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로 성공 거둬 사회를 바꾸는 데 쓰겠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선택 ‘더바디샵’

2009-05-18     신현희 차장

   
▲ 사업보다 사회를 위해 더 많이 일했던 아니타 로딕, 그녀의 경영철학은 ‘인간과 자연을 존중하지 않는 사업이란 공허하며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업은 더욱 번창했고 그녀로 인해 사회는 한걸음 씩 바뀌어 갔다.
자연주의를 표방한 화장품의 원조는 ‘더바디샵(The Body Shop)’이다. 이미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는 창업주 아니타 로딕(Dame Anita Lucia Roddick)의 마인드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아름다운 삶에 대한 명제를 던지고 이에 대한 정답을 스스로 밝힌 여성 CEO다.
그런 그녀가 2007년 9월 10일(영국 현지시간), 향년 64세의 나이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로딕의 마지막 약속은 자녀들을 위한 유산으로 단 한 푼도 남기지 않겠다는 것. 사업이 큰 성공을 거둬 수백만 파운드에 이르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대신 전액 자선단체에 기부하겠다는 약속이었다.더 타임스에 따르면 실제로 로딕은 타계 직전 5,100만 파운드를 자선단체에 기부했고 단지 65만 파운드 가량만 유산으로 남겨뒀다. 하지만 이 금액마저도 세금을 내기 위해 남겨둔 것으로 드러났다. 자녀들도 이 아름다운 약속 이행을 지지했다. 생전에 로딕은 “돈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장 나쁜 것은 탐욕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게 그녀는 아름다운 기부를 남긴 채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제부터 세상은 천천히 그녀를 잊기 시작할 것이다. 로레알이 인수한 더바디샵은 아마도 몇 년 쯤 지나 아니타 로딕의 정신과 이미지가 사라질 지도 모른다. 가정폭력 반대 캠페인이나 환경보호 캠페인을 중단할 수도 있고 으레 화장품 회사가 강조하는 ‘주름없는 얼굴이 아름답다’고 외칠 지도 모른다.
사업보다 사회를 위해 더 많이 일했던 아니타 로딕, 그녀의 경영철학은 ‘인간과 자연을 존중하지 않는 사업이란 공허하며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업은 더욱 번창했고 그녀로 인해 사회는 한걸음 씩 바뀌어 갔다.

   
▲ “비즈니스도 선할 수 있다”, “주름은 가리고 숨겨야 할 것이 아닌 당신의 아름다움”. 이러한 마인드를 가진 로딕이 운영하는 더바디샵의 미션은 ‘우리의 사업을 사회와 환경변화 추구에 바치자’는 것이다. 환경과 인간을 위한 삶을 살고자 한 그녀의 마음이 곧 기업이 수행해야 할 미션으로 이어진 것이다.
세상이 궁금해 떠난 아프리카 여행에서 다시 태어난 로딕
로딕은 1942년 영국 해변 마을 리틀햄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해변의 작은 식당을 운영하며 세 딸과 아들을 키워냈다. 로딕의 근검절약 정신은 모두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10살 무렵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책을 보면서 로딕은 자신에 대한 강한 지각을 가졌다. 정신적인 분노가 깨어난 것이다. 그녀는 정의롭지 못한 것, 인간성을 해치는 것들에 대한 강한 반발심을 가졌고 세상에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행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사회주의적인 로딕이 탄생했는 지도 모르겠다.
이후 그녀는 시골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그 자리에만 머물기에는 세상이 너무 궁금해서, 알뜰히 모은 돈으로 아프리카 오지를 돌았다. 흘러흘러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들렀던 그녀는 인종차별의 현장에 충격을 받고 마지막 행선지인 스위스에서 국제 비정부기구(NGO) 활동을 하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로딕이 다시 영국으로 왔을 때 그의 어머니는 젊은 스코틀랜드 출신 남성 고든 로딕을 소개시켰다. 밖으로만 떠돌던 딸을 한 자리에 앉히려던 의도가 잘 맞았던 셈. 열정적인 그들은 곧 사랑에 빠졌고 딸 둘을 얻고야 결혼식을 올렸다. 젖먹이 딸 둘을 데리고 어머니 식당 일을 도우며 살고 있을 무렵, 그녀의 남편은 어릴 적 꿈이 생각나 아내가 선선히 보내준 여행 ‘말 타고 세계 일주’를 떠나고, 그녀 또한 남편의 빈자리를 메우며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다. 그녀는 생계가 막막했으나 마땅한 경험도 없고 사업적인 혜안도 없었다. 로딕은 “내가 사업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고, 아무도 사업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고 사업에 첫 발을 내딛던 시기를 회상했다.

