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상생의 ‘임금피크제’ 新 고용안정 ‘임금피크제’가 뜬다
2004-07-10 글_노혜란 기자
기업 근로자 고령화에 따른 고용안정 보장책…노사합의 가 관건
고용안정과 일자리 만들기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청년실업율은 7%를 웃돌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40만 넘으면 언제 해고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어야하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각종 취업 박람회는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들도 미어터진다. 일자리 잡기가 하늘에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워지면서 임금인상에 초점을 맞춰오던 노동조합들이 이제는 고용안정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양상이다. 고용안정이 새삼 중요한 과제로 인식됨에 따라 임금피크제가 노사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했거나 예정인 기업들이 늘면서 임금피크제가 기업과 노동계의 새로운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고용안정이 노사관계 안정의 중요 변수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노사 모두 이 제도에 긍정적 입장이어서 더욱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그렇다면 과연 임금피크제가 장년층 근로자에 대한 고용안정제도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임금피크제 왜 확산되나
임금피크제가 확산되는 이유는 전반적인 사회 고령화에 따라 기업 내부 근로자 또한 고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처럼 나이가 먹을수록 호봉이나 임금이 높아지는 임금구조인 연공급여체계에서 고령자는 임금은 높은 반면 생산성은 떨어지는 구조를 보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기업측은 고령자 우선해고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는 셈이다. 이를 막자는 게 바로 임금피크제다.
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300인 이상 대기업의 평균 정년연령은 56.6세. 국민연금 수급개시 연령인 60세에도 못 미친다. 경기가 더 나빠지면서 정리해고로 인해‘사오정’‘오륙도’란 말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중장년층의 실업은 곧 가정파괴와 사회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정한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임금피크제는 직무급이나 연봉제인 미국 등에서는 불필요한 제도지만 일본과 한국처럼 연공에 따라 급여가 올라가는 임금체계 국가에서 고용유지를 위한 새로운 해결방법의 하나로 도입되고 있다”고 밝혔다.
◇어떻게 운영되나
총론은‘정년보장-임금삭감’이지만 운영형태는 각 회사의 노사합의에 따라 다양하게 운영된다. ▲정년 뒤에도 계속 일하는 대신 정년 뒤에 임금을 삭감하는 형태 ▲정년을 연장하는 대신 정년 몇년 전부터 임금을 삭감하는 형태 ▲정년 전 일정 연령을 시작으로 정년까지 매년 임금을 삭감하는 형태 등이다.
지난해 5월 첫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신용보증기금은 3번째 형태. 임금피크제가 도입된 후 신보직원들은 일단 임금피크제 첫해인 만 55세가 되면 일반직에서 별정직으로 직군이 전환된다. 동시에 임금수준도 매년 줄어든다. 첫해 75%, 2년차 55%, 3년차 35%의임금을 받는 식이다. 임금피크제 적용기간이 끝난 58세 이후에는 계약직으로 월 100만원의 임금을 받고 3년간 더 일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교대근무 확대를 통한 유한킴벌리식 일자리 나누기와 임금피크제는 생산성 향상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업은 물론 노동계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실례로 풀무원은 지난 3월 유한킴벌리 뉴패러다임센터 등의 협조를 받아 제3두부 공장에 유한킴벌리식 4조2교대 근무체제를 도입키로 하고 지난 3월 회사안에 일종의 태스크포스인 일자리 나누기 프로젝트팀을 신설했다. 도입시기는 7월1일. 태스크포스의 주 업무는 이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4조2교대 근무체제를 만드는 동시에 종업원 교육에 나섰다.
하지만 첫 반응은 냉담했다. 이미 언론을 통해 수없이 소개된 유한킴벌리식 4조2교대 근무제지만 종업원들은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특히 현장근로자들을 설득시키는 일이 어려웠다. 근로자들은 새로운 제도에 대해 불안감이 컸고 특히 전체 근로 시간이 감소함에 따라 실질소득이 줄어들지 않을까 우려했다.
회사측은 교대근무제 이후 도입되게 되는 교육을 시간으로 환산해 급여를 주는 방식으로 급여를 보전해 주기로 했고 또 이 제도의 도입으로 고용안정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홍보해 결국 근로자들의 공감과 협조를 얻어냈다.
