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뿐인 영광 ‘쌍용차 사태’77일간 전쟁 극적 타결
해결해야 할 숙제들 더 많아, 미래 불투명
‘무쏘 신화’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나
-2009년 1월9일 사측, 기업회생절차신청-
이번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은 중국 상하이차다. 지난 2002년 대우차가 GM에 인수될 당시 소속 쌍용자동차가 배제되자 2004년 중국 상하이차가 5,900억 원을 지불하고 쌍용차를 인수했다. 인수단계부터 헐값매각이라는 논란이 제기되며 기술이전과 정보 유출 위험성 등 너무 성급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상하이차의 무책임한 행동은 쌍용차의 위기를 앞당기는데 일조했다. 상하이차는 쌍용차 계약 당시 희망퇴직과 함께 1조 2,000억 원 가량의 투자약속과 완전 고용을 약속하며 적극적인 모습으로 노조원들의 환심을 샀다. 하지만 상하이차는 정규직, 비정규직을 포함해 1,000여 명의 희망퇴직을 실시하는 등 독단적인 행동을 보이며 쌍용차 인수 당시 제시했던 투자약속을 전혀 이행하지 않았다.
상하이차는 이른바 ‘먹튀’(먹고 튀는 행위) 기업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하이차는 여전히 쌍용차의 대주주다. 여기에 상하이차의 쌍용차 인수에 주도적 역할을 한 정부도 이번 사태 관련,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중국 자동차기업 난싱은 지난 2003년 12월 쌍용차와 인수를 위해 양해각서를 체결했으나 난싱이 중국 정부의 투자승인에 실패하며 중국의 쌍용차 인수는 어려울 것으로 추측됐다. 그러나 정부는 IMF 이후 지속된 자본의 세계화 논리에 혈안이 돼 기술 유출이라는 문제점을 무시한 채 쌍용차의 주인이 상하이차가 되는데 수수방관한 것이다.
결국 재정난에 시달리던 쌍용차의 최대 주주인 상하이차는 올 1월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하며 사실상 경영권을 포기했다. 이에 사측은 직원 2,646명에 대한 희망퇴직과 정리해고를 골자로한 구조조정안을 발표했다. 경영진은 노조와의 협의를 일방적으로 무시하며 임금까지 미지급했다. 경영진의 일방적인 정리해고 방침에 반발한 노조는 굴뚝 고공농성과 전면 파업에 돌입, 77일 간 전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생존권 요구 ‘우리도 살아야 한다’
-5월21일 노조, 공장 점거 파업 돌입-
지난 4월8일 쌍용자동차는 노동부에 전체인력의 37% 해당하는 2,646명에 대한 정리해고 신고를 시행했다. 일방적인 해고 소식에 단단히 화가 난 금속노조 쌍용차지부는 지난 5월22일 공장 문을 걸어 잠그고 옥쇄 파업을 시작하며 총파업을 선언했다.
이를 지켜보던 사측 역시 10여 일 뒤 ‘직장폐쇄’로 맞대응하며 타협은 멀어져 갔다. 지난 6월6일 사측은 노조측에게 ‘파업 철회시 정리해고 유보’라는 중재안을 제안했지만 사측과 신뢰가 깨진 노조원은 이를 수락하지 않으며 공장 점거를 강행했다. 반면 비해고 노동자들은 지난 6월15일부터 정상출근 투쟁을 시작했지만 노조측의 격렬한 반발로 출근 시도는 매번 가로 막혔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사측은 노조측을 상대로 희망퇴직자를 제외한 최종 정리해고자 976명에 대해 ‘희망퇴직 450명’, ‘무급 휴직 100명 및 우선재고용 100명을 포함한 총 200명’, ‘분사·영업직 전환 320명’ 등의 절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노조측은 “이 모든 게 다 정리해고를 하기위한 술수”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지난 6월26~27일 사측 임직원 3,000여 명이 공장 주변 울타리를 제거하며 강제진입을 시도하자 이에 반발한 노조측은 도장작업용 페인트 및 시너 등 인화물질이 다량 보관돼 있는 도장 공장으로 진입하는 등 격렬한 충돌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노조원과 임직원, 시위 중단에 나선 경찰 100여 명이 부상당하며 시위의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우려하던 점이 현실로 들어나는 순간이었다. 어제의 사랑하던 나의 동지가 오늘은 ‘살아남은 자’와 ‘살려는 자’로 나뉘어 서로를 원망하며 대립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자아냈다.
