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으로 묻힌 질곡의 인생, 노풍이여 편히 잠들길

그를 지탱하는 힘 ‘도덕성’, 죽음과 바꿀 수밖에 없었나
온 국민 이어지는 추모의 물결, 그를 보내야만 하는 비통함에 하늘도 울어

2009-06-09     신현희 차장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인권변호사, 5공 청문회 스타를 거쳐 대통령이 되기까지 생의 절정을 경험했지만, 퇴임 이후 측근 비리로 인한 검찰 출두, 그리고 비극적인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노무현 전 대통령의 63년 인생은 시대의 아픔과 희망 속에 그려진 한 편의 드라마였다.

봉하마을의 15개월을 마지막으로 인생의 뒤안길로 떠나다 

봉하마을의 15개월을 마지막으로 인생의 뒤안길로 떠나다  “좀 잘했으면 어떻고, 못했으면 어떻습니까. 그냥 열심히 했습니다…. 야, 기분좋다.”
지난해 2월25일 퇴임한 뒤 봉하마을에 내려 온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향 주민, 관광객 1만2,000여 명 앞에서 한 인사말이다. 노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1976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고향을 떠난 지 32년 만이다.
피폐한 최근의 모습과는 달리 그당시 얼굴에 제법 살이 있었다. 대통령 시절이 힘들었다고 했는데 그래도 그나마 살이 붙은 걸 보면 요즘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실감케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에서 마을행사에 참여하고, 친환경 오리농법으로 직접 농사를 지으며 귀향생활을 시작했다. 행복한 모습이었다. 마을 뒤 봉화산 숲 정비사업도 시작하는 한편 한림면 화포천 습지와 봉화마을 봄맞이 화포천 자연정화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지난해 가을에는 오리농법을 도입해 지은 이른바 ‘노무현표 쌀’을 생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또 ‘봉하 오리쌀’ 3㎏들이 한 포대는 청와대로도 전달됐다. 손수 농사를 짓고, 손녀를 태우고 자전거를 타며,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를 나눠 마시는 등 소탈한 모습이 언론을 통해 소개되면서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보다 더 국민으로부터 관심과 인기를 얻었다. 이 같은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을 보기 위해 봉하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줄을 이었고, 마을은 전국적인 관광명소가 됐다. 최대 하루 2만 명이 찾아오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매일 오후 관광객에게 연설을 하거나 함께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나와 주세요”라고 관광객들이 입을 모아 부르면 밀짚모자를 쓰고 웃으며 나왔던 사람. 이제는 그 얼굴을 보지 못한다. 권위를 무너뜨린 대통령을 이제 가슴에 묻어야 한다.

