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과 인종을 넘어선 최고의 브랜드 ‘코카콜라’
발상의 전환이 만들어낸 미지의 검은 액체, 세계인의 미각을 중독 시켜
2005년 브랜드 가치 675억 달러로 마이크노소프트와 IBM을 누르고 부동의 세계 1위를 차지한 코카콜라의 시작은 어떻게 보면 초라하기만 하다. 약 120년 전 1886년 미국 아틀란타의 ‘펨버튼’이라는 약제사가 코카의 잎과 콜라의 열매, 카페인 등을 주원료로 음료의 목적보다는 소화제의 개념으로 제조·판매된 코카콜라는 톡 쏘는 맛과 독특한 향기와 청량감으로 소비자들로부터 인기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더운 여름철 청량음료로서 호황을 누리기는 했지만, 겨울철에는 고전을 면할 수는 없었던 코카콜라는 이를 타계할 목적으로 겨울을 배경으로 빨간 옷을 입은 ‘산타클로스’가 코카콜라를 시원하게 마시는 장면을 광고로 활용하는 판매 전략을 내세워 계절을 초월한 음료로서의 성공을 이뤘다.
이후 코카콜라는 세계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세계화를 이루게 된다. 미국 국방부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아 시중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군납을 하게 된 코카콜라는 유럽과 북아프리카, 아시아 전지역에 미국의 주둔과 함께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주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전쟁기간 중 50억 병 이상의 판매고를 올릴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참전 군인들의 입과 입을 통해 코카콜라의 명성은 세계에 전파되었고, 이를 계기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는 발상의 전환을 통한 성공 사례로 현재와 같은 위기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평범한 하나의 음료에서 자유세계의 상징이 되기까지
‘코카콜라’는 최고의 브랜드 파워를 보유한 대표적인 다국적기업이다. 브랜드 파워 조사업체인 인터브랜드의 조사에 따르면, 코카콜라는 2001년 이후 2005년까지 계속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브랜드 가치는 무려 675억 달러이다. 우리의 대표기업인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가 125억 5,300만 달러임을 감안할 때 실로 엄청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코카콜라가 이처럼 최고의 브랜드 파워를 갖게 된 것은 끊임없는 혁신과 노력 때문이었다.
코카콜라가 처음 시장에 소개되었던 때의 미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였고, 청량음료로 만들어지기 전 코카콜라 시럽은 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런 코카콜라가 사람들 사이에 음료수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마케팅의 힘이었다. 피상적으로 볼 때 저렴한 가격의 음료수 중 하나에 불과한 코카콜라. 그러나 코카콜라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은 코카콜라에 수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처음 코카콜라는 남북전쟁 이후 극심한 경기 침체를 겪고 있던 미국 남부 사람들에게 일종의 진통제로 소개되었다. 그 후 미국의 대공황기 때에는 산타클로스 이미지를 광고에 도입하여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던 사람들에게 작은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으며, 냉전 시대에는 코카콜라에 세계 평화의 이미지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코카콜라 마케팅 성공사례 중 2가지를 꼽는다면 산타클로스와 2차 세계대전인데, 코카콜라는 이 두 개의 마케팅 전략을 통해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우연에서 시작된 세계적인 브랜드 ‘코카콜라’
코카콜라는 미국에서 최대의 인지도를 자랑하며 국외에서도 아메리카니즘의 대명사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1886년 애틀랜타의 약제사인 J.S. 펨버턴(J.S·Pemberton)이 코카의 잎, 콜라의 열매, 카페인 등을 주원료로 하는 음료를 만들어 ‘코카콜라’라는 이름으로 상품화한 것이 코카콜라의 탄생배경이다.
여러 가지 약제들을 조합하는 것을 무척이나 즐겼던 펨버턴은 두통을 경감시킬 응급제를 찾던 중 캐러멜 색의 향기로운 액체를 섞어내게 된다. 그는 이 액체가 완성되자 이웃의 자콥 약국으로 가지고 가 혼합액에 탄산수를 더한 후 약국의 손님들에게 시범으로 맛을 보게 했는데, 손님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이 새로운 음료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이후 자콥 약국에서는 이 음료수를 한 잔에 5센트로 시판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입소문을 타며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펌버튼은 당시 회계담당자였던 프랭크 로빈슨이 이 약물에 ‘코카콜라’라는 이름을 붙여 그의 독특한 필체로 적은 코카콜라의 영문을 그대로 사용해 오늘날 세계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코카콜라’라는 브랜드를 만들게 되었다.
