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범죄는 없다

2004-09-02     글/최승걸 기자
무동기형 지능형 범죄 잡는 첨단수사기법
요즘 들어 과학수사의 중요성이 새삼스레 강조된다. 직접적인 계기는 최근 피의자가 잡힌 충격적인 연쇄살인 사건이다. 범죄가 점차 흉포해지고 증거를 거의 남기지 않아 과학수사가 필요하다. 특별한 이유 없이 무차별적으로 저지르는 이른바‘무동기형 범죄’도 새로운 수사기법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분석능력은 이미 세계 정상급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 수사의 실마리를 찾기가 어려운‘무동기 범죄’를 비롯, 증거를 남기지 않는 지능범이 늘고 있는 가운데, 떠오르고 있는 수사기법을 취재했다.


다양한 과학수사 기법
과학수사에는 가장 기본인 지문감식을 비롯, 몽타주기법·폐쇄회로 카메라 분석·거짓말 탐지기·DNA 분석 등 다양한 방법이 있다. 이 가운데 최근 관심이 높아진‘프로파일링’ 기법과‘법의(法醫)곤충학’을 사례를 통해 살펴본다.
▲프로파일링=3년전 어느 봄날 저녁 서울의 한 개천가에서 홀로 떨어져 놀던 네살배기 여
아가 사라졌다. 열흘 뒤 아이는 주택가 골목길 옆 가방 속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시신은
추행당한 뒤 잔인하게 훼손된 채로 얼어 있었다.
물증은 가방 정도. 현장감식 뒤 분석에 들어갔다. 범행 도구는 전기톱 등으로 추정됐다. 범
인은 30대 후반∼40대 초반에, 중졸 정도 학력의 전과자로 보였다. 주거는 혼자 셋방살이할
가능성이 컸다. 직업은 절단공이나 냉동 물건 판매 경력자로 추측됐다. 또 용의자가 소아기
호증을 가진 성적 콤플렉스가 있거나, 대인관계를 꺼리는 성격일 것으로 짐작했다. 프로파일
링을 통해 설정한 범인 윤곽이다.
과연 검거한 범인은 40세 국졸 남성으로 범행 열흘 전에 절단공으로 일하다 퇴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냉동생선을 판매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월세 단칸방에 살며 대인기피와 소
아기호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건은 프로파일링이 용의자 대상을 좁히는 열쇠가 될 수 있
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법의곤충학=살인사건 수사는 종종 시간과의 싸움이다. 보통 시반(시체의 멍처럼 생긴 자
국)이나 시강(굳는 정도), 위 속 음식물 소화 정도 따위로 사망시점을 추정한다. 그러나 증
거가 불충분할 때 법의곤충학도 하나의 대안이 된다.
1990년 1월 미국 테네시주 야산에서 15세로 추정되는 소녀 유골이 발견됐다. 시신은 완전히
부패해 사망시점을 알아내기 힘들었다. 법의곤충학자는 시체 두개골에서 찾아낸 쌍살벌류
말벌집과 아기똥파리 번데기에 주목했다.
쌍살벌류 말벌은 4월초 깨끗하고 건조한 곳에 집을 짓는 특성이 있다. 4월쯤 두개골은 이미
깨끗한 상태였음을 뜻한다. 앞서 아기똥파리 구더기가 시신 살점을 모두 먹어 치운 뒤 말벌
이 집을 지었을 것이다.
아기똥파리는 7월에 알을 낳는다. 말벌이 집을 지었을 전년도 4월에는 아기똥파리 구더기가
없는 상태다. 결국 시신의 살점이 없어진 때는 적어도 1988년 여름이라는 얘기다. 결론적으
로 법의곤충학자는 소녀가 죽은 시점을 사체가 발견되기 18개월 전으로 유추했다. 이런 곤
충학 지식이 사건 해결에 결정적 도움을 줬다. 하와이대 곤충학 교수인 리 고프의‘파리가
잡은 범인’이라는 법의곤충학 입문서에 나온 내용이다.
법의곤충학은 곤충의 성충·애벌레·알 등 각각의 성장단계를 보고 사망시점을 추정한다.
지역별로 사는 곤충이 다르다. 곤충 종류에 따라 시체에 달려드는 순서가 있다. 가령 파리가
먼저 날아오고, 파리 알과 구더기를 먹는 딱정벌레 등이 온다. 다음엔 시체와 다른 곤충까지
먹는 말벌, 개미에 이어 또 이들을 잡아먹는 거미가 찾아온다. 파리도 종류별로 순서에 따라
날아온다.
국내에서는 고신대 생명과학과 문태영 교수가 유일한 법의곤충학자다. 문교수는 원로 법의
학자 문국진 고려대 의대 명예교수의 아들. 아직 곤충을 이용해 범인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
지만, 향후 과학수사 분야에 응용될 전망이다.


