 지역에 계엄령 선포
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자 12월4일 아로요 대통령은 최악의 정치테러가 발생한 마긴다나오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번 계엄령은 1972년 페르난디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1972년 전국 계엄령을 선포한 이래 내린 최초의 계엄령으로 에르미타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번 계엄령이 마긴다나오 지역의 평화와 질서 유지를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아로요 대통령은 “이번 학살에 사용된 무기와 탄약을 누가 공급했는지 철저히 밝혀내라”고 군경 마긴다나오 지역 책임자에게 지시했다. 계엄령 선포에 따라 마긴다나오 주민들의 기본권은 일시 제한되며 이곳에 배치된 치안군은 학살 가담자에 대한 검거에 착수했다. 5일 새벽 경찰은 안달 암파투안과 그의 아들 잘디 안파투안을 연행했다. 한편, 이번 사건의 주범인 암파투안 주니어는 25건의 살인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이번 학살사건을 비호하고 은폐한 농림부 케이세이 우스만 장관과 환경자원부 카분탈란 엠블라와 장관 등도 군경 합동반에 체포됐다. 일각에서는 아로요 대통령의 계엄령 선언이 2010년 5월 선거를 염두에 둔 사전 시나리오가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한편, 국제인권기구인 앰네스티인터내셔널은 필리핀 정부가 내린 계엄령을 해제할 것을 8일 요청했다. 앰네스티는 이날 성명을 통해 “구금의 적법성을 따질 권리를 비롯한 기본적인 인권은 어떤 상황에서도 위반되거나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무장군 군사 조직을 해체시킬 것을 촉구했다.
638명 법무부 조사에 회부, 대대적 진상 규명
6일에는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암파투안 일가의 추종세력이 경찰과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지저스 베르소사 필리핀 국립경찰청장은 테러 현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다투 운세이 지구에서 암파투안 일가의 추종세력으로 의심되는 20~30명이 경찰을 향해 발포했다고 말했지만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베르소사 청장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수년간 지역을 지배해 온 암파투안 일가를 지키려는 2,400명이 넘는 무장 추종세력이 마긴다나오주 22개 지구 가운데 16곳에 모여 있다.
그런가하면 필리핀 경찰은 9일 학살 사건과 관련, 용의자 161명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이들 가운데는 암파투안 일가의 민간 사병들과 반군, 정부 민병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베르소사 경찰국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사망자들의 시신에는 입과 가슴 주위에 집중적으로 총에 맞은 흔적이 남아 있다”면서 “목격자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암파투안 주니어가 직접 학살에 가담했다는 증언이 나왔다”고 밝혔다. 암파투안 주니어는 그동안 학살 개입여부에 지속적으로 부인해왔으나 목격자들의 진술로 혐의가 굳어지고 있다.
이에 수사 당국과 목격자들은 이번 사건이 암파투안 주니어가 차기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려 한 자신의 라이벌을 저지시키기 위해 벌인 정치적 학살사건으로 간주하고 있다.
한편, 필리핀 국가인권위원장은 암파투안 주니어가 재임기간 중 최소 200명 이상을 살해했다는 새로운 주장을 제기,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마긴다나오 지역에 내려진 계엄령은 12일 계엄령을 해제됐다. 아로요 대통령은 오후 9시를 기해 마긴다나오주에 발령된 계엄령을 해제했다고 에르미타 비서실장은 밝히며 “국가안보회의가 열렸을 때 필리핀 각료 내 안보그룹이 계엄령 해제를 요구했다”고 덧붙였다.
필리핀 사법당국은 암파투안 가문이 정적 살해 사건의 배후로 개입한 것으로 보고 24명을 기소하고 638명을 법무부 조사에 회부하는 등 대대적인 진상 규명 작업을 벌이고 있다.
정치적 세력을 이어가기 위해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고 있는 필리핀 정치의 현주소. 이번 대학살 사건으로 신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필리핀 정부가 앞으로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