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청산, 대한민국은 항상 ‘무풍지대’였다

엇갈린 역사와 현실로 제거되지 못한 친일잔재청산 ‘역사 복원인가 자학인가’

2009-05-06     신혜영 기자

안익태, 최승희, 윤해영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 대거 포함
민족문제연구소(임헌영 소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윤경로 위원장/이하 편찬위)가 7년 남짓 걸쳐 준비한 친일인명사전이 드디어 오는 광복절에 발행된다.
박정희, 방응모, 김활란, 홍난파를 비롯해 시인 박팔양, 선구자의 윤해영,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 무용가 최승희와 조택원, 가곡 ‘가고파’ ‘목련화’ 등을 작곡한 김동진, 선구자 작곡가 조두남, ‘고향의 봄’을 지은 아동 문학가 이원수, 애수의 소야곡 가수 남인수,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지은 작곡가 박시춘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대거 포함된다. 또 교육학술 분야와 해외 친일인사인 조선독립신문 윤익선 사장, 현상윤 전 고려대 총장, 고승제 전 서울 상대 교수, 3선의 서범석 전 의원, 고재필 전 보건사회부 장관, 진의종, 신현확 전 국무총리,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 선생 등 문화예술계 1,686명의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장지연 선생의 경우 주필로 있던 경남일보 1911년 11월2일자에 천장절(메이지천황 생일기념일)을 축하하는 한시와 일장기를 싣고 경축행사를 주관했으며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가 처단한 이또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시를 발표했다. 안익태의 경우 일본 천황을 찬양하는 노래를 작곡하고, 나치 독일에서 ‘일독회’란 친 나치 단체에 가담했던 사실이 드러나 친일명단에 포함되었다. 최승희는 10여 회에 걸쳐 국방헌금 7만여 원의 국방헌금을 헌납하고 일본 군부대 공연을 했다는 이유 등으로 포함되었다. 또한 일본 군수성 총동원국 군수관리관보 출신으로 박정희 사후 5공화국 출범 전까지 국무총리를 지낸 신현확과 이원수의 경우 일본군 지원병 칭송시를 쓴 게 드러났다.
특히 해외에서 활동한 친일인물들도 포함되었다.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이 활발히 진행됐던 만주는 일제가 항일세력 탄압을 위해 보민회, 간도협조회, 훈춘정의단, 간도특설대 등의 ‘토벌대’를 운용한 곳으로 윤상필과 윤익선, 염창섭과 같이 토벌대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인물들이 2차 친일명사에 다수 포함됐다. 1934년 일제가 만주에 식민통치국가인 만주국을 세우면서 만주국의 관료와 경찰로 활동한 친일 인사들도 많이 포함됐다.
한편 당사자·유족·후학들의 참회가 이어지기도 했다. 하동·창녕 군수를 지낸 이항녕은 “적어도 고등관 이상의 관리는 친일파”라며 “일제 청산은 부역자들의 사죄가 앞서야 한다”고 반성했다. 전남 화순군수 등을 지낸 현석호 역시 “나는 일정 때 고급관리로서 협력한 친일파”라고 고백했다. 파인 김동환의 아들 김영식 씨는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후손들을 직접 만나 사죄했고 한용수·한창수·한상용의 후손 한진규 씨는 지난 2005년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 발표 후 “조상들의 업적과 함께 친일행동도 후손이 책임지는 것으로 한국사회를 조금씩 바꿀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을 갖는다”고 밝혔다.

