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보는 조선시대의 ‘역병’전
정읍시립박물관 전시실 내달 15일까지
[시사매거진/전북] 지난 4일, 해외에서 입국해 정읍에서 자가격리 중이던 입국자가 추가로 정읍에서 확진돼 정읍#101번(전북#2385)째 확진자가 됐다. 이에 따라 현재 코로나(COVID)19 확진으로 치료를 받는 정읍시민은 모두 5명으로 늘었다. 이런 가운데, 정읍시립박물관이 직면한 코로나19 상황과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감염병 대처 상황을 비교해 엿볼 수 있는 전시를 마련해 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2019년부터 정읍에서 코로나19 확진자와 접촉했던 접촉자(해외 입국 포함)는 모두 2,177명(격리 165명, 격리해제 2,012명)이었다. 검사자는 32,252명(양성 100명, 음성 32,073명, 검사중 79명)으로 이중 완치자는 94명, 사망 1명이다.
현재의 이런 펜데믹(pandemic) 상황은 지난해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WHO)가 전 지구적 감염병의 최고 경고단계를 선언했던 이전과 이후, 전 지구촌이 감염병에 대처해 왔던 상황도 모두 후대를 위해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 후대의 위기 대처에 해법을 제시할 것이다.
2019년 12월 어느 날, 이름도 낯선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우리 삶 속에 불쑥 찾아와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을 감염시켰고,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있어 우리 일상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우리나라에서도 거리두기, 방역, 백신 등 다양하게 대처하고 있지만, 아직도 이 불편한 전염병은 쉽게 물러가지 않고 있다.
600여 년 전, 우리나라 조선시대에서도 두창(痘瘡), 온역(瘟疫), 홍역(紅疫), 호열자(虎列刺)라 불리던 전염병이 발생해 일반 백성은 물론 왕실까지 위협했던 역사가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열악한 의료환경 속에서도 우리 선조들은 역병을 달래기도 하였고, 위협하기도 하며 전염병을 물리쳐 왔다.
정읍시립박물관이 2층 특별 전시실 1부 주제는 ‘기록으로 보는 조선으로 역병’으로 꾸몄다. 조선은 세계적 수준의 기록문화를 이룩한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기록물인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호)의 감염병 기록과 나랏일을 기록한 『승정원일기』(국보 제303호), 『훈민정음』(국보 제70호), 『조선왕조의궤』(보물 제1901호), 『동의보감』(국보 제319호), 『난중일기』(국보 제76호), 『일성록』(국보 제153호) 등에 나타난 조선의 ‘역병’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는 주제로 꾸몄다.
이들 기록물에는 조선시대를 수없이 공포로 몰아넣었던 역병에 관한 내용 등이 담겼다. 조선시대는 역병이 발생하면, 왕이 의관을 파견하여 대처하도록 하였고, 민간에서도 집안의 중요 행사 중 하나인 조상의 제사가 전면 중단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1부 전시에서는 역병으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글로 아들을 애도한 기록물과 풍랑으로 조선에 도착한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역병 상황 등이 참혹한 모습으로 기록된 자료들이 전시됐다. 전시물 가운데는 조선시대, 지금의 증명사진과 같은 관료들의 초상화에 나타난 역병의 흔적(마맛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극 세필(細筆) 초상화의 모습들도 함께 전시됐다.
조선시대의 전염병은 현재까지 남은 다양한 기록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조선시대 역병의 모습과 선조들의 역병 대응 모습들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중에서도 조선시대 대표적인 역병(染疾)으로 불렸던 두창(痘瘡)은 두진(痘疹), 두역(痘疫), 완두창(豌豆瘡), 반진(斑疹), 창진(瘡疹), 천연두(天然痘, smallpox)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렇듯 조선시대 두창-바이러스(Variola-virus)는 급성 발열·발진성 질환을 말하던 것으로, 전염성과 사망률이 매우 높아 한때 전 세계 인구 사망원인의 10%를 차지하기도 했다. 증상으로는 초열(初熱), 출두(出痘), 기창(起脹), 관농(貫膿), 수엽(收靨), 낙가(落痂) 등의 단계가 3일씩 차례대로 진행되는 독특한 경과를 보였다.
