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물결로 물든 美 대륙, 역사의 新 새벽 열다
인종의 벽을 넘은 준비된 경제지도자 오바마…‘오바마노믹스’ 본격 가동
미국 대선 레이스의 출발점이자 민주·공화 양당의 첫 경선인 아이오와주 코커스(당원대회)에서부터 유권자들은 ‘변화’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첫 흑인 대통령이란 이변을 낳았다.
지난 11월 4일 밤 11시(현지시간) 미국 언론들은 캘리포니아와 워싱턴 등 서부주들의 투표가 마감되는 순간 민주당 버락 오바마 후보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일제히 선언했다. 1976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확보했던 50.1%를 넘은 51.6%의 총 득표율로 1964년 린든 존슨 대통령 이후 민주당에 최대의 압승을 안겨줬다. 이번 선거에서 전체 백인 유권자 중에서는 43%가 오바마의 손을 들어줬다. 백인 여성보다는 백인 남성들이 39%대 41%로 오바마 지지가 앞섰던 것도 눈에 띈다. 또한 젊은 백인 유권자의 54%가 오바마를 지지, 미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20대 백인 유권자로부터 45% 이상의 지지를 얻은 민주당 후보는 한 명도 없었다. 또한 전체 유권자의 13%를 차지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출구조사 결과 95%라는 절대 다수가 오바마를 지지했다.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히스패닉 유권자 3명 가운데 2명(66%대 31%)이 오바마에게 표를 던졌다.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는 펜실베이니아에서 55%대 44%로 일찌감치 승리를 낚았다. 그러나 보수적인 백인층을 겨냥했던 매케인의 전략은 경제위기에 대한 불안감이라는 벽을 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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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 63% “경제가 선택 기준”
이번 오바마의 압승은 지난 8년간 조지 부시 대통령의 실패한 경제정책과 대외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과 경제위기가 한데 얽힌 결과이다. 출구조사에 참여한 유권자 가운데 63%가 경제를 후보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언론들은 오바마의 당선을 두고 현직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최대 승리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했다.
그동안 오바마는 최악의 경제위기를 초래한 조비 부시 정부의 정책 실기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해왔다. 오바마는 부시 정부의 실책을 보완할 감세정책, 경기부양책, 자원개발정책으로 유권자들에게 호소했고, 백악관 긴급회동에서도 자신의 정책과 주장을 굽히지 않고 밀어붙이는 든든한 모습까지 보여줬다. 대선 막판 불거진 세금 논란에도 의연하게 대처해 결국 판정승을 이끌어냈다.
오바마는 위기 대처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2년여 대선 전 과정 가운데 최대 위기를 맞았던 당시 오바마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수십 명의 유권자 앞에서도 차분히 유세했다. 이때 보인 오바마의 당당한 모습이 지지율 역전으로 이어져 유권자들의 표심을 단단히 굳히는 계기가 됐다.
또한 오바마는 블루컬러는 물론 전문직 종사자, 서비스업자, 자유의지론자, 농촌인구에 이르는 광범위한 계층으로 지지세력을 늘려갔던 것도 승리요인으로 작용했다. 오바마는 슈퍼화요일을 앞두고 가장 큰 서비스노조인 국제서비스노조연맹(SEIU)이 오바마 지지로 돌아서면서 180만 명의 전문직 지지층을 확보 할 수 있었다. 곧이어 미국 전역에 슈포마켓 직원 130만 명이 회원사로 있는 식품상인연합노조(UFCW)의 지지도 얻게 된다. 미국의 지방경제가 어려워지자 오바마는 농촌지역을 공략해서 많은 표를 얻었다. 전체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미국 농촌지역은 전통적으로 공화당 표밭이었는데 경제가 어려워지자 변화를 지향하는 오바마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자유진보 연합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오바마는 2004년 대선 당시 민주당 예비 후보 하워드 딘(Dean)의 교훈도 잊지 않았다. 딘은 경선 시작 전 젊은 네티즌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선두 돌풍을 일으켰지만, 정작 표 대결에서는 존 케리(Kerry) 후보에게 패했었다. 오바마는 유세장에 운집한 청년들에게 일부러 “저들(경쟁후보측)은 여러분이 투표장에는 나오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라며 자극했고 결과는 젊은 백인 유권자의 54%라는 경이적인 기록세웠다. 특히 오바마는 적재적소에 자신이 지닌 모든 자원을 투입, 대선 TV 광고가 필요한 막판에는 과감하게 황금시간대 30분을 사들였다. 그 결과 최고 시청률로 공화당 존 매케인 후보의 막판 추격에 쐐기를 박을 수 있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꾸밈없는 태도로 언론을 최대한 활용해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최대 난적이자 강력한 라이벌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물리쳤다. 이처럼 오바마는 언론의 힘을 잘 알고 이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보기 드문 정치인이다. 지난 1960년 대선에서 존F. 케네디가 리처드닉슨을 근소한 차로 누르는데 기여한 일등공신이 바로 TV였다. 그리고 48년이 지난 지금 초선의원 오바마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고 대통령에 이르기까지는 인터넷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회원 수 1억 3,000만 명으로 미국 내 최대 회원 수를 자랑하는 마이스페이스에서 ‘오바마의 친구들’은 31만 명에 이르러 힐러리 18만 9,000명과 매케인 4만 7,000명을 압도했다. 경쟁사이트인 페이스북에서도 오바마 서포터스는 66만 5,000명으로 힐러리 12만 7,000명, 매케인 7만 9,000명과 비교가 안 됐다.