中 교과서에는 ‘위인’, 高 교과서에는 ‘친일파’
친일잔재는 정치·경제·사회를 비롯해 문화·예술에도 많이 남아있다. 특히 문화·예술인들이 친일은 그들의 작품이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데다 친일은 했어도 뛰어난 재능으로 예술 발전에 공헌했다는 재능론이 겹치며 객관적인 평가를 어렵게 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조사한 ‘친일파 상훈 현황’을 보면, 현제명, 윤극영, 유치진, 김기창 등 친일행적이 뚜렷한 예술인 55명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듬해인 1962년 3.1문화상, 5.16민족상 등 각종 상을 124개나 휩쓴 것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현제명과 홍난파는 분명 한국이 낳은 훌륭한 음악가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친일행적이 속속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부 중학교 음악 교과서에서는 민족음악의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다시 친일파로 둔갑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고 있다.
뿐만 아니다. 1969년 8월23일 서울 남산공원에 있는 10m높이의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은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기 세운 것으로 이 동상을 만든 사람은 바로 해방 이후 홍익대와 이화여대 조각과 교수를 지낸 김경승(1915~92)이다. 그는 동생 김인승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친일 미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1942 6월3일자 <매일신보>에서 “구라파 작품의 영향과 감상의 각도를 버리고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 것은 새 생명을 개척하는 대동아전쟁 하에 조각계의 새길을 개척하는 것이다. 나는 이같이 중대한 사명을 위하여 미력이나마 다하여 보겠다”고 말해 천황을 위해 화필보국(畵筆報國)을 맹세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 동상 말고도 남산 안중근 의사상, 서울 도산공원 안창호 선생상(1973), 서울 종묘공원 월남 이상재 선생상(1989) 등 독립투사들의 동상을 도맡아 제작했다. 특히 미대 원로교수들의 친일행적을 거론하며 친일미술사 청산 소신을 밝혔다가 98년 교수재임용심사에서 탈락한 김민수 전 서울대 미대 교수의 6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는 복직투쟁은 친일미술이 왜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인지 느낄 수 있게 한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는 “예술의 자살이라 할 전쟁미술과 친일미술의 고통스런 기억과 대면하면서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 정리문제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1999년부터 남인수의 이름을 딴 가요제를 열고 있는 경남 진주시의 경우 지난해 7월 진주시는 친일행적이 드러남으로써 남인수가요제를 열지 않기로 결정, 음악인 등의 의견을 수렴해 새로운 가요제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남인수와 마찬가지로 친일행적이 드러난 대중음악인들의 이름을 딴 경북 성주군의 백년설가요제는 2005년부터, 경남 마산시의 반야월가요제는 2007년 이후 잠정중단 된 상태다.

친일후손 조상들 땅 찾기 승소율 50% 넘어
지난 1997년 이완용의 증손자가 부동산 관련 소송에서 승소하자 친일 후손들의 ‘땅 찾기 소송’이 활발해졌다. 당시 서울고등법원 제2민사부는 판결문에서 “매국노의 후손이라도 법률에 의하지 아니한 재산권 박탈은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완용 후손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를 계기로 1990년대 이전에는 1건에 불과했던 친일파 후손들의 소송건수가 지난 2006년 2월 법무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소유권 확인 소송은 모두 26건으로 국가승소 5건, 국가일부패소 5건, 국가패소 3건, 소취하 4건이며 심리 중인 9건이다. 이는 승소율이 무려 50%가 넘는 수치다. 이처럼 친일후손들이 조상들의 땅 찾기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친일파들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이 어마어마하기 때문. 대표적인 친일파인 이완용과 송병준이 보유한 것으로 확인된 토지는 95만 평으로 시가 수조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송병준은 80만 평 규모의 토지와 임야를 일제시대에 제공받았으며, 이완용도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를 조사한 상황에서 14만 5,000여 평의 토지를 제공받았다. 하지만 국가자료가 정리된 곳이 주로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향후 전면적 조사가 이뤄진다면 이들 명의의 일제시대 부동산 규모는 수백만 평 이상에 달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가운데 지난 2001년 1월 서울지법에서는 친일파인 이재극의 후손이 국가를 상대로 낸 ‘땅찾기’ 소송을 각하했다. 당시 대법원은 친일파의 후손이라도 법적으로는 재산의 소유권을 보호받아야한다는 판례를 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하급 법원의 판결이 대법원 판례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 재산에 대한 논의가 봇물 터지듯 공론화됐고 친일재산환수법 제정과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출범을 위한 토대가 마련됐다.