마지막까지 파란만장한 승부사 인생 산 ‘노무현’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6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는 그런대로 마쳤지만 학비가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뻔했다. “책값만 먼저 내고 복숭아 농사를 지어 입학금을 나중에 내면 안 되겠느냐”고 통사정한 끝에 학교를 다녔지만 졸업하는 데 4년이 걸렸다. 중학교 졸업 후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3년 장학금 제안을 받고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고교 졸업 후엔 농협 시험에 응시했지만 떨어졌고 삼해공업이라는 작은 어망회사에 취직했다가 한 달 반 만에 그만뒀다.
이후 고향에 내려가 마을 건너편 산자락에 흙집을 짓고 독학으로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29세 때인 1975년 4월 사법시험(17회)에 합격했다.법관에 임용됐지만 그는 8개월 만에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1981년 그의 인생을 또 한번 바꿔 놓는 부림사건을 맡기 전까지 그는 소위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부산 향토기업들의 상속세 반환 소송 등을 도맡다시피 했고 100억 원 이상의 거액 소송을 맡기도 했다. 부산상고 동창회 회장을 지냈으며 요트 타기도 즐겼다. 하지만 부산지역 시국사건인 부림사건의 변호인이 된 그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57일간이나 불법 구금된 학생의 온몸에 난 고문 흔적과 공포에 질린 눈을 보고 사회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는 법정에서 고문과 조작을 폭로하며 검찰과 충돌했다. 이후 그는 민주투사로 변신했고 굴곡의 인생이 시작됐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고 1987년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재야인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87년 2월엔 물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추도집회를 주도하다 최루탄을 뒤집어쓰고 경찰서로 끌려갔다. 검찰은 그에 대해 이례적으로 하룻밤 사이에 4번이나 영장을 청구하기도 했다. 박종철 사건이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면서 노무현의 이름도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그의 활동을 눈여겨보던 당시 김영삼(YS) 통일민주당 총재의 발탁으로 1988년 그는 부산 동구에서 총선에 출마해 정권 실세였던 허삼수 씨를 꺾고 13대 국회에 진출했다. 1989년 12월 전두환 전 대통령의 5공 비리 및 광주항쟁 청문회 때 전 전 대통령을 향해 명패를 집어던진 것이 TV로 전국에 생중계되면서 일약 ‘청문회 스타’가 됐다. 하지만 1990년 1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YS, 김종필(JP)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하자 야당 잔류를 선언하면서 정치적 시련을 겪게 됐다. YS와 결별하고 1년 뒤 김대중(DJ) 총재가 이끌던 신민당과의 야권통합에 합류했으나 1992년 YS의 ‘텃밭’인 부산에서 총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95년에도 부산시장 선거에 나섰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996년 총선 때는 지역구를 서울 종로로 옮겨 출마했지만 또다시 고배를 마셨다. 당시 당선자는 민주자유당 후보로 나섰던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1998년 선거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던 이 대통령이 의원직을 사퇴하자 노 전 대통령은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보궐선거에 출마해 간신히 배지를 달았다. 하지만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그는 다시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한나라당의 아성인 부산으로 뛰어들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바보이기를 자청한 용기’, ‘남들이 꺼리는 길을 고집스럽게 가는 바보’ 같은 찬사가 쏟아졌다. 팬클럽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 결성된 것도 이때다. 바보·노짱·노풍·스타… 그를 향한 수식어들이 친근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1년 해양수산부 장관을 그만두면서 본격적으로 대권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노 전 대통령은 당내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이인제 대세론’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진보진영 내에서도 그를 리더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2002년 봄 그가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설 때 정치권은 ‘무모한 도전’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2002년 3월 국민경선제를 채택한 새천년민주당 대선 경선이 시작되자마자 ‘노무현 드라마’는 시작됐다. ‘반칙과 특권 없는 사회’란 구호와 노사모의 열광적인 지원, 정치개혁의 상징물처럼 간주됐던 ‘희망돼지 저금통’ 등은 거센 ‘노풍(盧風)’을 일으켰다. 경쟁 후보였던 이인제 의원이 장인의 6·25전쟁 당시 좌익 전력을 문제 삼자 그는 “대통령 되려고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라는 대응으로 상황을 역전시키고 후보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YS의 상도동 사저 방문과 현직 대통령이던 DJ의 세 아들 비리 등으로 역풍을 만나면서 한때 60%까지 치솟던 지지율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민주당 내에선 경선 재실시 목소리가 높아졌고, 때마침 한일 월드컵 인기를 업고 부상한 국민통합21의 정몽준 의원과의 후보단일화 압력이 거셌다.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이룬 그의 지지율은 다시 급등했다. 대선 당일 새벽 정 의원이 후보 단일화를 철회했지만 그는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승리했다.

 