1976년, 천연성분의 자연주의 리필 화장품 탄생
‘더바디샵’의 탄생은 이렇게 평범했다. 모든 사업이 그렇듯 생계를 위해서… 하지만 그녀의 살아있는 의식은 ‘더바디샵’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일으켰다.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윤추구지만 그녀는 이보다 앞서 인류와 환경을 생각하는 기업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무엇을 할지 고민하던 그녀는 앞서 세계를 떠돌며 만난 원주민들이 피부와 모발을 관리하는 비법이라며 일러줬던 천연 성분의 화장품을 떠올렸다. 더불어 근검절약하는 습성으로 ‘덜어서 쓰는’ 화장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리필의 시작이다. 불필요한 포장을 줄이는 것은 물건을 파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효율적이고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경제적이라는 발상이었는데, 이후 ‘리필’이 가져다 준 경제적인 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화장품 사업은 과대포장에 쓰레기를 양산하며 특히 여성들에게 거짓과 사기를 일삼아 이뤄질 수 없는 꿈을 파는 악덕산업”이라 열변을 토한 로딕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1976년, 이렇게 더바디샵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25개 자연산 제품과 함께.
6개월 후 더바디샵은 두 번째 점포를 열었다. 남편 고든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합류, 자금지원을 통한 작업에 주력했고 이를 통해 프랜차이즈 네트워크를 확대할 수 있었다. 이후 유럽은 물론 전 세계로 지점망이 확대됐고, 지난 1997년 한국에도 들어왔다.
“고든과 나는 더바디샵이 1984년에 주식시장에 상장되고 나서야, 이곳은 혁신적인 화장품 회사라기보다는 뭔가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는 회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바디샵의 경영 강령은 ‘우리의 비즈니스는 사회적, 환경적 변화에 공헌한다’는 핵심 공약과 함께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더바디샵은 그녀의 의식이 고스란히 묻어난 ‘아름다운’ 사회적인 기업인 것이다.

1980년대부터 로딕이 생각하는 본격적인 환경 캠페인 실시
“비즈니스도 선할 수 있다”, “주름은 가리고 숨겨야 할 것이 아닌 당신의 아름다움”.
이러한 마인드를 가진 로딕이 운영하는 더바디샵의 미션은 ‘우리의 사업을 사회와 환경변화 추구에 바치자’는 것이다. 환경과 인간을 위한 삶을 살고자 한 그녀의 마음이 곧 기업이 수행해야 할 미션으로 이어진 것이다.
로딕은 다른 경영자들이 통상적으로 기업의 이윤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천연화장품은 소비자들에게도 획기적인 제품이지만 전 세계 오지 원주민들로부터 그들의 오염되지 않은 환경에서 재배한 천연원료를 공급받아 재료의 품질도 제고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경제적인 자립을 만들어 주자는 것도 그녀가 생각하는 중요한 의미였다. 이러한 윤리적인 경영이 소비자에게 큰 호응을 얻으면서 회사와 제품의 이미지를 높였고 이것이 매출로 이어진 것도 사실이다.
더바디샵의 본격적인 환경 캠페인은 1980년대 중반부터 시행됐다. 1986년 세계적인 환경운동기구인 그린피스와 함께 진행한 ‘고래살리기 운동’을 필두로 하여, 환경문제 인식 촉구운동(1987년), 산성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캠페인(1987년), 브라질 열대우림 보호 운동(1989년), 가정에서 사용하는 에너지와 쓰레기 양 줄이는 운동(1994년), 프랑스 정부의 태평양 핵실험 반대(1995년) 등 적극적으로 환경보호를 주장하며 세계적인 각성을 촉구하는 운동을 펼쳤다.
더바디샵은 특히 동물실험에 강하게 반대하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제품 포장 겉면엔 ‘동물실험반대(Against Animal Testing : AAT)’란 문구가 선명하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위해 동물과 자연을 파괴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됐다는 것이 로딕의 철학이다. 뿐만 아니라 로딕은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서도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지난 1995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자아존중’ 캠페인은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여성들을 위한 법령제정을 촉구하는 등 여성들의 권익보호를 위해서도 꾸준한 활동을 했다.
로딕은 “내가 열정적으로 임하는 사회책임, 인간성 존중, 환경, 동물보호, 커뮤니티 트레이드에 대한 믿음은 회사의 가치와 분리해서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더바디샵이 한 인간의 쇼를 보여주진 않는다. 수천 명의 사람이 공통의 목적과 가치를 공유하는 유기체로 더 바디샵은 굳건히 존재한다”고 피력했다.