지난 2005년 2월 열린우리당 최용규 국회의원에 의해서 발의된 ‘친일재산환수법’이 지난 2005년 12월 말부터 시행, 이 법안은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과 직위를 받았거나 을사보호조약 등의 체결을 주장한 고위공직자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고, 이들이 당시 취득했거나 이들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국가가 환수토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와 관련, 국가를 상대로 토지를 돌려 달라고 소송을 낸 친일파 민영휘와 이재완 후손이 소송을 포기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지난 2007년 5월6일 대법원에 따르면 2차대전 당시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한 것으로 알려진 친일파 민영휘의 후손이 2004년 12월 국가를 상대로 토지소유권확인 청구소송을 냈다가 1심 재판을 받던 지난 2006년 말 소송을 포기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민영휘의 후손 20여 명은 ‘친일·반민족 행위자 재산환수 특별법’이 소급 입법 등을 금지한 헌법에 어긋난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또 지난해 5월에는 친일파 송병준의 후손이 같은 헌법 소원을 제기했지만 헌제는 “위헌 법률 심판 제청 신청에서 기각 결정이 내려진 적이 없어 헌법소원 심판 청구 자체가 부적법하다”며 각하했다. 앞서 을사늑약 감사사절단에 포함된 이재완의 후손도 지난해 3월 시가 1억 3,000만 원 상당의 경기도 남양주시의 땅 570여㎡에 대한 소유권 보존등기 말소 청구소송을 냈다가 소송을 포기했다.
“친일파들이 유공자라고?” 국립묘지까지 지배한 친일파
국가 서훈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몇몇 친일인사들이 국립묘지에 순국지사들과 나란히 누워 있다는 사실 또한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힘든 친일청산의 과제 중 하나다.
사후 40년 만에 안두희에 의해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어 세간의 화제를 불러 모았던 전 특무부대장(현 기무사) 김창룡. 그는 일본 관동군 헌병대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는 일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런데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김씨의 묘는 김영삼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로 정권이 이양되던 1998년 2월 어수선한 시기를 타서 이장되었다. 민족문제 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김창룡에게 무슨 공이 있어서 과를 덮을 만큼 그 공을 얘기를 하는 건지 설사 그 공이 있다하더라도 그 공이 민족반역 행위 친일 구역행위를 넘을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토로했다. 이에 시민단체들은 정권인수기의 어순선함을 노려 전격 이장된 것으로 기무사 내부의 누군가에 이해 조직적으로 계획된 일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며 김창룡의 묘를 이장하라고 요구했지만 국방부는 이장 요구를 받아들일만한 법적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으로서 1981년 3월 사망 당시 성대한 국민장을 치르고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갑성에 대한 뚜렷한 친일행적은 밝혀진바 없지만, 아나키즘 계열의 독립운동가 김성수와 임의택(임정서무국장), 유우석(유관순 열사의 오빠) 등이 이갑성의 친일행적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애국선열 관련단체의 한 관계자는 “도대체 누구의 가치판단으로 이루어졌는지 몰라도 그 역시 같은 친일파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선영이나 일반묘지에서 호화묘지를 꾸민다 해도 눈총을 받을 것인데 하물며 국립묘지에 묻힌 것은 분명히 재고되어야 한다”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 혐의자’를 보면 1966년 국민장을 받은 윤익선을 비롯해 1977년 대통령표창을 받은 김동호, 대통령장을 받은 김성수, 서춘, 이은상, 이갑성 등 총 21명에 달한다. 이러한 독립유공자 사이에 뒤섞인 친일 경력자를 찾아내기 위한 1차 조사가 1980년대 초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였던 고 임종국 선생과 광복회가 나서 진행했다. ‘광복회원친일유공자 명단’이라는 이름으로 작성된 문건에는 친일 경력을 가진 23명의 명단이 포함돼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를 이어받아 지난 2004년 2월 ‘독립유공자 가운데 재심이 필요한 사람’들의 명단 20명을 국가보훈처에 제출했다. 이 가운데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으로 대통령장을 서훈 받은 이갑성 등 9명은 ‘조사가 더 필요한 사람’으로, 같은 대통령장이 서훈된 김성수 등 11명은 ‘친일 행위가 뚜렷한 사람’으로 꼽혔다. 국가보훈처는 그동안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1996년 한 차례 서춘, 김희선, 박연서, 장응진, 정광조 등 5명의 친일 전력자에 대한 서훈을 박탈하는데 그쳤다.

