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1월 송광수 검찰총장이 “2005년을 과학수사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발표한 지 4년이 지났다. 당시 과학수사기획관을 신설하고 서울중앙지검 컴퓨터수사부를 첨단범죄수사부로 바꾸는 등의 방안과 DNA은행 설립 입법 추진 등의 대안을 내놓았다. 그 중 성과라면 디지털포렌식센터 개관일 것이다. 지난 2008년 10월31일 개관한 디지털포렌식센터는 과학수사 원년을 선포한 지난 2005년부터 144억여 원을 투입해 2006년 12월 착공하기 시작해 서울 서초동 현 대검청사 옆에 지상 6층, 지하 1층으로 연면적 7,884㎡ 규모로 세워졌다. 센터에는 영상·음성분석실, 심리분석실, 문서감정실, DNA포렌식연구실, 디스크분석팀, 모바일분석팀, 데이터베이스분석팀 등 검찰이 운영하는 과학수사 부서가 모두 들어가 있다. 검찰이 여러 곳에 퍼져 있던 부서를 한 곳에 집중시켜 증거수집과 분석시간을 최소화하고 종합적인 분석을 하기 위한 조치라 하겠다.
경찰서로부터 의뢰받은 DNA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에서 감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27일. 국과수 내규에는 감정기일이 2주일이라고 명시돼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실정이다. 국과수에 따르면 지난 2005년 의뢰받은 DNA분석 건수는 모두 3만 1,700여 건, 하루에 100건 가까운 수치이지만 현재 국과수의 DNA 감정인원은 20여 명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처럼 과학수사를 위해 일하는 전문인들이 턱 없이 부족하다는 것. 일본의 경우 500명, 대만은 180명에 비해 20여 명(2005년 기준)에 불과한 우리나라의 경우 한 사람당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강력팀의 한 형사는 “유전자 감식 결과를 기다리다 신병확보가 어려워서 범인을 일단 놓아주는 문제까지 발생 한다. 이 때문에 재범의 우려가 높다”고 토로했다. 한국의 과학수사는 아직 한계가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과학수사가 아닌 ‘가학수사’ 논란 언제까지
지난 1995년 6월 서울 은평구의 한 아파트 7층에서 작은 화재가 발생했다. 현장에서는 치과의사인 여성과 한 살 된 딸이 피살된 채 발견됐다. 사건 용의자로 지목된 남편 이 모씨는 살인혐의로 기소됐고 1심 사형, 항소심 무죄, 대법원 유죄 취지 파기환송 등을 선고받았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 재판은 다시 고법에서 무죄 선고와 대법원 확정판결로 8년 만에 종결됐다. 이 사건의 재판에서 최대 쟁점은 사망시간이었다. 사망시간이 이 씨 출근시간인 오전 7시 이전이면 이 씨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고 7시 이후면 제 3의 인물이 범인이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재판과정에서 검찰이 제시한 증거는 빈약했다. 사망시간 추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주검의 직장 온도를 재지 않은데다 주검이 담겨져 있던 욕조물 온도도 며칠이 지난 후에야 당시 수사관 손등에 물을 떨어뜨려 보고 추정했다. 심지어 감식반이 촬영한 사진도 사건현장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못했고 화재를 재연하기도 했지만 오차가 너무 컸다. 결국 이 사건에서 검찰과 경찰은 제대로 된 과학수사 없이 이 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던 것이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경우 10건으로 추정되는 연쇄살인에 11명이 희생된 이 사건은 명 모(당시 21세)씨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사망하는 등 오명을 남겼다.
