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초(忍冬草), 고난을 이겨낸 巨木

지역과 계층, 이념과 세대를 넘어선 행동하는 ‘양심’

2009-09-04     유정호 기자

한승수 국무총리는 조사에서 “대통령님이 평생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민족화해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해 온 것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며,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반목해 온 해묵은 앙금을 모두 털어내는 것이 우리 국민 모두의 참뜻일 것”이라고 낭독했다. 또한 “이제야말로 지역과 계층, 이념과 세대의 차이를 떠나,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새로운 통합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추도사에서 박영숙 전 평민당 의원은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는 마지막 말씀을 새기겠다”며 “우리가 깨어 있으면 당신이 곁에 계실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한편,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례적으로 하루만에 조전을 보내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는 조전에서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며, “김 전 대통령이 민족의 화해와 통일염원을 실현하기 위한길에 남긴 공적은 민족과 함께 길이 전해지게 될 것”이라 덧붙였다. 또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용감한 투사”라고 애도의 뜻을 전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해 ‘영감을 일으킨 지도자’로 기억될 것이라 밝혔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홈페이지에 올린 성명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용감하고 강력한 이상을 가진 지도자였다”며 한국이 심각한 경제위기를 넘어서게 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길을 닦고 국제적으로 인권을 보호하는데 앞장선 김 전 대통령으로 인해 나는 남·북한의 화해를 위해 그와 함께 일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밝혔다.

민주화와 남북화해의 상징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5.16쿠데타로 이루어진 군부정권하에 있었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 이때부터 민주투사로서 ‘민주화의 상징’으로 국민들과 함께 했다. 시련도 많았다. 투옥과 감금, 해외 도피생활과 납치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까지, 하지만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의 일생에 있어 민주주의는 자신의 사명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통일에 대한 염원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과도 같았다. 민주화의 완성이 이루어질 때 쯤 그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것은 남북 정상회의,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만남 속에서 평화통일이 이루어질 듯한 희망을 안기기도 했다. 비록 아직은 미완성의 단계이지만, 북핵문제로 냉각기를 맞게 된 남북관계를 북한 조문단의 파견으로 이끌어 냄으로써 다시 화해무드로 바꾸어 놓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통일의 초석인 된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자명한 사실이다.

고난과 역경 속에 이루어진 열매도 많았다. 50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루어 민의의 승리를 보여 주었으며, 세계적으로 한국의 이름을 알린 2002 한일월드컵경기와 노벨평화상은 국민에게 자긍심을 안겨 주었다. 특히 1997년 말 터진 경제대란 IMF는 국민경제의 부실과 국가적 부도사태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경제위기 속에서도 국민 단합을 이끌어내 이를 극복했다. 세계사적으로도 IMF를 가장 빨리 극복한 나라로 기록되었으며, 제2 한강의 기적이란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제 마지막 가는 85세의 일기에,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또 하나의 열매가 이루어지길 희망했다. ‘용서와 화해’의 정치가 바로 그것이다. 자신의 정적이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화해하기를 원했으며, 이를 통해 국민통합의 정치라는 새로운 민주주의가 탄생하길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헌정사상 가장 많은 어려움을 겪은 대통령으로 기록되겠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행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섬 소년, 꿈을 안고 정치에 발을 들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1924년 1월, 한반도 서남쪽 끝에 위치한 남해안의 작은 섬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일본인 지주 밑에서 소작농을 하던 농부의 둘째 아들로 그곳에서 하의초등학교 4학년 때 목포 북교초등학교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목포에서 초등학교와 5년제인 목포상업학교(현 목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그의 아호 ‘후광’은 바로 고향 하의도를 뜻하는 것으로, 수평선과 파도, 물새, 바람과 햇살은 그에게 꿈과 예술적 영감을 얻게 하였고, 아버지의 영향으로 역사와 정치, 예능분야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게 했다.

당시 일제의 강점기로, 어린시절 식민 통치의 서러움을 경험했기에 일제 징집을 피해 목포상고를 졸업 후 해운회사에 취직한다.
1945년 해방과 함께 해운업계의 성공한 청년사업가로 이름을 알리던 중에 정치에 입문한 청년 김대중은 이때부터 정치권의 거친 파고와 맞서 싸워야 했다.