"현장을 보면 범인 좁혀진다"
특별한 원한관계나 우발적 범행이 아닌 이른바‘무동기 범죄’는 수사의 실마리를 찾기조차 어렵다. 게다가 현장에 직접적인 단서가 될만한 증거를 남기지 않는 지능범도 날로 늘고 있다. 이때 떠오른 대안 가운데 하나가‘범죄 프로파일링(profiling)’기법이다. 최근 프로파일링이 강조되지만 아직 전문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국내에는 단 한명의 프로파일러가 있다.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범죄분석팀 권일용 경
사(40). 2000년 2월 서울경찰청에 프로파일링이 도입되면서 이 업무에 발을 들였다. 프로파
일링은 범행현장을 분석해 범인의 성격·행동유형·직업·거주지 등을 추론해내는 수사기법
이다.
“현장감식을 하다 보면 범인이 모두 다른데도 비슷한 행동을 발견하곤 합니다. 침입이나
가해·도주 방법 등에서 일정한 특성이 나타납니다. 곳곳에 범죄자 성격이나 생활환경이 묻
어나요. 이를 토대로 범죄자를 유형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문이나 모발 등 증거가 불충분할 때 범인을 추론하는 것이 권경사의 일이다. 물론 권경사
말처럼 모든 형사가 프로파일러이긴 하다. 하지만 범죄가 날로 지능화하는 추세에 대응해
프로파일링도 더 전문화해야 한다.
“물적 증거가 없을 때는 범인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캐내야 합니다. 사소한 행동도 훌
륭한 단서가 되죠.”. 권경사는“그렇다고 감에 의지해 연역적으로 추리하지는 않는다”며
“추측만 하면 오차범위가 커지고, 과학적인 수사라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항목별로 데이터를 축적한 뒤 통계를 낸다. 범행시간은 초저녁·한밤·새벽·대낮 등으로
나눈다. 범행 도구, 질식사나 구타사 여부를 구분한다. 사회통계분석기법(SPSS)을 이용, 자
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한다. 선진국처럼 사건 자료를 넣으면 범행과 범인 유형을 분석해내는
소프트웨어를 구축할 생각이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1978년 프로파일링을 도입했다. 일본은 95년 시작해 상당한 수준에
오른 상태다. 외국 데이터나 소프트웨어를 수입해 쓰면 좋지만 국내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
렵다. 범행에도 문화적 차이가 크기 때문. 미국은 인종이나 총기 등을 중점 분석한다. 섬나
라 일본은‘지리적 프로파일링’이 발달했다.
“국내는 이제 데이터를 확보하는 과정입니다. 80년 이래 20여년 수사기록을 분석하면 나중
에 활용할 수 있을 겁니다.”
현장감식 8년을 포함해 13년간 과학수사계에 몸담아 왔지만 그도 프로파일링은 낯설었다.
변변한 자료 없이 빈 책상에 볼펜 하나 달랑 들고 시작했다. 무엇보다 감식 현장을 쫓아다
녔다. 외국 사례를 공부하고, 방송국 아나운서실에서 말투에 숨은 범인의 특성을 간파하는
기술을 익혔다.
피의자와의 인터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담배를 피우게 하는 등 자연스런 분위기에서 4
시간 이상 인터뷰한다. 그러면 속마음을 털어놓거나, 눈물을 보이는 범인이 적잖다고 한다.
물론 프로파일링으로 범인을 곧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권경사는“프로파일링은 과
학수사의 한 요소일 뿐”이라며“장비와 인원을 보강하는 등 과학수사가 전반적으로 발전해
야 효과가 높아진다”고 말했다. 권경사는 다른 지방경찰청의 과학수사관에게 프로파일링을
보급하는 일도 맡았다. 개인적으로는 심리학 소양 등을 쌓아 프로파일링 기술을 향상시키는
숙제를 안고 있다



