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 ‘공공의 적’인가 ‘시대의 희생양’인가

납치된 일본여성 ‘다구치 야에코’ 가족과의 극적인 만남
“나는 가짜가 아니다” 지난 정권이 나를 그렇게 만들려 해

2009-04-09     신현희 기자

‘김현희’를 기억하는 세대는 적어도 삼십 대 이후부터 일 것이다. 미모의 북한 여성 테러리스트. 당시 KAL기 폭파 사건은 115명의 목숨을 잃게했고 국민들을 흥분과 혼란에 빠지게 했다. 뿐만 아니라 13대 대통령 선거와 88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우리나라에는 치명적인 사건이었고, 국제사회를 술렁이게 했다. 1990년 사형 판결이 확정된 후 보름만에 특별사면된 김현희씨는 한때 책 집필이나 강연 등의 대외적 활동을 했으나 자신의 경호를 맡았던 전직 안전기획부(현재는 국가정보원) 정씨와 결혼한 1997년부터 공식활동을 전면 중단했다. 특히 KAL기 폭파사건 조작설을 담은 소설이 출간된 2003년 말부터는 철저한 은둔생활을 해왔다.

역사적인 만남, 일본의 납치자 문제 밝히는 중요한 역할
김현희씨는 3월11일 오전 11시에 북한에서 자신의 일본어를 가르친 여성인 다구치 야에코 가족들과 특별면담을 한 뒤 12시 30분 경에 공동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날 기자회견장에는 국내 외 100여 개의 언론사 기자들로 북적였으며, 특히 일본 NHK방송, 교토통신, 마이니치, 요미우리신문 등 300여 명의 취재진이 일본인 납북자 문제와 관련해 김씨의 발언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열띤 취재경쟁을 펼쳤다.이날의 만남에 대한 심경을 묻는 질문에 다구치 야에코의 오빠인 이즈카 시게오씨(70)는 “오늘은 역사적이고 감동적인 날이다. 오래전부터 만나고 싶었다. 오늘에서야 만나게 되었지만, 한국과 일본 정부 양측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또 그녀의 아들인 이즈카 고이치로씨는 “이번 만남을 통해 어머니의 존재를 확인해 기쁘고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확신을 받았으며, 오늘 만남이 일본인 납치자 문제의 진실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왜 이제야 만날 생각을 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언젠가는 꼭 한번은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며 “다만 그동안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었으며 이제야 양국의 협조로 만나게 됐다”고 말했다. 또 “결혼 이후 사회와는 거리를 두고 생활했으며, KAL기 사고 유족들의 아픔을 생각해 조용히 살고 있었다”며 “지난 정부시절 많은 일들을 겪었으며, 현 정부에서 지난 일을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일부에서 공공연히 나돌고 있는 KAL기 폭파 사건 조작 의혹에 대해 김씨는 “분명한 것은 폭파사고는 북한이 저지른 것이라는 사실이다. 20여 년이 지나서도 명확한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단호히 말했다. 북한은 그동안 1978년 실종된 다구치의 납북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지난 2002년 9월 일·북 정상회담 때 ‘다구치는 1986년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무덤이 유실돼 유골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씨의 주장에 의하면 다구치씨는 1987년에도 일본어를 가르쳤다며, 북한에서는 죽었다가도 살아나고 살았다가도 죽을 수 있다며 다구치씨의 생존에 대한 여운을 남겼다.

“다구치씨의 아들을 만나 엄마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이즈카 고이치로씨는 다구치 야에코가 납치될 당시 1살이었다. 엄마에 대한 기억 같은 건 없다. 스물한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친엄마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서른두 살이 되어서야 엄마의 가장 최근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아주 힘들게…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친엄마가 살아있다는 희망만은 버리지 않았다. 국가든 이념이든 그런 것들은 상관없다. 누가 이 청년의 지난 세월을 보듬어 줄 것인가.
김현희씨와 다구치 야에코씨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8년 초다. 다구치씨가 북한에 납치된 이후 10년 만이다. 1987년 11월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범인으로 체포된 김씨에 대한 한국 당국의 조사 과정에서 “나는 이은혜라는 일본인 여성으로부터 일본어를 배웠다”는 말이 흘러나온 것. 이후 이은혜가 누구인지 신원을 밝히기 위해 조각 맞추는 노력을 이어갔다. 1991년 일본 경찰은 “이은혜는 1978년 도쿄 이케부쿠로 인근에서 납치된 다구치 야에코씨다”라고 확인했다. 김씨는 1995년 ‘이은혜, 그리고 다구치 야에코’란 책을 통해 두 사람의 친밀했던 관계를 밝혔다. 다구치씨의 아들인 이즈카 고이치로씨가 1998년 이후 친엄마를 접하게 된 것도 이 책을 통해서다. 김씨와 다구치씨의 가족 간 면담이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은 올해 1월15일경. 오랫동안 침묵해 오던 김씨가 12년 만에 NHK 인터뷰를 통해 입을 열면서 “다구치씨의 아들을 만나 엄마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고 밝힌 것이다. 김씨가 이즈카 고이치로씨를 만날 때는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자신의 아들을 대하듯 애틋한 감정을 표시했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가슴 찡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김씨는 “북한에서 (저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다구치씨 아들과 가족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기쁘기도 하고, 감격스러워서 며칠 전부터 잠을 이룰 수 없었다”면서 “한·일 정부가 인도적인 차원에서 다구치씨 가족을 만나게 해줘 감사드린다”고 12년 만의 외출소회를 밝혔다.

