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반세기, 우리의 비극은 어디까지인가
조국이 철저하게 외면한 납북자들 ‘그들은 조국 땅을 밟고 싶다’
통일부에 따르면 2008년 11월말 현재 지난 1994년 최초로 살아 돌아온 국군포로 故 조창호를 비롯해 안순용, 장무환, 그리고 유골로 돌아온 백종규 등 지금까지 북한을 탈출해 입국한 국군포로는 76여 명(08년 6명)과 가족 159명이다. 그리고 2000년 9월 처음으로 귀환한 ‘납북어부 이재근’을 시작으로 진정팔, 김병도를 포함해 단 7명(08년 1명)이 탈북 후 국내에 귀환한 것으로 나타났다. 통일부는 현재 560여 명의 국군포로가 북한에 생존해 있고, 납북억류자는 494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도 북녘 땅에는 약 4,200여 명이 억류되어 있다. 이제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분단의 비극적인 현실을 방관 할 수 만은 없다.
조국에 버림받고 철저히 잊혀졌던 국군 포로
‘군번 212966 육군 소위 조창호’ 지난 2006년 11월 고인이 된 그는 남북분단의 현실 속에서 희생된 인물이다.
故 조창호 씨가 잃어버린 43년의 세월은 한국전쟁과 함께 시작된다. 조 씨는 1950년 연세대 1학년 재학 중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육군본부 직속 포병 101대대 관측담당 소위로 참전했다. 그러나 1951년 강원도 인제 전투에서 중국군에 포로가 돼 43년 동안 북한에 억류됐다.
스무살의 꽃다운 나이에 전쟁터로 달려갔던 故 조창호 씨는 1951년 ‘한석산전투’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되면서 악명 높기로 소문난 만포교화소, 아오지특별수용소, 강계교화소로 전전하며 인간 이하의 삶이 어떤 것인지 체험하게 된다. 그가 13년만의 형기를 마치고 출감했을 때는 500명의 포로들 중에서 단 50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화풍 광산과 중강진의 호화광산의 막장에 다시 배치되었다. 그곳에서의 고된 강제 노역은 규페증과 뇌졸중 등 그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힘든 생활로 나이 60을 넘기며 故 조창호 씨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묘비에 이름대신 꼭 ‘남쪽에서 온 사람’이라 써 달라고 유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1994년, 그는 그토록 오고 싶어했던 조국땅을 밟았다.
故 조창호 씨가 살아서 돌아오기까지 조국에 있어 국군포로들은 철저히 잊혀진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은 조국을 잊지 못하고 목숨을 건 탈출을 하고 있다.
1997년 12월에 귀환한 안순용 씨는 이미 2년 전에 사망했고 1998년 9월 귀환한 장무환 씨는 45년 만에 아내와 눈물겨운 해후를 했다.
국군포로 유골1호인 백종규 씨의 딸 백영숙 씨는 ‘남한에 묻어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유골을 안고 2003년 4월 북한을 탈출, 그토록 그리던 남쪽 땅을 밟았다. 한국전쟁 당시 청년이었던 그들은 대부분 70세가 넘어서야 조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지난해 국군 포로 남쪽 땅을 밟은 국군 포로는 6명, 가족 7명에 불과하다. 1994년 이후 북한을 탈출해 입국한 국군포로 76명과 가족 159명만이 귀환했다.
1953년 정전 당시 유엔군 사령부에서 추정한 국군 실종자는 8만 2,318여 명이지만 이 가운데 정전 협정에 따라 최종 송환된 국군 포로는 8,343명에 불과하다. 현재 북한에 살아남은 국군포로는 2,000여 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국방부는 지난해 11월 당시 560여 명이 북한에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반면, 미국의 경우 10여 년 전부터 유해 송환 협상을 벌여 1990~1994년 유해 11구를 인도, 1997년엔 290만 불을 지불하고 유해 5구를 인도했다. 미국은 죽은 사람의 유골이라도 찾기 위해 노력하는데 우리나라는 살아있는 사람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난 2003년엔 자신이 국군포로라고 주장하는 탈북자 전용일 씨(72)가 중국 공안에 체포된 일이 있었다. 국군포로라면 법적으로는 우리나라 국민이다. 하지만 그는 조국으로부터 “알아서 한국에 가라”는 말만 들은 채 외면 받았다.
냉험한 분단선, 북한이 부인하고 남한이 외면하는 그들이 지금도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사조차 확인하기 힘들다. 냉전의 희생자이면서 구석으로 밀려버린 국군포로들의 슬픔이 가시지 않는 한 분단의 비극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국군포로들이 스스로 노력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국가가 할 일은 아니다.