명분만 앞세운 보훈사업, 역사적 아픔만 되풀이
이처럼 그동안 정부는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세우고 독립유공자들의 공로를 후세에까지 전한다는 취지 아래 매년 광복절 등 역사적인 기념일날 이들에 대한 포상을 실시해왔다. 그러나 그동안 정부에서 선정한 유공자 등에는 다수의 친일파들이 섞여 있는 웃지못할 역사적 아픔이 재연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차원의 보훈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50년 4월14일 군사원호법이 공포·시행되면서다. 이 법은 공비를 토벌하다 전사한 사람이나 군 복무 중 순직한 자의 유족에 대한 원호 업무가 목적이었던 사업으로 항일 독립유공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보훈 지침도 들어 있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강력한 후원아래 친일세력과 연계해 반공을 국시로 성립된 권력이었기 때문에 김구를 비롯한 우파 독립운동 진영은 부담스런 정적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훈의 첫 출발을 반공으로 삼았고 그러한 유공 과정을 통해 친일세력들은 ‘반공 애국투사’로서 대한민국에 당당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박정희 정권기에 들어서며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과 포상이 본격화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다양한 형태의 국가적 기념사업과 독립유공자에 대한 보훈사업을 전해하였고, 1962년 4월16일 군사정부는 군사원호칭을 원호처(現 국가보훈처)로 승격시키고 그 대상도 군사원호 대상자 중심에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추가로 포함시켰다. 같은 해 문교부 산하에 독립유공자 공적 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1963년 내각 사무처에 독립유공자 상훈심의위원, 1968년 총무처에 독립유공자 상훈심의위원, 1977년 원처에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 등을 설치해 이전의 정권과는 달리 적극적인 보훈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독립유공자에 대한 공적 조사와 상훈 심의는 친일 행위자를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을 임명하거나 수상자로 포함시키면서 원칙과 순수성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친일단체나 일제 통치기관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국립현충원 내 국가 유공자 묘역, 애국지사 묘역 등에 진짜 독립유공자들과 함께 안치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기도 했다.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해 세월의 엇갈린 역사를 바로잡아야
그렇다면 해방된 지 64년이 지나도록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지난 1993년 김원웅 의원은 이완용 후손들이 친일의 대가로 형성한 재산을 되찾는 것을 보고 친일파들의 재산몰수를 위한 ‘민족정통성회복특별법’을 추진했으나 상정도 되지 못하고 무산됐다. 이에 김원웅 의원은 “결국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이 친일측 기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라고 토로했다.