실험 정치인 노무현, 그의 미완성 실험은…

실험 정치인 노무현, 그의 미완성 실험은… 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내내 각종 정치적 논란에 휘말렸고 이 중 상당수는 스스로 촉발한 것이었다. 17대 총선 직전인 2004년 3월 야권은 선거중립 의무 위반 등을 들어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다. 이로 인해 63일 동안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으나 탄핵 사태는 메가톤급 역풍을 불러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압승을 낳았다. 하지만 퇴임 전까지 노 전 대통령은 정치, 경제, 대북관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상대의 허(虛)를 찌르는 승부수를 던지는 ‘정치 실험’을 그칠 줄 몰랐다. 2005년 8월 국가보안법 폐지 등이 난항을 겪을 땐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했고, 2007년 4월 임기 말 권력 누수에 부닥치자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제안했다. 이런 정치 스타일은 아파트 값 폭등, 열린우리당의 재·보궐선거 전패 등과 맞물리면서 조기 레임덕을 불렀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이룬 업적에 대해서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특히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선거자금을 둘러싼 정경유착의 고리를 없애려던 노력은 평가받을 만하다. 자신의 지지 세력이 극렬히 반대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라크 파병 등을 밀어붙인 것도 국익을 생각해 내린 결단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노 전 대통령 스스로 “언어와 태도에서 품위를 어떻게 만들어 나가느냐는 준비가 부실했던 것 같다”고 토로했던 것처럼 그의 언행이 대통령답지 못해 ‘한 일’에 비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분석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2008년 2월25일 퇴임과 동시에 고향인 봉하마을로 돌아갔다. 퇴임 직전까지도 “대통령을 그만두면 열린우리당 상임고문으로 남고 싶다”며 정치활동 재개를 꿈꿨지만, 열린우리당 붕괴와 정권교체로 그는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퇴임 후 그는 평범한 농촌 사람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귀향 직후 마을 주변 환경정화 활동에 주력했고 전국을 돌아보며 지역발전을 위한 구상에 몰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귀향 4개월여 만인 지난해 7월 국가기록물 유출 논란에 휩싸였고 지난해 12월엔 형 노건평 씨가 세종증권 비리에 연루되면서 사실상 칩거에 들어갔다. 급기야 올해 4월 박연차 게이트 연루 혐의로 전 가족이 검찰 수사를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는 기득권 세력에 맞서며 한국 사회의 틀을 바꿔 놓으려 도전했고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꿈꿨다. 그러나 그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뇌물을 받은 의혹에 대한 검찰의 수사로 그의 상징인 도덕성이 타격을 받게 되자 결국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마지막 길 지키는 참모들, 친노세력 다시 결집하나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했던 청와대 참모진들과 전직 국무위원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하고 있다. 전직 총리와 장관, 청와대 비서진들이 총출동해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어 마치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 및 내각이 고스란히 봉하마을로 옮겨온 듯한 모양새다. 현재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 절차 협의와 조문객 맞이 등 모든 의사결정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사람은 문재인 전 대통령 비서실장. 그는 묵묵히 노 전 대통령의 빈소를 지키면서 권양숙 여사 등 유족들과 상의를 거쳐 향후 장례 절차와 관련된 노 전 대통령측 입장을 최종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문 전 비서실장은 한승수 국무총리,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과 직접 연락을 취하면서 국민장 절차 문제를 협의했으며, 조문을 온 주요 정치권 인사들을 영접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문 전 실장 아래로는 전해철 전 민정비서관과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등이 사실상의 ‘실무 사무국’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또 이해찬·한명숙 전 총리, 문희상·김우식·이병완 전 비서실장 등 원로 그룹의 역할도 눈에 띈다. 이들은 문 전 비서실장과 상의를 하면서 노 전 대통령의 장례절차와 관련해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언론 분야는 홍보수석실과 춘추관 멤버들이 담당하고 있다. 천호선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장례 및 조문 절차와 관련된 상황을 총괄 브리핑하고 있고, 김현, 유민영 전 춘추관장 등이 실무지원을 맡고 있다. 이와 함께 참여정부 시절 홍보수석실 직원들과 전직 행정관들도 장례지원을 하면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 밖에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이용섭 전 행정자치부 장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김세옥 전 청와대 경호실장, 백종천 전 청와대 외교안보실장 등 전직 장관, 수석들은 교대로 상주역할을 맡으며 빈소를 지키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이른 감이 있기는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갑작스럽게 정치적 기둥을 잃게 된 ‘친노(親)’ 그룹의 향후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 국정의 중심에 섰던 친노 그룹은 민주당 안희정 최고위원과 이광재 의원 등이 사정정국에 휘말리면서 정치적 동력을 상당부분 잃은 상태.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친노 세력이 재결집하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전망도 나온다. 많은 국민들이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최후에 동정심을 갖고 있는 데다 사정당국을 비롯해 현 정권의 책임론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 친노 그룹에는 우호적인 환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친노 그룹 역시 “정치적 타살”을 주장하는 등 향후 정국에서 사정당국과 현 정권의 국정운영에 극도의 불만을 표출할 가능성이 높다. 일각에서는 이들이 지지자들과 함께 참여정부를 평가하고 ‘노무현 정신’의 계승을 시도하는 동시에 현 정권에 대한 정치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는 곧 정치적 재결집의 명분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말없이 눈물만 흘린 아버지 같았던 형 건평 씨, 죄책감 클 듯
뭐니뭐니 해도 가장 가슴아픈 사람들은 바로 가족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건평 씨는 24일 새벽 김해 봉하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노 전 대통령의 사저와 빈소를 찾았다. 작년 12월5일 세종증권 매각비리 연루혐의로 구속된 이후 5개월20여 일 만에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나 고향 땅을 밟은 것. 건평 씨는 전날 교도소에서 접견인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해들은 뒤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의 성장과정에서 건평 씨는 아버지나 다름없었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의 큰 형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후 둘째형이었던 건평 씨는 세무공무원을 하며 동생 뒷바라지를 했던 사실상 가장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당선된 후 고향을 찾아가 건평 씨 무릎을 베면서 “형님, 저 대통령 됐습니다”라고 응석을 부릴 정도였다. 하지만 건평씨는 노 전 대통령 취임 이후 ‘봉하대군’으로 불리며 구설수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건평 씨는 2003년 인사 개입설로 입방아에 올랐다가 대통령 친인척 비리와 관련한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하지 않아 벌금 200만원에 약식기소됐다 정식 재판에 회부됐다. 또 2004년 4월에는 대우건설 고(故) 남상국 전 사장으로부터 “사장직을 연임할 수 있도록 힘써 달라”는 청탁과 함께 3천만 원을 수수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가 집행유예를 선고받기도 했다. 퇴임 후인 작년 말에는 세종증권 인수과정에서 29억6천만 원의 검은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돼 지난 14일 징역 5년에 추징금 5억7천여만 원을 선고받았다. 노 전 대통령 입장에서 건평 씨는 ‘불안한 주변’이었고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경계하고 감시해야할 친인척 1순위로 꼽혔지만 마지막까지 공개적으로 형을 비판한 일은 없었다. 작년 말 건평 씨가 구속됐을 때도 “전직 대통령의 도리가 있겠지만 형님 동생의 도리도 있다. 형님이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는데 (내가) 사과해 버리면 형님의 피의사실을 인정해버리는 그런 서비스는 하기 어렵다”고 건평 씨에 대한 예를 지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건평 씨 구속과 동시에 봉하마을 방문자를 상대로 한 관광객 인사를 중단한 채 사실상 칩거상태에 들어갔고, 이후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건평 씨는 노 전 대통령의 퇴임을 나흘 앞둔 작년 2월21일 “고향에서 형제끼리 지내면서 정을 나눴으면 좋겠다”고 애틋한 정을 표시했지만 불과 1년3개월 만에 잠시 동생의 장례를 주관해야 하는 비극적 상황을 맞게 됐고 동생을 먼저 보낸 데 대한 죄책감도 만만치 않으리라 생각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치판에서 소수파를 자처했고, 지역 정치를 해소한다며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국 정치에 뿌리박힌 권위주의를 깨려 했고 약자의 편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좀 잘했으면 어떻고, 못했으면 어떤가. 그냥 열심히 한 그의 모습만 기억하자.