코카콜라가 대중에게 선을 보인 첫해 코카콜라는 약 하루 9잔 정도로 판매되었다. 그로부터 백 년 후 코카콜라는 일년에 거의 400 리터의 원액을 생산할 정도로 인기상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펨버턴은 자신이 발명한 것이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 받는 제품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1888년에서 1891년 사이에 펨버턴은 자신의 사업을 모두 합쳐 약 2,300달러에 ‘에이서 캔들러(Asa Candler)’라는 아틀랜타 사업가에게 코카콜라의 제조 및 판매권을 넘겨주게 된다. 캔들러는 코카콜라의 첫번째 사장이자 코카콜라와 브랜드에 실제적인 비전을 부여한 최초의 사람으로 지금의 코카콜라의 성공을 이끌어낸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 코카콜라는 본사에서 제조 방법이 아직까지 공개 되지 않은 원액만을 제조하여 각국의 특정회사에게만 공급하는 프랜차이즈 방식을 채용하고 있다. 특정회사에서는 원액에 물·탄산·설탕 등의 첨가물을 배합하여 병 또는 캔에 넣고 루트 세일즈(직매) 방식에 의하여 판매하고 있는데, 국외의 회사에 대해서는 자본·종업원 등에 관하여 철저한 현지주의를 채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코카콜라 외에 환타·스프라이트·터부 등의 청량음료·과즙음료를 제조하여 세계 각국에 판매하고 있다.
1달러의 아이디어가 600만 불의 가치 만들어
천부적인 사업가였던 에이서 캔들러는 코카콜라를 단순한 발명품에서 하나의 사업으로 변신시켰다. 그는 시장에 갈증을 느끼는 소비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캔들러는 그러한 소비자들에게 이 새롭고 흥미로운 음료를 소개하기 위해 재기 넘치며, 혁신적인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코카콜라를 한번 시음해볼 수 있는 쿠폰을 나누어 주었고, 코카콜라를 배급하는 약국에는 코카콜라 상표가 달린 시계, 단지, 달력 등을 주면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어디에서나 코카콜라를 볼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홍보는 그에 따른 결실을 안겨 주었고 1895년 캔들러는 코카콜라 원액 제조 공장을 시카고와 달라스, 로스엔젤레스에 세워야 될 정도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이같이 코카콜라가 인기를 얻게 됨에 따라 자연적으로 이 음료를 보다 새로운 방식으로 즐기고자 하는 수요도 형성되게 되었다. 1894년 조셉 비덴한이라는 사업가는 최초로 코카콜라를 병에 담아 시판하였다. 그는 12개의 병에 코카콜라를 담아 캔들러에게 보냈으나 그로부터 이렇다 할 반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비록 캔들러가 명석하고 혁신적인 사업가이기는 하였지만 그는 코카콜라 성공의 핵심인 고객들이 어디든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병에 담긴 음료라는 점에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5년 후인 1899년 두 명의 채터누가시의 변호사인 벤자민 에프 토마스와 조셉 비 와이트헤드가 총 1달러에 코카콜라를 병에 담아 판매할 독점권을 취득할 때까지 그 핵심을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특히 코카콜라의 성공을 이용하려는 가짜 음료들이 성행하자 1916년 이를 방지하기 위해 독특한 모양의 병을 고안해 진짜 코카콜라를 식별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이 코카콜라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주름치마를 입은 여성을 모티브로 디자인된 지금의 콜라병으로 독창적인 모양과 어둠 속에서도 진품을 가려낼 수 있도록 고안되어졌다.
현실에 안주한 코카콜라, 펩시에 추월당해
지난 한 세기 동안 ‘브랜드 가치 1위’, ‘마케팅의 제왕’과 같은 표현을 달고 다녔던 세계 최고의 기업 코카콜라 컴퍼니에게 있어 2005년은 그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악재의 연속이었다.
주요시장인 선진국들에서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코카콜라의 매출은 정체되었고, 사업 다각화를 위해 인수한 기능성 음료나 주스 기업들의 매출 역시 기대만큼 늘지 않았으며, 각국의 환경 단체나 시민 단체들로부터 무차별적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급기야 2005년 연말에 이르러서는 콜라 시장 점유율과 기업 시가총액 모두에 있어서 경쟁업체인 펩시콜라에 밀려 업계 2위로 내려앉고 말았다. 코카콜라는 지난 2004년 이후 매출 규모와 순이익, 시가총액에서 모두 경쟁업체 펩시에 밀리는 수모를 겪고 있었는데, 코카콜라는 지난 2004년 총 219억 6,200만 달러(약 21조 9,600억 원) 규모의 매출을 기록했으나 ‘영원한 2인자’로만 여겨왔던 펩시가 코카콜라 매출액보다 30% 이상 많은 292억 6,100만 달러(약 29조 원) 매출을 올려 처음으로 콜라 시장에서 왕좌를 내놓았다. 그리고 지난 2005년 12월에 발표된 주요 기업 시가총액 현황에 따르면 코카콜라는 시가총액이 965억 달러(약 96조 5,000억 원)로 987억 달러(약 98조 7,000억 원)를 기록한 펩시에게 밀렸다. 결국 펩시는 기업 운영에서 코카콜라를 완전히 따돌리고 콜라 시장의 새 영주로 등장한 셈이다.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120년의 영예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소비자들의 입맛이 탄산음료에서 비탄산음료로 옮겨가는 것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기 힘든 상태이며 전통적인 탄산음료가 앞으로도 도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로 코카콜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맞닥드리게 되었다.