실제로 해방이후 부일협력자 관료직 진출 상황을 보면 총 155명 중 국무총리가 배두진, 정일권, 최규하 등 7명에 달하며, 내무부장관이 18명, 법무부 장관이 13명, 치안국장이 7명, 대법관이 14명이다. 이러한 배경엔 ‘미군정3년’과 60~70년대 이승만 정권이 친일세력을 정부요직에 대거 등용시킨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는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36년이라는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독립하였다. 그 후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고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자행된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승만이 이끄는 집권당인 한민당에는 정치·사회·경제 부문 등에 다수의 친일파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더욱이 경찰과 군대의 90%정도가 친일파나 과거 일본군에서 복무하는 자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처럼 실질적 정권을 친일세력에 둠으로써 이승만 정권은 약점을 메우기 위해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강제로 반민특위를 해체시키기에 이른다. 친일청산을 목적으로 등장한 반민특위는 8개월 간의 활동을 끝으로 ‘반공’정신에 가려져 그 빛을 보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 뒤 4.19 혁명이후 친일파 청산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일본군 사관학교 출신인 박정희의 정권장악으로 인해 친일파 청산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후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의 개혁바람을 타고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가운데 친일 협의자의 서훈 취소를 검토하다가 무산됐다. 이는 검토대상에 모 신문사 창업주가 포함되자 국회 보건사회위원회에서 당시 친일행위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보훈처를 거꾸로 질책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처럼 해방이후 친일청산의 노력을 보이는 듯 했으나 사회적·정치적 배경 때문에 남한에서는 친일파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친일행위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는 한 친일문제는 현재형일 수밖에 없다. 역사적 과오를 덮어두는 것은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프랑스의 반민족행위자 처리과정을 보면 처벌대상이 150~200만 명중 실형선고가 15만 8,000명, 사형선고가 1만 1,500명, 그중 사형집행이 3,800여 명에 달한다. 그러나 우리나의 경우 처벌대상 7,000여 명 중 조사대상은 682명, 기소 221명, 실형선고는 7명에 불과하며 실제 형 집행은 단 한명도 없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동안 우리나라의 친일청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잘 알 수 있다.
당시 친일행위를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난 상태다. 그들에 대해 형 집행은 할 수 없지만 잘못된 판단으로 그들이 독립유공자로 둔갑해 서훈을 받고 국립묘지에 나라를 위해 싸운 독립투사들과 나란히 안장되어 있는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올해는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통치에 맞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온 민족이 떨쳐 일어섰던 3.1운동 90주년을 맞은 해이자 광복 64주년이다. 이제 그들의 친일행각을 알리고 부끄러운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며 64년이란 세월의 엇갈린 역사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 매국노 : 이완용(경술국적), 송병준(정미칠적), 이지용(을사오적) 등 21명
■ 수작·습작 : 박영효(후작), 민영린(백작), 고희경(습작), 송종헌(습작) 등 138명
■ 중추원 : 민병석, 윤치호 등 335명
■ 일본제국회의 : 김명준(귀족원의원), 박중양(귀족원의원), 박춘금(중의원의원) 등 11명
■ 일제관료 : 이두환(도장관), 김대우(도지사), 손영목(도지사), 계응규, 윤길중 등 1,207명
■ 경찰 : 노덕술(경사·경부), 홍순봉(경사·경부), 하판락(고등경찰) 등 880명
■ 군 : 어담(장교), 홍사익(장교), 감창룡(헌병), 최윤주(헌병) 등 387명
■ 판·검사 : 민복기, 조용순 등 228명
■ 친일단체 : 선우순, 이용구 등 484명
■ 종교 : 갈홍기(개신교), 노기남(가톨릭), 이종욱(불교), 신용구(천도교), 정만조(유림) 등 202명
■ 문화예술 : 서정주(문학), 이광수(문학), 홍난파(음악무용), 현제명(음악무용), 김은호(미술), 심형구(미술), 문예봉(연극영화), 유치진(연극영화) 등 174명
■ 교육학술 : 김활란, 백낙준 등 62명
■ 언론출판 : 박희도, 홍양명 등 44명
■ 경제 : 문명기, 박승직 등 55명
■ 지역유력자 : 문재철, 송병문 등 69명
■ 해외 : 박석윤, 윤상필, 이오익, 홍순봉, 손창식, 이학로, 이기동, 엄인섭 등 910명
<전체 4,776명(중복자 포함 5,207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