두창 감염병은 먼저 감기와 비슷하게 열이 나다가(初熱), 얼굴이나 팔다리에 발긋발긋한 돌기가 솟아오르고(出痘), 그 돌기가 콩알만 하게 부풀어 오르며(起脹), 부풀어 오른 돌기가 곪았다가(貫膿), 점차 나으면서 딱지가 만들어지고(收靨), 최종적으로 딱지가 떨어져(落痂), 움푹 팬 흔적(마맛자국)을 남긴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의 두창은 치사율이 높아 공포의 대상이었던 동시에 모든 사람이 한 번은 앓아야 할 통과의례와 같은 질병으로 여겨졌다. 특히 유아 사망률이 높아 아이들이 두창을 앓은 후에야 비로소 부모가 안심하고 호적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2부 전시는 ‘기록으로 보는 역병 극복’의 주요 주제로 다루었다. 정부는 현재의 코로나19 상황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지구촌도 각국의 자국민을 통제하고, 백신을 확보하고자 온 힘을 쏟고 있다. 우리나라도 감염자 발생 빈도에 따라 거리두기 단계 조정, 역학조사, 백신접종, 개인생활수칙 준수 등을 홍보하며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전 국민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2부에 전시된 ‘기록으로 보는 역병 극복’ 기록들 속에는 조선시대에도 역병이 창궐하면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당시에는 역병 발생 원인을 기근, 영양실조, 위생 불량보다는 원한 맺힌 귀신의 저주나 자연 질서 붕괴 등 비자연적인 현상에 있다고 보았던 사례가 많았다.
이에 따라 나라에서는 역병 극복을 위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왕이 근신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풀거나, 진휼을 추진하였고, 백성들은 종교에 의지하거나, 주술적인 방법으로 역병을 물리치고자 했다. 조선시대에는 역병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여귀(厲鬼)’ 꼽았는데, ‘여귀’란 제사를 받지 못하는 외로운 혼, 창·칼에 죽은 자, 물·불이나 도적에 죽은 자, 재물을 빼앗기고 핍박당해 죽은 자 등등을 말한다.
실제로 ‘비변사인방안지도’의 고부, 정읍, 태인현 지도에도 ‘여단(厲壇)’이 표시되어 있는데, 특히 여제단(厲祭壇)으로 표기된 여단은 역병을 퍼뜨리는 귀신인 여귀(厲鬼)를 달래기 위한 제사인 여제(厲祭)를 지내는 곳이었다.
여단은 한양과 수령이 파견되는 각 읍치(邑治)에 관아・사직단(社稷壇)・문묘(文廟) 등과 함께 반드시 설치되었다. 여제는 특히 매년 봄 청명(淸明)과 가을 7월 15일, 겨울 10월 초 1일에 정기적으로 지내는 제사였는데, 성황(城隍)에게 고하여 모든 영귀(靈鬼)를 불러 모아 음식과 술을 대접하는 여제를 지내며 그 영혼을 달래 병과 재앙을 만들지 않기를 기원했다.
조선시대에도 ‘신찬벽온방’이라 하여 마을 공동체가 함께하는 전염병 예방법이 있었다. 첫 번째는 큰 솥에 향소산(香蘇散)을 달여 사람마다 한 잔씩 마시기, 두 번째는 역병에 효과있는 약재를 붉은 주머니에 12월 그믐 마을 우물에 담갔다가 정월 초 새벽에 꺼내 청주 2병에 달인 후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마시기, 세 번째는 새벽닭이 울 때 마음을 청결히 하고 동・서・남・북 바다신의 이름을 3번씩 외우기, 네 번째는 큰 솥에 물 두 말을 채워 집 한가운데 두고 소합향원 20환을 넣고 달여 향기 피우기, 다섯 번째는 호랑이 머리뼈를 베개 근처에 두고 자기 등이 그것이었다.