타협의 길 열리나 노·사 첫 번째 대화
-7월30일 노사 42일 만에 극적 대화-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쌍용차 사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됐다. 노조측은 공장 정문폐쇄를 유지하며 정리해고 취소를 요구했다. 이번 사태가 장기화 될 것을 우려해 경찰은 7월11일 평택공장 정문 등 주요 출입문 확보에 나서며 도장 공장에 대한 공권력 투입을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이를 의식한 노조측도 금속노조원 4,000여 명이 평택공장 앞에서 쌍용차 노조 지지 결의대회를 개최하는 방법으로 맞대응했다.
지난 7월20일 쌍용자동차를 눈물바다로 만든 2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법원에서 쌍용차 노조에 대한 퇴거명령 강제집행절차가 개시된데 이어 노조 간부 이재진 정책부장 부인 박모 씨가 정신적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이재진 정책부장의 부인 박모 씨 죽음을 포함해 ‘쌍용차 사태’ 장기화로 사망한 사람은 모두 4명이 됐다. 지난 5월과 6월에는 조합원 2명이 심근 경색으로 사망, 7월2일에는 희망퇴직을 신청했던 김모 씨가 자신의 승용차에 연탄불을 피우고 숨진 채 발견됐다.
노조간부 부인 자살 소식은 공장 안 노조측 분위기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이번 사태에 대해 경찰과 일각에서는 “개인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라며 박모 씨 자결을 매도하고 모욕하는 행태를 보였다. 쌍용차 사측도 신나는 음악을 크게 틀어 놓는 등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노조원들을 격앙되게 만들었다. 극도로 흥분한 노조는 경찰과 사측을 향해 볼트새총을 쏘며 타이어를 불태웠다. 그러자 경찰은 최루액을 분사하고, 살수차 등을 동원해 강제진압 준비까지 벌이는 등 사태가 폭력적으로 변하자 일각에선 ‘제2의 용삼참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지난 7월30일 쌍용자동차 사태가 42일 만에 최대 분수령을 맞았다. 한치 양보도 없이 대치상태를 유지하던 노사가 채권단의 최후통첩에 얼굴을 맞댔다. 쌍용자동차 최대 채권자 ‘쌍용차협동회’가 기업 정상화가 어렵다면 8월4일 법원에 조기 파산 신청을 내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처해진 입장이 다를 뿐이지 노사 모두 회사를 살리겠다는 의지는 동일했다. 하지만 8월2일 사측은 “노조가 총고용 보장만을 요구한다”며 최종협상 결렬을 선언, 공권력 투입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경찰 과잉진압 논란, ‘제2의 용산참사’ 우려
8월5일, 도장2공장 제외한 모든 공장 장악
지난 8월2일 노사간 협상이 결렬된 후 쌍용차협력회 채권단은 예정대로 5일 파산신청을 강행하겠다고 공표했다. 이런 가운데 쌍용자동차 경영진은 경찰 공권력을 투입하며 쌍용차 도장공장 옥상진압을 시작했다. 경찰은 ‘용산참사’의 주역인 경찰특공대까지 투입하며 제1공장에 이어 노조본부가 위치한 제2공장까지 옥상 장악을 시도했다. 특히 제2공장에는 500여 명의 노조원과 20만톤 이상의 인화물질 시너가 있는 것으로 추정돼 자칫하면 대형 참사를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를 무시한 경찰은 과잉진압을 강행했다. 제2공장 장악을 시도하는 경찰을 피하던 노조원 2명이 옥상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도를 넘어선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을 두고 과잉진압 논란이 불거졌다. 경찰이 쌍용차노조원을 군화로 짓밟으며 쇠파이프로 후려갈기는 모습이 동영상에 포착돼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경찰의 무리한 공장 진입시도 때문에 노조원들과 사측 임직원, 용역업체 직원들은 상대방을 향해 쇠총을 겨누며 이로 인해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쇄골과 머리 등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쌍용차지부 조합원들은 아파도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했다. 단전, 단수, 음식물 반입 금지, 의료진 출입 불허가 등 쌍용차경영진이 차단했기 때문. 경찰과 노조측의 충돌 이후 의료진이 도장 공장에 도착해 출입을 요구했지만 경찰은 이를 제지했다. 간곡한 부탁에 간신히 허락을 받아 들어가긴 했으나 물과 전기조차 공급되지 않는 열악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 후 수세에 몰린 노조측은 지난 8월5일 하루에만 78명의 자진이탈자가 발생했고, 결국 노조 측은 마라톤협상 중단 3일 만인 지난 6일 사측과 협상을 제안했다.
협상타결, 위기의 쌍용차 ‘살았다’…
-8월6일 노조, 회사측 제안 받아들여-
노조원들은 채권단의 압박과 경찰 과잉진압으로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노조측은 결국 더 이상의 파업투쟁 강행은 어렵다고 판단, 사측에 협상을 제안했다. 이를 받아들인 사측은 노조측과 협상을 통해 마침내 사태 발생 77일 만에 극적 타결, 평화적으로 마무리 됐다. 결국 회사부터 살리고 보자는 인식이 맞닿아 노사양측이 한발씩 물러나 파산은 막은 셈이 됐다.