풀무원의 한 근로자는“고용이 안정되고 교육의 기회가 늘어난다는 것이 새로운 근무제도의 가장 큰 매력이라며 대다수의 근로자들이 새로운 근무제에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풀무원의 태스크포스 관계자는“1개조가 추가 투입되기 때문에 인건비가 1.65% 정도 증가,원가상승 요인이 생기지만 공장가동률이 높아지고 재교육 기회 확대를 통해 품질과 생산성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오는 2006년 7월까지 유한킴벌리식 교대근무제를 확대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임금피크제 도입 기업 점점 늘어
대한전선이 지난해 노동조합의 요구에 따라 국내 제조업체 중 처음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것도 고용안정과 이를 바탕으로한 노사안정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 대한전선 노조는 회사의 영업실적이 악화돼 명예퇴직 등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되자 조합원들의 일자리 유지를 위해 임금피크제를 제안했다. 대한전선은 주력인 전선부문 매출이 2001년 5천6백억원에서 2002년 4천7백억원,2003년 3천9백억원 수준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하성임 기획관리담당 상무는“수주 물량이 1년에 20%씩 줄어드는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든 인건비 부담을 줄여야할 상황이었는데 마침 노조측에서 임금피크제 도입을 제안해와 노사화합 차원에서 이를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하 상무는“임금 피크제 시행으로 인건비 부담이 15% 가량 줄어들었다”며“노사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정리해고와 그에 따른 노사충돌 없이 비용절감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계수화하기는 어렵지만 종업원들이 고용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냄으로써 생산성도 높아지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종업원들도 대체로 만족하는 분위기다.“월급이 줄어드는데 마냥 좋기만 하겠습니까마는 요즘같은 살벌한 세상에 정년까지 일할 수 있다는 게 어디예요. 처음엔 반발도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들 임금피크제를 고마운 제도로 인식하고 있습니다.”(초고압전선 사업부 김기현씨·43) 그는 임금피크제 때문에 연봉이 12% 가량 깎였지만 불만은 없다고 말했다.
대한전선 외에 신용보증기금 한국컨테이너부두공단 부산항만공사 수출입은행 한국수자원공사 등이 각각 자사의 형편에 맞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했거나 도입키로 확정한 상태다. 정부도 원가절감과 고용안정을 통해 노사가 상생할 수 있는 제도로 보고, 1백70개 공기업 및 산하단체에 대해 이 제도의 도입을 권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경총 관계자는“일본의 경우 현재 종업원 5천명 이상 기업 중 77.5%가 임금피크제를 채택하고 있다”며“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 추세를 감안하면 우리나라에도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기업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공무원도 임금피크제 수면위로
6급 이하 하위직 공무원들의 정년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공무원 세계에서도 임금피크제 도입 주장이 불거지고 있다. 여당과 행정자치부는 최근 당정회의에서 하위직 공무원들의 정년연장에 대해 필요성은 인정하되 신중히 접근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한나라당도 6급 이하 공무원의 60세 정년보장 등을 골자로 한‘국가 및 지방공무원법 개정안’을 국회에 내기로 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슈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공무원의 정년은 직종과 계급에 따라 다양하다. 일반직 5급 이상과 연구관·지도관은 60세다. 반면 일반직 6급 이하와 연구사·지도사는 57세로 돼 있다. 공안직 8·9급은 54세인 반면, 방호·등대직은 59세다. 경찰의 경우 경정 이상은 60세, 경감 이하는 57세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은“직급에 따라 정년이 다른 불평등을 반드시 해소해야 한다. ”면서“최근 두 차례에 걸쳐 행자부에 정년 단일화 협상을 요구했다. ”고 밝혔다. 전공노 정용해 대변인은“노동조합이 요구하는 것은 정년연장이 아니라 직급에 따라 57세와 60세로 나눠진 불평등한 규정을 바로 잡자는 것”이라며“불평등한 정년의 일원화 등 노동조건 개선 7대 요구사항을 정부에 전달하고, 협상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전공노는 일반직의 경우, 5급 이상과 6급 이하로 정년이 차등화된 것을 단일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직급에 따라 3년씩 차등화한 것은 독소조항이라며 반드시 개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와 여당은 고령화 추세를 반영하고 계급간 형평성을 높인다는 측면에서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다. 총선 공약사항이기도 해 부담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청년실업 등 고려해야 할 것도 많다.
행자부는 전공노가 요구하는 정년 단일화는 사실상 6급 이하의 정년을 57세에서 60세로 3년 연장하는 것으로 본다. 중앙부처의 경우 대부분 5급으로 승진한 뒤 퇴직해 대상자가 많지 않지만, 지자체는 많다. 6급 이하의 정년을 3년 연장하면 국가·지자체에서 연간 6500명씩 신규 채용이 줄어든다. 정부가 실업해소에 적극 나서야 할 판에 이를 역행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간기업의 경우‘사오정’(45세 정년)이나‘삼팔선’(30대 퇴직) 등의 말이 나올 정도로 체감정년이 앞당겨지는 마당에 일반 공무원의 정년을 늘리면 부정적인 여론도 무시할 수 없다. 경찰·소방·외무·별정직 등 다른 직종도 외면할 수 없는 처지다.