조국이 버린 납북 어부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
故 조창호 씨의 뒤를 이어 최초로 살아 돌아온 납북어부 이재근 씨 또한 남북한의 분단이 낳은 또 하나의 희생자다. 1970년 서해 연평도 해상에서 조기잡이 중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치됐던 이재근 씨는 1998년 북한을 탈출해 2년간 중국에서 숨어 지내며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으나 “왜 자꾸 국가에 부담을 주려고 해”라는 말만 들어야 했다. 그 역시 조국으로부터 외면당했다. 2000년 9월 납북자 가족모임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던 이재근 씨의 북한에서 삶은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 씨는 북한의 대남간첩 양성기관인 중앙당정치학교에서 2년 6개월간 남파간첩 특수훈련을 받았다. 그곳에서 사격, 폭파, 침투, 살상기술 등 고된 훈련이 계속되었고 이 씨는 하루 빨리 남파되어 자수하겠다는 생각으로 훈련을 견뎌냈지만 그것마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상이 불순하고 파견되면 자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북에서 최하류층의 생활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남한에 남겨진 그의 가족들에게도 이 씨가 납북됨과 동시에 비극의 시작이었다.
납북이 시작되었을 당시 귀환자들은 환영을 받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들은 온갖 고문과 수사 속에 고통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정부는 ‘납북어선, 어부카드제, 요시찰인 카드’ 등을 통해 납북자들과 그 가족들을 제도적으로 특별 관리하며 감시와 제재를 가해왔다. 우연히 발생한 납북은 그들이 평생 짊어져야 하는 무서운 족쇄가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2001년 11월에 귀환한 진정팔 씨는 34년 만에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으며 2003년 6월 귀환한 김병도 씨 역시 그토록 바라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생존명단에도 없었던 김 씨는 이 씨가 생존사실을 알림으로써 귀환에 성공한 경우다. 지금 현재로는 이재근, 진정팔, 김병도 단 3명만이 귀환한 상태다.
이런 가운데 납북자가족모임은 1960~1970년대 납북된 어부 31명이 1985년 여름 강원도 원산에서 집단 교육을 받으면서 함북 나진 혁명전적지를 참관한 후 찍은 단체사진을 지난해 5월19일 공개했다. 사진에는 북한 지도원 2명과 납북자 31명 등 총 33명의 모습이 담겨있다. 납북자가족모임은 사진속의 납북 어부 중 22명의 신원을 확인, 확인된 22명의 납북자는 김성철, 김용봉, 김우성, 김의준, 김일만, 박달모, 박시동, 박천, 배현호, 서태봉 ,손운수, 윤종수, 이병기, 이성균, 정건목, 정봉식, 정철규, 최영철, 최효길, 탁채용, 홍복동, 홍성길 씨 등이다.
납북자가족모임의 최성용 대표는 “신원이 파악된 22명 중 일부는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납북자 명단에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정부가 납북자 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호년 통일부 대변인은 “22명 중 13명은 납북피해자 480명 명단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했지만 나머지 9명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며 “풍량, 조난 등의 사고로 실종 처리됐다가 추후 납북된 것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귀환 납북자 등에 의해 이름이 정확히 파악돼야 하는데 신원파악이 쉽지 않아 납북여부를 확인하기 힘든 상황이다”고 설명했다.
미확인 납북어부는 김성철, 김우성, 박천, 서태봉, 손운수, 이성균, 정복식, 정철규, 탁채용, 홍성길 씨 등이며 정부가 파악한 납북자 480명 중 7명은 현재 북한에서 돌아와 남한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로써는 납북자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 지 알 수 없고 다만 귀환한자들로부터 기억되는 납북자들의 생사만 확인 될 뿐이다. 납북자 가족들은 귀환자들을 통해서 가족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하기 위해 그들과 만남을 갖고 있다.
남파 위해 강제 납북, 70년대 후반 빈번히 발생
그렇다면 북한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남한사람들을 북으로 납치했을까.