   
▲ 1976년, 더바디샵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25개 자연산 제품과 함께. 6개월 후 더바디샵은 두 번째 점포를 열었다. 남편 고든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합류, 자금지원을 통한 작업에 주력했고 이를 통해 프랜차이즈 네트워크를 확대할 수 있었다. 이후 유럽은 물론 전 세계로 지점망이 확대됐고 지난 1997년 한국에도 들어왔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당신이 여성임을 자축하는 것 자체
그녀의 이러한 움직임이 모여 ‘아름다운 기업’을 만들었다. 맨 손으로 시작해 세계 최고의 화장품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기업의 사회적·윤리적 책임을 다한 가장 모범적인 기업으로 꼽히는 더 바디샵. 그렇기에 6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그녀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큰지도 모르겠다.
더바디샵이 내놓은 미의 기준은 달랐다. 이곳의 미적 철학은 ‘당신이 여성임을 자축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평범한 여성들이 이곳에 열광하는 것이다.
“슈퍼모델과 같지 않은 30억 명의 여성이 존재한다.” 더바디샵의 카피는 현실적이다. 이것이 사실이고 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 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고 여성이 외모에 얽매이지 않고 여성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꾸밈없는 삶인 것이다.
그녀는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의 삶과 일에 더 열정적이 되어갔다. 로딕은 “가장 흥미로운 것이 있다면 나이를 먹을수록 더 급진적이 되어 간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도로시 셰이어는 ‘나이 먹은 여자는 지구의 힘으로도 멈출 수 없다’고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이렇게 점점 더 열정적인 기업가로 사회 운동가로 나이를 들어갔고, 너무 이른 64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나 더 큰 아쉬움을 남겼다.
세상에 어떤 화장품 회사 오너가 정치적·사회적인 행동주의에 빠져있을까. 나의 의문에 로딕은 이러한 답을 남겼다. “비즈니스 우먼으로서의 나의 경험상 정치적인 인식이나 행동주의가 빠져있다면 이는 범죄적이고 무책임한 것이다.”

“정치적인 실천은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의무다.”
그녀는 학교에서 경영학을 배우지 않아 성공할 수 있었다.
1987년, 화장품기업 ‘더바디샵’은 영국 재계가 선정한 ‘올해의 기업’ 상을 받았다. 수상식에서 아니타 로딕 회장은 동네 가게들을 억압하는 횡포와 공룡처럼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성, 여성 차별로 대변되는 영국 재계와 대기업들을 공격했다. 영국 재계 거물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노골적인 거부감을 표시했다.
이러한 그녀의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소위 성공했다는 그녀는 평범한 주부가 생계를 위해 바디제품으로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시작했다. 경영학을 배우거나 화장품에 대해 공부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세계 오지를 돌며 자연스럽게 습득한 천연 화장품으로 승부를 건 것이었다. 이렇게 비즈니스 우먼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너무도 무책임한 기업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바꾸려했다. 자신이 나서서 실천하고 나무라고 질책하고… 자유무역과 세계화 반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몸소 실천하는 것만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직관적이고 창의적인 리더십으로 회사를 이끌었다. 그녀는 “내가 비즈니스에 대해 몰랐던 것이 비즈니스에서 가장 큰 힘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반전운동, 인권운동, 환경운동으로 지구 곳곳을 누비면서 개인적이나 정치적인 이유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상을 수상한 아니타 로딕. 그녀는 평화를 부르짖으며 세계를 떠돌아다닌 히피족이기도 하다. 그녀는 떠났지만 자연주의에 기반한 더바디샵의 기업가치는 영원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