경찰 관계자는 “과거 한국경찰의 수사가 ‘선 자백, 후 증거 취득’ 구조였다면 과학수사는 ‘선 증거, 후 자백 취득’을 뜻한다”며 “일선 형사들 사이에 농담처럼 통용되는 ‘과학수사’라는 용어가 자백을 중심으로 한 ‘가학(加虐)수사’를 의미하는 것은 경찰역사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미국의 현장감식 실습장 ‘시체농장’을 아시나요
일명 ‘시체농장(Body Farm)’이라 불리는 미국 테네시 주립대학에서 운영하는 법의인류학연구소는 시체 부패를 연구하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130여구의 시신들은 100% 기증받은 것으로 절반은 사망 당시 그대로, 절반은 부검 후에 옮겨진 시체이다. 이곳은 실제 인간의 시체를 물웅덩이, 그늘진 곳, 지하 등 숲 속 곳곳에 버려두고 시간 경과에 따른 시체의 부패 상태를 관찰한다. 사망 후 피부 색깔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등 시체가 부패하는 과정을 연구할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현장감식 실습장이다. 부패 연구를 위해 숲 곳곳에 자연 상태 그대로 방치했다가 1년 후 뼈만 앙상하게 남은 유골들을 실내 연구실로 옮겨 보존한다고 한다. 시체 부패 연구 외에도 물속에 버려진 시체가 얼마 만에 물에 뜨는지, 시체가 썩는 과정에 어떤 곤충이 생기는지, 시체가 부패하면서 인근 토양과 식물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등에 대해 연구한다.
미국에선 과학수사관이나 FBI 요원이 되려면 누구나 여기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 FBI 증거복구팀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문 채취, 혈흔 및 유골 분포 분석, 무덤 탐지 능력에 대한 평가시험을 치른다. 특히 미국의 경찰은 과학수사를 위해 수년간 CSI식 훈련을 받는다. ‘CSI’는 ‘Crime Scene Investigation’의 약자로 범죄현장수사를 뜻한다. CSI 요원들은 범죄현장 감식 전문가이자 화학자, 곤충학자, 인류학자이다. 국립 과학수사학교만 하더라도 400여 시간이 넘는 현장실습 훈련을 강행한다. 전문지식이 부족해 단서가 유실되고 증거물이 훼손되어 미제사건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반면 우리나라는 일선경찰서 형사들 중에서 현장감식 수사관을 선발해 이들에게 과학수사기법 2주, 감식전문기술 3주 교육을 한다. 몽타주 그리기, 최면, CCTV분석, 범죄분석 등을 세부적으로 배운다. 미국처럼 현장에서 체험학습을 할 수도 없다. 그나마 지난 2000년 생긴 현장감식실습장마저 없어졌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전국 233개 경찰서에 700여 명의 과학수사관이 활동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2,300여 명으로 30%에도 미치지 못한다. 서울시내 일선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현장감식 요원은 3~7명이다. 하지만 현장감식 업무에 전념하는 요원은 거의 없다. 형사과에 소속된 이들은 살인사건뿐만 아니라 절도사건 현장 등 하루에 10~15회 출동하므로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국과수, 설 곳 없는 법의관 “바로 잡아야”
과학수사의 시작은 현장감식이다. 현장감식은 변사 현장에서 증거를 수집하는 일이자 수사의 기본 틀이다. 특히 사건 현장에는 법의학자가 함께 출동해야 한다. 시체를 검사하는 검시(檢屍)가 죽음의 진실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뿐만 아니라 사건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법의관이 수사기관으로부터 독립해서 검시할 권한이 없다. 의료법에서 보건복지부가 현장검안(의료법 18조) 자격을 의료법에 종사하는 의사와 치과의사, 한의사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검사는 사인과 사망 시각 등을 추정한 의사의 시체검안서를 보고 부검 여부를 결정한다. 결국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하루 이틀이 걸린 후 냉장 보관된 사체를 인계 받아 부검을 하는 시스템이다.
반면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법의관이 사건현장에서 검시를 하고 검안서를 작성한다. 일반 의사가 검안서를 작성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과학수사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는 셈이다.