뭐니뭐니 해도 가장 가슴아픈 사람들은 바로 가족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건평 씨는 24일 새벽 김해 봉하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노 전 대통령의 사저와 빈소를 찾았다. 작년 12월5일 세종증권 매각비리 연루혐의로 구속된 이후 5개월20여 일 만에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나 고향 땅을 밟은 것. 건평 씨는 전날 교도소에서 접견인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해들은 뒤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의 성장과정에서 건평 씨는 아버지나 다름없었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의 큰 형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후 둘째형이었던 건평 씨는 세무공무원을 하며 동생 뒷바라지를 했던 사실상 가장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당선된 후 고향을 찾아가 건평 씨 무릎을 베면서 “형님, 저 대통령 됐습니다”라고 응석을 부릴 정도였다. 하지만 건평씨는 노 전 대통령 취임 이후 ‘봉하대군’으로 불리며 구설수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건평 씨는 2003년 인사 개입설로 입방아에 올랐다가 대통령 친인척 비리와 관련한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하지 않아 벌금 200만원에 약식기소됐다 정식 재판에 회부됐다. 또 2004년 4월에는 대우건설 고(故) 남상국 전 사장으로부터 “사장직을 연임할 수 있도록 힘써 달라”는 청탁과 함께 3천만 원을 수수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가 집행유예를 선고받기도 했다. 퇴임 후인 작년 말에는 세종증권 인수과정에서 29억6천만 원의 검은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돼 지난 14일 징역 5년에 추징금 5억7천여만 원을 선고받았다. 노 전 대통령 입장에서 건평 씨는 ‘불안한 주변’이었고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경계하고 감시해야할 친인척 1순위로 꼽혔지만 마지막까지 공개적으로 형을 비판한 일은 없었다. 작년 말 건평 씨가 구속됐을 때도 “전직 대통령의 도리가 있겠지만 형님 동생의 도리도 있다. 형님이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는데 (내가) 사과해 버리면 형님의 피의사실을 인정해버리는 그런 서비스는 하기 어렵다”고 건평 씨에 대한 예를 지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건평 씨 구속과 동시에 봉하마을 방문자를 상대로 한 관광객 인사를 중단한 채 사실상 칩거상태에 들어갔고, 이후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건평 씨는 노 전 대통령의 퇴임을 나흘 앞둔 작년 2월21일 “고향에서 형제끼리 지내면서 정을 나눴으면 좋겠다”고 애틋한 정을 표시했지만 불과 1년3개월 만에 잠시 동생의 장례를 주관해야 하는 비극적 상황을 맞게 됐고 동생을 먼저 보낸 데 대한 죄책감도 만만치 않으리라 생각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치판에서 소수파를 자처했고, 지역 정치를 해소한다며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국 정치에 뿌리박힌 권위주의를 깨려 했고 약자의 편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좀 잘했으면 어떻고, 못했으면 어떤가. 그냥 열심히 한 그의 모습만 기억하자.