발상의 전환으로 계절을 초월한 판매 방법의 개선, 전쟁이라는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활용한 발빠른 마케팅으로 급성장을 거듭 해온 코카콜라. 한 때 하늘을 찌를 듯하던 인기가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웰빙 바람과 과거의 영광에 안주 하려는 판매 전략으로 영원한 2인자로 여겼던 후발업체 ‘펩시콜라’에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이다.
세계적인 거대기업인 코카콜라에서 코카콜라가 차지하는 비율은 80% 정도다. 반면에 영원히 ‘코카콜라’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펩시콜라’는 ‘콜라’가 차지하는 비율을 30%로 낮추고 대신에 웰빙 바람에 편승한 생과일 쥬스와 이온 음료 그리고 스낵을 모두 취급하는 종합식품회사로 대변신을 하며 2005년을 기점으로 부동의 1위였던 코카콜라를 앞질렀다.
1000년을 갈 것 같았던 거대 자동차 기업 GM의 몰락과 더불어 지금 ‘코카콜라’가 겪고 있는 위기는 같은 공통점을 안고 있어 보인다. 혁신적인 발상의 전환으로 기업을 성공적으로 키워냈지만 시대의 트렌드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만을 생각하며 현재에 안주하려는 안일함에 몰락과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구원투수로 다시 등판한 코카콜라의 노병 ‘네빌 이스델’
위기에 직면한 코카콜라의 이사회가 회사를 살려낼 적임자를 찾을 때 ‘네빌 이스델’은 첫 번째로 낙점된 사람도, 두 번째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그들은 세계 최대의 음료 회사가 120년 역사상 가장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자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경영자를 외부에서 찾고 있었다. 하지만 질레트의 CEO였던 제임스 킬츠나 켈로그의 최고 경영자였던 카를로스 구티에레즈에게 거절을 당하고 나서야 이사회는 이스델을 생각했다.
당시 이스델의 나이는 예순 둘, 코카콜라에서의 40년을 마감하고 바바도스의 따뜻한 태양 아래서 퇴임을 즐기고 있던 그는 그동안 자신이 몸담았던 코카콜라의 위기를 접하고 주저 없이 수영복을 벗고 양복을 챙겨 입었다. 이스델은 코카콜라를 새로운 시장인 인도, 중동 그리고 구소련에까지 소개시켰던 인물로 한때 유럽 지역을 총괄하던 책임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1997년 그리고 2000년에 코카콜라의 최고 책임자 후보에서 두 번씩이나 탈락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실무형 관리자였던 이스델이 다시 CEO로 복귀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본인이 직접 문제점들을 조사하러 나선 것이다. 그는 100일 만에 코카콜라가 진출해 있는 200개가 넘는 나라의 다양한 직급의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이 과정에서 이스델이 확인한 것은 하락하고 있는 매출, 사기가 떨어진 직원들, 비효율적 시장 그리고 지도력 부재 등의 문제점들을 찾아냈다. 그는 우선 아틀란타에 있는 본사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이 조사한 것을 최고 경영진과 공유했다. 여기서 이스델은 일명 ‘성장 선언’으로 불리는 회사 살리기 10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애널리스트들이 예상한 것보다 높은 수치의 성과를 나타낼 수 있었고, 지금의 위기를 타파할 계기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6,000만년 전 지구를 지배했던 거대 파충류 ‘공룡’은 자기 발전이 없었기에 한 줌 밖에 되지 않은 포유류에게 자리를 내주고 멸망했다.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현실에 안주하다보면 발전보다는 퇴보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을 뿐 아니라 후발주자에게 지금의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변화와 혁신은 어떻게 보면 외줄을 걷는 모험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끝에는 다른 이들이 쉽게 따라올 수 없는 막대한 경쟁력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최근의 불황을 기회로 삼아 남들보다 한 발 더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현재보다는 미래를 준비 할 수 있는 현명함을 발휘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