김현희 절규 “나는 가짜가 아니다”
김현희씨는 지난 정권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고 말했다. 특히 “김현희는 가짜다”는 의혹들이 제기되면서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이는 모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방송이 되었다. “아무 증거도 없는데 김현희 말만 믿고 어떻게 믿느냐. 김현희는 완전히 가짜다. 어디서 데려 왔는지 모르지만 절대로 북한 공작원이 아니다”는 말이 공중파를 통해 방송되었다. 김현희씨는 국정원이 MBC의 취재에 협조하라는 강권이 있었으며 자신을 바보로 만들려 했다고 말하며, 실제 당시 국정원으로부터 이민을 권유받았다고 했다. 김씨는 지난 좌파정권이 KAL기 사건을 재조사하도록 몰아가는 것은 사실상 김정일에 대한 면죄부를 주려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KAL유가족 모임인 ‘KAL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는 사건 이후부터 각종 자료와 상황을 정리하면 폭파가 직접적인 원인이 아닐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KAL858기 잔해를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고, 검찰이 수사와 재판기록 공개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히 의심의 여지를 남긴다.
정부로서도 이러한 진실공방에 대해 마음이 편하지 만은 않다. 김씨는 11일 기자회견에서 “KAL기 사건은 북한이 한 테러고, 저는 가짜가 아니다”고 밝혔다.
노무현 정권 때 다구치 야예코씨의 가족이 김현희씨를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김씨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고 한다. 북한정권이 군사적 도발을 선언한 가운데서도 이런 만남이 이뤄지게 된 데는 이명박 대통령의 김현희씨에 대한 호의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KAL기 폭파는 이 대통령이 현대건설 회장일 때 일어난 사건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이 바그다드에서 귀국하던 현대건설 노동자들이었다. 지난 대선 때 당시 이명박 후보는 “내 평생 두 번 울었다. 한번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다른 한번은 KAL기 폭파로 현대건설 노동자들이 죽었을 때였다”고 말했다.
이번 정권이 진실을 명쾌히 밝힐 수 있을지에 귀추가 주목된다.

아내로 엄마로 평범하게 살 수 있기를
22년이 지났다. 미녀의 테러리스트가 40대 중년 여성이 되었다. 두 자녀의 엄마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아니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행복하겠다는 김현희. 하루라도 편히 잠들 수 있었겠는가. 자서전을 쓰고 받은 인세 8억 5,000만 원을 KAL기 유족회 복지재단에 출연하는 등 조금이나마 지난 과오를 씻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유족 중 일부는 그 돈으로 김현희씨가 가짜임을 밝히는데 쓰고 있다. 슬픈 현실이다. 유족들에게 평생 용서받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업보다. 하지만 정부로부터 혹은 국가기관으로부터의 외압은 더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KAL기 폭파가 가능했던 경위
 

1987년 11월29일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향하던 KAL858기가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폭파되어 전원이 사망했다. 범인 김현희(당시 24살)씨는 13대 대선을 하루 앞둔 12월15일 서울로 압송됐다. 이후 1990년 사형이 확정됐지만 보름만에 특별사면됐다.
KAL기 폭파시 김씨의 임무는 두 개의 폭탄을 갖고 다니는 일. 10월 27일, 폭파 당시 자살한 주범 김승일씨가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의 호텔에서 받은 라디오에 폭약을 채운 것과 양주병에 액체폭약을 채운 것이다. 김씨는 쇼핑백에 이 두가지를 넣어 다녔다. 베오그라드에서 바그다드행 비행기를 탈 때도, 바그다드 공항에서 내려 여객 대합실로 가는 보안 검색대에서도 통과됐다. 이때 검색대 여직원이 김씨가 분리하여 갖고 다니던 네 개의 배터리를 압수, “이걸 갖고 비행기를 탈 수 없다”며 쓰레기통에 넣었다고 한다. 김씨는 이걸 꺼내 먼저 검색대를 통과한 김승일에게 건네주었다. 김승일은 “이건 라디오다. 검색이 지나치지 않냐”며 항의하자 검색원이 배터리를 갖고 타게 했다고 한다. 김현희씨는 “이게 운명의 갈림길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때 배터리를 압수당했다면 임무를 포기하고 돌아가야 했다. 몇몇 의혹 제기자들은 과연 전쟁 중이던 이라크의 공항에서 폭탄이 든 쇼핑백이 검색대를 어떻게 통과할 수 있었는지, 폭파의 원인은 다른데 있다고 주장해 왔다.
국정원의 재조사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라디오폭탄의 원료로 추정되는 PLX는 엑스레이로도, 금속탐지기로도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 안기부는 1986년 9월 김포공항에서 일어났던 폭파사건(5명 사망) 현장에서 콤포지션-4의 성분을 검출했다. 이 폭파사건은 북한이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안기부는 같은 맥락에서 김현희씨가 들고다닌 라디오폭약을 콤포지션-4로 추정한 듯하다.  김현희씨는 “라디오폭탄이 액체폭탄을 터트리는 일종의 기폭제이므로 붙여서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KAL858기가 흔적없이 사라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