  

검찰 수사 중 자살한 사람들-무리한 수사였나 자존심 지키기였나
 

노무현 전 대통령,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남상국 전 대우건설 회장, 안상영 전 부산시장…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수사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검찰의 무리한 수사방식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대검찰청 홈페이지는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검찰이 무리한 수사를 해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비난이 확산되고 있다. 이에 따라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따른 후폭풍을 경계하는 등 여론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검찰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최대한 신경을 썼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만의 진술을 토대로 전 정권에 대한 무리한 사정수사를 벌였다는 비판 여론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직 대통령과 그 가족에 대한 구체적인 혐의까지 언론에 실시간 노출된 것도 검찰이 비난여론을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검찰은 정확한 보도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설명이지만 노 전 대통령이 지난 2006년 9월 회갑기념 선물로 박 전 회장에게서 1억원 상당의 고급시계 2개를 받았다는 지극히 사소한 혐의사실까지 언론에 보도돼 논란이 됐다. 이와 관련해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은 지난 23일 기자들과 만나 “검찰과 언론이 핑퐁 게임을 하듯 피의사실을 주고받으면서 의혹을 부풀려왔다. 전직 대통령을 시정잡배로 만들었다”며 검찰 수사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검찰 조사 도중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데는 개인적인 심리적 압박감 등이 크게 작용하지만 피의사실이 실시간 공개되면서 의혹이 증폭되고 해명 자체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대한 억울함 등도 작용한 측면이 크기 때문에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에 대한 엄격한 법적용 및 내부 자성노력 등 대책마련이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실제 검찰 조사 도중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유명 인사들은 노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고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남상국 전 대우건설 회장, 안상영 전 부산시장 등 의외로 많다. 고 정 전 회장은 2003년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조사를 받고 그 해 8월 현대아산 집무실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다. 2004년에는 무려 다섯 명의 피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검찰을 충격에 빠뜨렸다.노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 씨에게 인사청탁을 한 대가로 3,000만원을 건넨 혐의를 받고 있던 남 전 대우건설 회장이 한강에 투신했으며 운수업체로부터 수천만원의 뇌물을 수수한 의혹을 받고 있던 안 전 부산시장과 부산국세청 공무원 전모 씨가 자살했다. 남 전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대우건설 사장처럼 좋은 학교를 나오신 분이 시골에 사는 별볼일 없는 사람(노건평 씨)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돈 주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장면을 지켜본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해 4월 말에는 건강보험공단 재직 시절 납품비리 등 의혹을 받아 서울남부지검에서 조사를 받은 박태영 전남지사가, 6월에는 전문대 설립 과정에서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검찰의 내사를 받던 중 이준원 파주시장이 한강에 투신했다. 2005년에는 국정원 도청 사건으로 조사를 받은 이수일 전 국정원 2차장이 자택에서 목을 맸고 2006년에는 경찰청 차장 비서였던 강희도 경위가 브로커 윤상림 사건과 관련한 검찰 소환에 불응한 채 강원도의 한 산에서 목숨을 끊었다. 지난해에는 중부발전 사장 재직 당시 한 기업체 회장에게서 수천만원의 뇌물을 받은 정황이 포착돼 수사선상에 오른 김영철 전 국무총리실 사무차장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