1960~1970년대는 남·북의 이념과 체제경쟁이 극에 달했던 시절로 수많은 사람들이 북한으로부터 납북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했다. 1970년대 후반 서해안 일대는 간첩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북한은 북한어선을 고깃배로 위장하여 NLL(서해북방한계선)을 넘기 일쑤였고 남한 고깃배를 납치했다. 납북자들의 93%를 차지하는 납북어부의 경우 1955년 ‘대성호’ 납북을 시작으로 1995년 제86호 ‘우성호’까지 총 3,756명이 납북되었고 아직도 486여 명의 어부들이 북에 억류된 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978년 군산기계공고 1학년이던 김영남(金英男·45) 씨가 간첩 김광현(金光賢)에 의해 납치되었던 무렵 서해안 일대에서는 모두 5명의 고교생이 실종됐고, 이들은 모두 간첩에 의해 강제 납북됐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이들 간첩들은 대남 침투 및 복귀 안내를 담당하는 노동당 조사부(지금의 작전부) 소속으로 ‘301해상연락소’는 공작원을 남쪽에 침투시키거나 임무를 마친 공작원을 북으로 복귀시키는 일을 하던 곳이었다. 김광현 씨는 자신이 받았던 훈련에 대해 “공작원들은 도주할 때 첫날 150리를 벗어나지 못하면 비트(비밀 아지트)를 파고 10~15일간 지령 수신만 받고 잠복하도록 교육받는다”고 말했다. 북한은 남한에 대한 정보를 추궁하며 이들에게 간첩교육을 시켜 다시 남파 하려했다.
남북한 긴장관계 완화 절실
그렇다면 분단의 비극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남북한이 상호 적대적인 대립 관계에서 벗어나, 이질성을 극복하고 동질성을 회복하여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또한 국토 분단에 의해 형성된 두 개의 체제를 하나의 민주적 체제로 통합하여, 한반도에 하나의 주권 국가가 존립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분단의 극복은 통일을 의미하며 이는 분단으로 인한 모순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 민족은 동일한 언어와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에 통일은 민족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며 손상된 민족적 자부심을 회복하기 위해, 또 분단으로 인한 남북한의 이질화 현상을 극복하고 분단에 따른 민족 구성원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도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남북한은 반세기 이상 단절된 채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 속에서 살아왔다. 상호간의 교류가 자유롭지 못한 지금의 상황이 앞으로도 계속 된다면 남북한은 전혀 다른 문화 집단으로 변해 버릴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러므로 민족의 이질화를 방지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분단을 극복하는 것은 절실히 필요하다.
지난 김대중 정부 시절 남·북한 간의 긴장관계를 완화하고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기 위해 햇볕정책을 내세워 비정치적인 교류(금강산 관광, 비료사업, 식량지원, 이산가족 상봉)를 시작했고, 정치논리(서해교전)에 민족공동체 틀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처들이 실행되었다.
이에 그동안 정치적인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대북정책과 반응을 달리했던 것을 정치적 외풍을 차단함으로써 남북한이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보여 줄 수 있었으며 반세기동안 단절된 남북의 관계를 한층 더 가깝게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정책적인 지원 절실
지난 2000년 8월 제1차 이산가족 상봉을 시작으로 매년 상봉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아직도 남한과 북한에는 많은 이산가족이 있으며 그 중엔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지고 조국을 그리워하며 회한의 나날을 보내는 사람도 적잖이 있다.
지난 2008년 9월 납북자가족모임 회원 20여 명은 어선을 타고 2일 강원도 고성군 거진항 앞바다에 나가 납북자와 국군포로의 조기송환 및 생사확인을 촉구했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비전향 장기수는 돌아갔는데 납북자와 국군포로의 아픔은 그대로”라며 “납북자와 국군포로 송환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해 달라”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대표는 “2000년 9월2일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송환됐으나 국군포로와 남북자는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는 특별법 제정 등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현 시점에서 남북분단의 비극이 낳은 그들의 아픔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그 비극을 어떻게 극복을 해야 하는지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정책적인 지원이 있어야 될 것이다. 이에 정부는 4월1일부터 귀환 국군포로에 대한 사회적응교육 실시를 규정한 개정 「국군포로의 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을 시행하고 있다. 사회적응교육은 장기간의 북한생활로 한국물정에 어두운 귀환 국군포로가 조기에 안정적으로 우리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경제·법률상식, 사회·문화 등에 대한 전반적 이해증진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다.
국방부는 해당 법률을 시행하기 위하여 지난 1월부터 동 시행령과 시행규칙의 개정작업을 추진해왔으며, 개정안에는 사회적응교육의 내용 및 기간, 절차 등에 관한 사항이 규정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국방부는 작년 12월부터 사회적응교육 시범사업을 실시 중에 있으며, 법률 시행과 함께 정식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정부는 앞으로도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한 책무이행차원에서 국군포로의 안전한 국내 송환은 물론 안정적인 국내 정착지원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밟혔다. 지금까지 강제 납북자들의 무사귀환을 책임져야 할 국가는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납북자들을 외면해 왔고, 남아있는 가족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기보다는 그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일삼으며 인권을 유린해 왔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50년 동안 방치해 온 납북자들에게 있어서 조국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조국은 그들에게 있어 삶의 등불이자 목적이었으며 그들이 바라던 마지막 꿈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들의 아픔을 계속 외면한다면 분단의 상처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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