노사는 전체 정리해고자 974명의 48%에 대해 무급휴직으로 고용 관계를 유지하고, 52%는 희망퇴직을 받거나 분사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사측은 무급휴직자에 대해서는 1년 경과 후 생산 물류량에 따라 순환근무가 이뤄질 수 있도록 주간연속 2교대 근무를 시행하며 영업전직을 위해서는 영업직군을 신설하고 지원금(월 55만 원)을 1년 간 지급하는 등의 지원을 약속했다. 뿐만 아니라 양측은 회사 정상시 손해배상청구소송과 형사고발도 취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노사협상이 타결되자 공장안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던 노조원들은 농성을 해제하며 그리워하던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사측은 “차량 생산과 직접적 연관이 있는 생산 설비는 피해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최소 2주, 최장 3주 정도 지나면 라인을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쌍용차 협력업체 협동회도 이날 노사간 협상 타결 소식을 듣고 법원에 조기 파산신청 요구서 철회를 결정해 쌍용차 재개에 박차를 가했다.
쌍용 차사태 후폭풍이 더 무섭네
-8월13일, 생산라인 재가동-
노사 양측이 한발씩 양보해 최악의 사태는 면했지만 쌍용자동차 회생까지는 여러 가지 난제가 기다리고 있다. 쌍용자동차 관계자는 “공장을 풀 가동시켜서라도 생산량을 충분히 확보해 재기 발판을 만들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쌍용자동차의 재기가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이번 사태로 인해 노사 양측의 신뢰는 무너졌고 파업 이후 생산중단에 의해 차량 1만 4,590대의 피해를 입었다. 그에 따른 손실액만 해도 3,200억 원에 이르러 회사 경제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또 협력업체의 부도 및 휴업사태, 공장 재가동 문제, 쌍용차 브랜드의 이미지 회복 역시 단기간에 해결되기는 어렵다.
쌍용자동차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운영자금과 신차개발비 등 자금지원이 절실하다. 그러나 정부는 예나 지금이나 공적자금이 없다는 원칙적 입장만 고수하고 있어 재기를 꿈꾸는 쌍용자동차 식구들의 희망을 꺾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초 일주일 안으로 생산가능을 내비췄던 사측의 발언은 며칠새 “생산시설에 큰 피해는 없다”면서도 “정상가동까지는 최소 2~3주가 걸릴 것 같다”라고 번복해 법원과 채권단에게 믿음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
차를 생산해도 문제다. 이번 파업사태로 인해 차를 판매할 영업망이 대부분 와해되어 정상적으로 영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쌍용차 사측 관계자는 “차만 생산된다면 다시 영업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대리점이 140여 개가 된다. 쌍용차 구매 국민운동을 펼쳐서라도 영업을 정상화 하겠다”라고 밝혔지만 기존 250여 개에 달했던 판매망에 비하면 140여 개의 대리점은 쌍용자동차의 회생의 불씨를 되살리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전문가들은 쌍용자동차가 일어서기 위해선 무엇보다 ‘쌍용차 브랜드 이미지 회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이번 쌍용차사태로 쌍용자동차는 2달 가까이 매일 같이 방송과 신문 등 미디어를 통해 노사와 사측의 갈등을 고스란히 대중들에게 전달했다. 심지어는 서로를 향해 무분별한 욕설을 내뱉고 강도 높은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 등 쌍용자동차 이미지는 바닥을 쳤다. 이에 쌍용차 관계자는 “장기간의 파업으로 판매가 사실상 중단되면서 브랜드 이미지가 악화한 점이나 기존 모델들에 대한 시장의 평가가 경쟁 모델에 비해 뒤지는 점 등을 해결하기 위해 상품성을 높이기로 했다”고 말했다.
쌍용자동차는 1990년대 초 무쏘를 선보이며 자동차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그 후 2000년대 초반에도 코란도, 렉스턴, 카이런 등을 앞세워 SUV의 선두주자로 입지를 굳혔다. 하지만 작년부터 치솟는 경유값과 타 업체 비해 노후된 모델 등의 이유로 쌍용차의 판매가 추락하기 시작해 결국 오늘에 이르렀다.
‘회사가 살아야 노조원도 산다. 직원이 있어야 회사가 산다’ 77일간의 전쟁 속에서 극한투쟁은 공멸로 이끌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이번 사태를 교훈삼아 선진 노사문화의 롤모델 제시는 물론 자동차시장의 블루칩으로 재탄생하겠다는 쌍용차의 바람이 ‘제2의 무쏘신화’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