때문에 일부에선‘임금피크제’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있다. 정년을 늘리는 대신 임금을 연차적으로 삭감하는 것이다. 행자부 고위 관계자는“임금피크제라면 차라리 검토해 볼 만하다.”고 말했다. 중앙인사위 관계자도“정년 연장에 대한 반대를 완화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대안으로 검토해 볼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전공노측은“직급별로 차등화된 정년을 단일화하자는 게 요구조건인데, 간부들은 그대로 두고 하위직만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 또 다른 불평등을 야기한다.”며 반대하고 있다.
◆관건은 노사합의
“이미 단체 협약에 정년이 보장돼 있는데 회사측이 이를 철회시키고 임금피크제를 도입하자고 하면 어느 노조에서 동의하겠습니까.”-A기업 총무팀장“사실상 임금을 줄이려는 회사의 술책이 아니냐는 노조의 의심을 해소할수 없어 결국 임금피크제 도입을 포기했습니다.”-B은행 인사팀장
근로자들의 정년을 보장하면서도 기업 경쟁력 강화와 청년 실업난 해소의 대안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임금피크제가 제도에 대한 인식 부족과 정부의 미흡한 지원으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재계에선 임금피크제 도입 기업들의 애로 사항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임금피크제 도입 기업과 근로자에 대한 각종 지원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 5월 54세를 정점으로 55세부터 임금이 25%포인트씩 줄어드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신용보증기금이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결과에 따르면 직원의 70%가 임금피크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부정적인 평가는 9%에 불과했다. 코리아리크루트가 직장인 850명을 대상으로 임금피크제를 설문 조사한 결과에서도 응답자의 72.4%가 임금피크제 도입에 찬성했다.
이처럼 임금피크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지만 실제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이나 기관은 현재 신용보증기금, 대한전선, 대우조선해양, 한국컨테이너부두공단, 부산항만공사 등 5곳에 불과하다. 대구수출입은행, 산업은행, 국민은행, 우리은행, 기업은행 등은 임금피크제 도입을 검토중이지만 아직 확정된 기업은 없다.
임금피크제가 일반 기업들에게까지 확산되지 않는 것은 노사합의가 쉽지 않기 때문. 신용보증기금 오재수 과장은“임금피크제의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노사간 합의”라며 “노조가 기존의 정년 보장 혜택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노사간의 충분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도 보고서를 통해 임금피크제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상의는 보고서에서“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은행 및 공기업들이 가장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대상자들에게 새로운 직무를 개발하는 일이었다”며“제조업, 사무직종, 공기업 등에 따라 차별화한 임금피크제 모델을 개발, 보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또 합리적인 적용연령 및 임금감소 폭 결정, 임금피크제 적용 직원의 업무성과 측정 및 인센티브 부여 등도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무 산업환경팀장은“임금은 적지만 정년까지 중장년 근로자들이 일 할 수 있는 임금피크제는 고용의 유연성을 개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 검토돼야 한다”며“중 _장년 근로자의 일자리를 유지하고 신규 채용을 늘리는 기업들에 대해 대상 근로자들의 소득세를 경감해 주거나 소득공제가 확대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월급 적어도 정년때까지 일했으면…”
직장인들이 명예퇴직보다는 임금피크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금피크제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임금을 줄이는 대신 정년은 보장하는 식의 제도를 말한다. 채용전문업체 코리아리크루트가 최근 직장인 85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불가피하게 명예퇴직과 임금피크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 어떻게 하겠는가’란 질문에 65.2%가‘임금피크제를 선택하겠다’고 대답했다.
임금피크제의 가장 큰 장점으로는‘고용 보장 및 명퇴 불안 해소(67%)’를 꼽았다. 또 응답자의 72.4%가 임금피크제 도입에 찬성한다고 대답했다. 가장 적절한 임금피크제 유형으로는 정년을 보장하되 일정 나이부터 임금을 하향조정하는‘정년고용보장형’을 꼽은 사람이 40%로 가장 많았다. 또 정년을 연장하는 대신 연장한 기간만큼 임금을 하향 조정하는‘정년연장형(30.2%)’과 퇴직근로자를 계약직이나 촉탁직 등으로 다시 고용하는‘고용연장형(29.8%)’등이 그 다음이었다.
임금피크제 도입 때 우려되는 점은‘과도한 임금감소’(40.4%),‘임금피크제 대상의 지나친 확대’(24.4%),‘사내 서열·직함 및 대인관계의 변화’(17.8%),‘업무 만족도 저하’(9.2%) 차례로 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