조선시대의 이런 감염병 치료법은 허준의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에도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는 ‘마마(媽媽)’ 전 기간 동안 앙갚음 탕을 주로 사용해 감염병을 고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1. 2일에 윤택이 적으면 당귀, 백작약을 더하고, 2. 3일에 끝부분이 푹 꺼지면 천궁, 계피를 더하고, 4. 5일에 광택이 없으면 작약, 계피, 찹쌀을 더하고, 5. 6일에 검붉은 색이 있으면 목향, 당귀, 천궁을 더하고, 6. 7일에 부어오르지 않으면 계피, 찹쌀을 더하고, 7. 8일에 물기가 잘 차오르지 않으면 또 계피, 찹쌀을 더하고, 9. 10일에 고름이 터지지 않으면 찹쌀을 더하고, 11. 12일에 딱지가 지지 않으면 백출, 백복령을 더한다.
3부 전시는 조선시대의 역병 퇴치 후의 상황을 전시 주제로 담았다. 조선시대의 역병 두창은 일반 백성뿐 아니라 왕실에서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왕조실록』에도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 태종 18년(1418)에 기록에는 “성녕대군 하인이 두창에 걸려 죽었으며, 역대 임금 중에서도 숙종, 경종, 영조, 헌종 등이 두창으로 고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고종의 아들 이척(李拓, 훗날 순종)도 여섯 살 무렵 두창에 걸렸는데, 왕실에서는 발 빠르게 의약청(醫藥廳)을 설치하고 두창 치료를 위해 비상체제에 돌입했고, 다행히 왕세자의 병세가 빨리 호전되자 고종은 의약청을 해산하고, 왕세자의 회복을 축하하는 진하연을 열고, 사형수 이하의 죄인들을 모두 석방할 것을 지시하기를 하기도 했다.
관원들도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왕세자두후평복진하계병’을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이 작품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이렇듯 조선시대에 두창에서 완쾌되는 것은 왕실은 물론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백성을 끊임없이 괴롭혀왔던 두창(痘瘡)은 지난 1980년 5월 8일 세계보건기구(WHO) 제33회 총회에서 “지구상에서 천연두(痘瘡)가 완벽하게 사라졌다”라는 선언과 함께 사라진 바 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역병 두창(痘瘡)이 현시대 1980년도에 사라지기 이전까지 두창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따라서 코로나19라는 전염병과 매일 싸우며 살아가야 하는 요즘, 답답한 마음에 나 하나쯤, 한 번쯤은 어때? 라는 안일한 생각들로 생활 속 거리두기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직면한 코로나19 상황도 감염병이 사라지지 않는 한, 끝없이 현시대 우리의 인명을 앗아갈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두창(痘瘡)의 교훈은 현재의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corona virus disease-19) 증상과도 매우 유사한 전염병이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가 시사하는 바도 크다고 할 수 있다.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코로나19는 이후 중국 전역과 전 세계로 확산한 바 있다. 코로나19는 새로운 유형의 코로나바이러스(SARS-CoV-2)에 의한 호흡기 감염질환 감염자의 비말(침방울)이 호흡기나 눈·코·입의 점막으로 전염되며, 표면접촉, 공기 등을 통해서도 전파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코로나19에 감염되면 약 2~14일의 잠복기를 거친 뒤 발열(37.5도 이상) 및 기침이나 호흡곤란, 오한, 근육통, 두통, 인후통, 후각·미각 소실 등의 호흡기 증상이 나타나지만, 무증상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코로나바이러스 대응법으로는 백신 접종, 거리두기, 올바른 손 씻기, 기침 예절 준수, 소독, 환기 등이 있다.
이용찬 기자 chans0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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