잿더미 속 진실 '완전범죄'불가능
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불이 지나간 뒤 남는 것은 새하얀 재뿐이다. 그러나 그 재를 조심스럽게 들춰보면 진실이 보인다.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화재감식반 이상준 경장(36)과 서울 소방방재본부 화재조사팀 감식반장 안성일 소방교(37)는 친구 사이다. 거의 매일 화재현장에서 만나다보니 어느새 정이 들었다.
화재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는 사람은 소방관이다. 1차 조사 역시 소방관의 임무다. 피해가
크지 않고, 원인이 명확한 화재는 일선 소방서의 1차 조사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막대한
보험금이 걸려 있다거나 인명피해가 발생했을 때, 또 방화와 실화 구분이 명백하게 드러나
지 않으면 이경장과 안소방교가 현장으로 나간다.
현장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멀리서 보는 것’이다. 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한눈에 현장 전체를 볼 수 있는 높은 건물을 찾아 올라간다. 보통사람의 눈에는 시
커멓게 그을린 건물만 보이겠지만 두 사람은‘불의 흐름’을 읽는다.
목격자 진술을 듣는다. 진술 중 가장 많은 것이“‘펑’하는 소리와 함께 지붕에서 불이 솟
았다”이다. 그렇다면 불이 시작한 곳은‘지붕’이고 원인이‘전기사고’일까. 그럴 가능성
은 크지 않다. 불은 아래에서 위로 움직인다. 발화지점이 어디든 결국에는 지붕을 뚫고 나간
다. 이 때문에 진술만으로는 발화 지점과 원인을 파악할 수 없다.
다음으로 초기진화에 참여한 소방관의 이야기를 듣는다. 진화하다 보면 부득이 현장을 훼손
하게 된다. 소화액은 걷어내면 되지만 강한 물줄기 때문에 날아간 천장과 벽은 소방관의 진
술을 토대로 복원할 수밖에 없다. 불로 인한 훼손인지 진화과정에 일어난 파손인지 명확히
해둬야 한다.
그런 다음 현장으로 들어간다. 카메라는 필수품이다. 현장감식에 투입하는 인원은 경찰관 2
명과 소방관 2명이다. 현장에서 구역을 나눠 감식에 들어간다. 보통 3시간 정도 걸린다. 장
비는 붓과 현미경, 조명기구 정도다. 그리고 경험 많은 눈과 코가 필요하다.
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지언정 거짓말하지 않는다. 가장 먼저 발화지점을 찾는다. 불은 약
하게 시작해 시간이 지날수록 맹렬하게 타오른다. 화력에 따라 남기는 흔적이 다르다. 벽의
그을린 자국이라든가, 타다 남은 목재와 금속제품의 훼손 정도를 보면 불이 지나간 길을 추
적할 수 있다.
발화지점을 찾았으면 방화냐 실화냐를 판단해야 한다. 인화물질이 없는 소파나 테이블 위,
가구 등에서 불이 시작했다면 방화일 가능성이 크다. 부엌이나 발열기구 부근에서 불이 붙
었다면 방화 가능성이 줄어든다.
또다른 단서는 유리창이다. 불이 나면 유리창은 어떻게든 깨진다. 열 때문에 깨지기도 하고
진화를 위해 소방관이 깨기도 한다. 깨진 유리창을 분석하면 파손된 시점을 알 수 있다. 화
재 전에 유리창이 미리 깨졌다면 일단 의심해본다.
발화지점이 여러 곳이라면 십중팔구 방화다. 실화라면 한곳에서 발화해야 정상이다. 방화범
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불을 놓은 것이다. 이런 수사과정을 거쳐 현장에서 채집한 증거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진다. 최종분석이 끝난 뒤에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된다. 많은 화
재사건이‘원인불상’으로 처리된다. 그만큼 화재조사는 어렵고 힘든 작업이다. 그러나 이경
장과 안소방교는“방화사건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낸다”며“완전범죄란 있을 수 없
다”고 입을 모았다.