누구보다 초동수사에 많이 참여하면서 수사에 돌파구를 열어줘야 할 법의관들이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국과수에서 기계적인 부검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법의관들은 하나같이 처음부터 사건현장 수사에 참여해야 사망원인과 사망 종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민간 법의학 전문기관을 설립한 한길로 법의학연구소 소장은 “죽음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부검의가 현장감식에 참여해야 한다”면서 “처음에 봤을 때 시신이 있다. 사람이 죽었다. 근데 이것이 살인이냐 아니면 자살이냐 사고사냐 하는 것에 따라서 법적처리 자체도 달라지고 수사하는 방향도 달라지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국과수의 법의관은 30명으로 이들은 매년 약 7,000건의 시신을 부검한다. 법의관 1인당 약 230여 건에 달할 정도로 과중한 업무량을 소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과수의 양경무 법의관은 “검찰이나 경찰의 시신부검 요청은 모두 긴급한 상황에서 이뤄지지만 인력부족으로 꼼꼼하고 세심하게 일처리를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현재 봇짐 싸는 법의관들이 늘어 현재 중부분소를 비롯해 대전분소, 부산분소 법의관은 전원 공석으로 남아있는 상황이다. 국과수의 인원부족 현상은 의사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2부 10과 4분소로 구성된 국과수의 전체 정원은 281명이지만 현자 인원은 240여 명 정도에 그치고 있다.
법의학의 시작은 현장이다. 그 현장을 지켜야 할 법의학자들이 설 곳이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 의료법이 곧 개정을 기다리고 있다. 빠르면 금년 하반기부터는 국립과학연구소 등에 근무하는 전문 의사들에게 검안서를 발부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사건 현장에 직접 투입되어 검안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과학수사가 중요하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범죄는 점점 지능적으로 변해가는 데 우리나라 수사방식이 늘 제자리라면 앞으로 더 많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이나 개구리 소년들 같이 끔찍한 일을 겪는 피해자들이 속출 할 것이다. 다시는 이러한 사건들의 희생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완전범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과학수사만이 해결책이다. 그러나 현재 경찰의 과학수사 인력은 1,000여 명에 불과하다.
경찰청 과학수사계 관계자는 “인력이 모자라 강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과학수사 요원 한 명이 출동하기도 한다. 최소한 2인 1조로 움직여야 신속하고 철저한 현장 감식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CSI 요원은 범죄 현장 감식 전문가로 화학자, 곤충학자, 인류학자 등 다양한 특기를 소유한 전문 인력들이다. 이들은 400시간이 넘는 현장 실습 훈련을 받는가 하면 수년간 CSI식 훈련을 받고 양성된다. 우리의 과학수사 인력은 지원자들이 6주 정도의 교육을 받고 현장에 투입된다. 이에 최근 체계적인 과학수사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노력중이다. 지난 2006년 2월22일부터 경찰이 도입한 범죄를 예방하는 ‘나비 시스템(나비형사활동)’을 비롯해 앞으로 2015년 까지 과학기술부와 대검찰청이 첨단 수사기법을 공동 개발키로 합의했다.
“완전범죄는 없다” 2015년까지 첨단 수사기법을 공동 개발 | | 과학기술부와 대검찰청은 지난 2006년 2월 지능형 범죄에 대처하기 위해 2015년까지 첨단 수사기법을 공동 개발하기로 합의했다. 미세흔적 탐지, 거짓말 탐지, 미세 DNA 분석 등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꿈같은 과학수사 기술이 가득하다. 미래의 미세흔적 탐지기술은 나노미터(㎚·10억분의 1m) 정도의 미세입자를 찾아낼 수 있다. 옷에 묻어 있는 미미한 마약가루를 탐지할 수 있는 수준이다. 폴리그래프(거짓말 탐지기)를 보완, 거짓말할 때 일어나는 눈 깜박임, 동공 크기, 얼굴 온도 변화 등 작은 생체 변화까지 측정한다. 말 떨림이나 사용 어휘 변화, 어색한 행동 등 언어 비언어적 행동 차이를 판단해 거짓말 여부를 가리는 측정 장치도 선보일 전망이다. 또한 극소량의 DNA만으로도 신원 파악이 가능해지고 범인 판별 속도도 빨라진다. 범죄 현장에서 채집된 체모나 체액은 곧바로 DNA 분석에 들어간다. 현재 분석 가능한 샘플의 최소 무게는 1ng(나노그램·10억분의 1g) 정도. 새 분석 기법이 개발되면 0.1ng까지 내려갈 수 있다. 검찰은 이들 기술이 순조롭게 개발되면 이동형 분석장치로 제작한 뒤 일선 수사기관에 보급해 현장형 과학수사를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