6.25전쟁과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와 부패한 정치에 맞서 올바른 정치만이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신념으로 시작된 정치인생. 두 번의 실패, 그리고 세 번째인 1961년 강원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하지만 당선 3일만에 5.16쿠테타가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고 당선이 무효화되면서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이 시작되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신앙의 힘과 이때 만난 이희호 여사일 것이다.
1957년 토마스 모어라는 카톨릭 영세를 받게 된 김대중 대통령은 신앙으로, 화해와 용서, 사랑을 배우게 되었고 평생의 조력자인 이 여사의 도움을 받게 된다. 이것이 50여 년이 넘는 정치 생활에서 받게 되는 고난과 핍박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민주주의와 함께 한 긴 여정과 고난의 길
1963년 목포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면서 마침내 용기와 희망의 정치인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국회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한 김대중 대통령은 금융, 건설, 외교, 예산, 국방 등 다양한 상임위원회 활동을 통해 민주사회를 건설하고 통일로 가는 청사진을 그려 나가기 시작한다. 또한 1967년 통합야당인 신민당 대변인이 되면서 정계의 중심에 서기 시작했고, 치밀한 비판과 정책대안으로 당시 박정희 정권의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이 되었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을 저지하기 위한 역사적인 장충단공원 집회를 통해 패배주의에 젖어 있던 야권의 결속과 민주주의 회복이란 희망을 세워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통령 후보로 나선 1971년, 신민당 후보로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정면 대결을 펼치며 관권과 금권, 부정 속에서도 46%라는 지지를 얻었지만,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게 된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29년은 그에게 고난과 시련의 시간들이었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시작된 독재체제는 민주인사들에 대한 탄압의 시작이었고, 그 표적은 당연히 ‘후광’ 김대중이었다. 일본 도쿄호텔에서 중앙정보부 공작원에 의해 납치된 1973년 8월, 그를 살해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의 강력한 경고와 세계의 이목으로 인해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1주일 만에 서울의 자택에서 연금생활을 시작한다.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을 단행 5년 형의 수감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978년 12월 석방된 뒤에도 또 다시 연금생활이 이어졌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암살로 이어진 가택연금 해제 및 사면, 복권조치로 잠시 ‘서울의 봄’을 누렸지만, 그 다음해 5월 군사쿠테타로 다시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구속된다. 계엄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무기에서 20년의 감형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은 1982년 12월 두 번째 망명길에 오른다. 미국 망명 중에도 당시 신군부의 회의와 협박은 이어졌으며, 1985년 귀국 후에도 가택연금과 해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영광과 승리의 길, 정권교체와 대통령 당선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의 부활로 ‘후광’ 김대중은 실형면제와 복권조치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대통령을 향한 도전과 실패의 연속, 하지만 그는 좌절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준비시키기에 노력하였다. 1997년 대통령 선거, 40.3%라는 지지를 얻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날, 바로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 간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으며 민주화의 고난도 끝났다.

사상초유의 IMF라는 국가경제 부도위기에 직면한 한국은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국장’으로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를 남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1998년 2월25일 국회의사당에서 치러진 대통령의 취임식, 그리고 그 다음날 “오늘 아침 저는 여러분의 크나큰 고무와 지지 그리고 협력에 힘입어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나라 국민 여러분에게 충심으로부터 감사드립니다. 세계는 우리를 주시해 왔으며, 그들은 한국국민이 나라의 위기 속에서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습니다. 이처럼 당선되고 보니 저는 개인적인 기쁨과 함께 국가에 대한 무거운 사명감과 책임감을 느낍니다”고 말하며, 국민에 대한 첫 연설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침몰위기의 한국호, 오랫동안 민주주의라는 정치인생을 통해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그에게 대통령직은 또 다른 시험대였던 것이다. 관치경제에 대한 대수술과 IMF극복을 위해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려는 노력으로 누구라도 만나고 어디든지 찾아 나섰다. 2001년 8월, 예상보다 3년을 앞당겨 IMF차입금을 상환하는 날 세계는 한국경제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2002년 한일월드컵의 화려한 개막식을 통해 세계에 한국의 위상을 알리게 되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자 통일 대통령으로 기억된다. 2000년 6월15일, 분단 55년 만에 이루어진 남북정상회담은 ‘햇볕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온 결과물이었다. 분단 이후 통일에 대한 염원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지만, 이념을 넘어선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를 실천해온 그의 정책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만남으로 이어진 것이다. 특히 가족의 생사조차 몰랐던 남북 이산가족의 만남은 전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하였다. 그해 12월, 고난과 역경 속에서 이루어낸 민주화에 대한 열정과 남북화해를 이끌어낸 공로, 그리고 버마, 동티모르 등 아시아의 민주화와 인권 발전의 기여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동반자이자 정치참모 ‘이희호 여사’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모든 국민이 슬픔에 잠겼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가장 슬퍼했을 이는 아마도 이희호 여사일 것이다.
1962년 YWCA 총무를 맡고 있던 ‘신여성’ 이희호 여사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인과 결혼했다.

당시 전처 소생 둘을 둔, 무명의 정치 지망생 김대중 대통령을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는 야심찬 사람이니 내가 도우면, 나라의 큰 지도자가 되겠다”고 판단한 그녀의 선택이 주위의 반대를 이길 수 있는 힘이었다.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강인함을 잃지 않고 “남편의 유지는 화해와 용서의 정신,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연설할 만큼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평소엔 꼭 필요한 말만 하는 절제형이지만, 나서야 할 때는 의연하게 행동하는 강직함을 가진 이희호 여사. 장례기간 중 참모의 “나로호 발사를 연기해야 한다”는 말과 노제를 강행하자는 의견 앞에서도 남편의 죽음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했을 만큼 그녀의 강인함은 돋보인다.

생애 47년을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해온 이 여사는 그의 동반자이자 최고의 정치 참모였다. 측근들조차 “한국 정치의 거목을 단련시킨 사람은 바로 이 여사”라고 입을 모을 정도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 훨씬 이전부터 여성계 행사나 외신기자회견 앞에서 “김대중을 대통령 후보감으로 키워 달라”고 호소했던 모습에서 이 여사가, 고인에게는 최고의 동반자이자 참모임을 알 수 있다.

인생의 반쪽이자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남편이 죽음의 기로에 섰을 때, 37일 동안 하루도 곁을 떠나지 않고 기도와 뜨개질로 자리를 지켰던 이희호 여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며, “결혼 이후 진정한 사랑과 부부애를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며 산 기간은 대통령 퇴임 이후인 지난 7년간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