박스1
제목:긴급상황‘최소한 이것 만큼은…’
부제:현장 목격하면 철저한 보존을

불행히도 자신이나 주변 사람이 사고를 당하면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모른다. 대부분은 일단
스스로 사건을 수습하려 든다. 도둑을 맞거나 불이 났을 때 깨끗이 정리정돈한 다음 신고하
는 사람도 흔하다. 그러나 경찰을 부르기 전 현장을 최대한 보존해야 한다. 다음은 수사관
등 국내 전문가와 미국 연방수사국(FBI)에서 권하는 유사시 행동요령이다.
안전이 최우선이므로 사고현장을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대피한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다
음 목격한 사실을 머릿속으로 잘 정리한다. 심각성을 판단한 다음 경찰서(112)나 소방서
(119)에 신고한다.

▲범행·화재현장에 있을 때
현장에서 사건과 관련된 사람을 잘 식별해 둔다. 무기나 위험물 또는 증거가 될 만한 것을
확인한다. 꼭 필요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직접 손대지 않는다. 경찰이 오기 전이라도 끈 따
위로 현장을 봉쇄한다. 국내 범행현장에서 채취한 발자국의 80% 이상이 가족 것임을 명심
하자. 수사의 혼선만 초래한다.
사건 현장과 연계된 지역내 전화기나 화장실 사용을 피한다. 현장에서 음식물을 먹거나 담
배를 피우는 것은 금물이다.
기억에만 의존치 말고 기록해 두자. 일시, 장소, 날씨, 각종 기물의 위치, 출입문 개폐 여부,
전등이 켜져 있었는지 등 최대한 상세히 적는다. 목격한 사실의 기록을 법적 증거로 활용할
수도 있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다. 당사자나 목격자가 사고 전반을 목격, 진술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때 차량 최종 정차 위치, 도로상태 등을 정확히 촬영해두면 좋다.
물체끼리 충돌하면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자동차의 페인트·유리·기름·파편 등이 피부나
옷에 붙는다. 사람의 옷 조각이나 피부, 머리카락, 핏자국 등은 범퍼, 보닛, 앞유리창, 지붕,
차량 밑에 남는다. 충돌 파편이 길바닥 등에도 떨어진다. 차가 사람을 타고 넘어가면 차량
아래 구조의 먼지, 이물질, 기름이 붙게 된다. 이런 흔적을 고스란히 보존해야 한다.
차량사고 때 급브레이크를 밟아서 도로에 남은 타이어 자국(스키드 마크)은 매우 중요한 단
서다. 사고 당시 정황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범퍼 등 차량 피해상황뿐 아니라 타이어 자국
도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두도록 한다. 디지털 카메라는 조작이 가능해 간혹 증거능력
을 인정받지 못하는 수가 생긴다. 가능하면 필름 카메라로 찍는다. 1회용 카메라라도 휴대하
고 다니는 편이 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