유권자들과 함께 호흡하는 오바마의 모습도 표심이 작용했다. 독일 베를린에서, 콜로라도주 덴버의 전당대회에서, 그리고 공장·사무실에서, 시장에서 만난 이들과 한결같은 모습으로 대화했다. 오바마는 외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에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하와이로 달려가는 인간적인 모습도 보여줬다.
무엇보다도 오바마 승리의 요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선거캠프 운영과 엄청난 자금력이다. 150만 명이 넘는 기부자로부터 선거자금을 받았고, 인터넷을 통한 선거조직 구축으로 선거운동의 새로운 획을 그은 오바마는 300만 명에 이르는 소액 기부자들을 확보, 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선거자금을 모았다. 소액기부액은 4억 4,000만 달러로 전체 기부금의 96%가 소액 기부금으로 받은 것이다. 2008년 6월 19일 민주당 대선후보로 추대된 직후 오바마는 연방 선거보조금을 받지 않고 대선을 개인모금으로 치루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이 제도가 도입된 지 32년이 되었는데 보조금을 거부한 후보는 오바마가 처음이다.
오바마 내각, 백악관에는 어떤 변화의 바람이 부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 함께 일할 백악관·정부 주요 인사들이 속속 내정되면서 그의 인사 스타일이 드러나고 있다. 백악관은 측근으로 국무장관에는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내정됐다. 국방장관은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의 유임이 유력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정부에서 일했던 사람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쓰겠다는 의지를 과시하려는 것이다.
오바마 당선인은 지난 11월 24일 흑인 여성인 멜로디 반즈(43)를 백악관 국내정책위원장에, 데지레 로저스(49)를 대통령 특보 겸 백악관 의전비서관에 각각 내정했다. 백악관 의전 비서관에 흑인 여성이 내정된 것은 미 역사상 이번이 처음이다.
반즈 국내정책위원장 내정자는 오바마 당선인의 싱크탱크인 미국진보센터(CAP)의 정책 담당 부소장을 맡아온 ‘정책통’이다. 앞으로 의료보험 및 교육을 비롯해 이민, 형사정책 등 오바마 당선인이 역점을 두고 있는 주요 내부과제를 맡게 된다. 시카고 출신 여성 사업가인 로저스는 오바마 부부 및 백악관 선임고문에 내정된 밸러리 재럿과 친분이 두텁다.
선임고문에는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시카고 출신인 밸러리 재럿(52)을 내정, 그녀는 오바마의 ‘왕누나’로 불리며 최측근으로 꼽히는 시카고의 부동산업자다. 오바마 부부의 18년 지기로 오바마 당선 이후 정권 공동 인수팀장을 맡아 내각 인선과 주요 정책 결정에 힘써 왔다.
대통령 직속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에 로런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54)이 내정됐다고 전했다. 서머스는 향후 백악관의 경제사령탑으로서 내각의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과 함께 ‘오바마노믹스’를 이끌게 된다. 경제계에서는 8년 만에 정부에 복귀하는 서머스가 재정확대를 통한 경기부양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민주당 고위 당국자들은 티모시 가이스너(47) 뉴욕연방은행 총재를 재무장관에, 로런스 서머스 (53)를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에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를 상무장관에 내정했다.
내각은 독립성이 강한 거물급 인물로 주로 채우고, 백악관의 핵심 보직은 그를 추종하는 시카고 사단으로 포진시키고 있다. 각료들의 활발한 토론으로 정책 방향을 정하는 한편 백악관에서는 측근들의 보좌로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최대 과제는 경제위기 극복, 오바마 ‘경제살리기 플랜’ 본격 가동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의 타개책을 비롯한 각종 경제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어떤 구제금융안을 내놓을 것인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가운데 “한나라에 두 대통령이 있을 수 없다”며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오바마 당선자는 지난 11월 24일 재무장관 지명자 등 경제팀을 직접 소개하며 신속하고 강력한 경제회생책 추진을 다짐했다. 오바마 당선자는 또한 정권이양기의 정책공백이 없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오바마의 경제팀이 모두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의 인맥으로 채워지면서 루빈의 정책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이날 소개했다. 이날 오바마 당선자가 차기 재무장관으로 발표한 가이트너와 대통령 직속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으로 지명된 로런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 등이 모두 루빈 사단인 것. 오바마의 경제팀 인선의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도 루빈이 장관 시절 비서실장을 지내다 그가 씨티그룹으로 옮기자 같이 움직였던 마이클 프로먼과 루빈의 아들 제임스 루빈이었다. 이들은 모두 90년대 클린턴 행정부시절 재무장관이던 루빈 아래서 균형예산, 자유무역, 금융규제 완화라는 루빈의 경제학(루비노믹스)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이룬 멤버들이지만 지금은 금융위기 상황 때문에 루빈사단의 정책은 루비노믹스와 다를 것이라고 타임스는 지적했다.
지난 11월 7일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미국 자동차산업의 구제에 목소리를 높였다. 새 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한 거창한 청사진을 제시하기보다 실물경제 부문에서 급격히 무너져가고 있는 핵심축을 확실히 살려놓겠다는 의지를 선명하게 드러낸 오바마는 조지 부시 행정부가 250억 달러를 자동차업계에 지원키로 했으나 업계는 추가로 500억 달러를 더 요구하고 있다.
오바마의 이런 입장은 판매부진에 따른 자금난에 허덕이는 미국 자동차업계를 그대로 놔두면 미국의 제조업과 실물 경제 전반이 붕괴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앞으로 오바마 정부가 펼쳐갈 경제정책, 즉 ‘오바마노믹스’의 방향을 집약적으로 시사한다.
오바마노믹스는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개입과 보호무역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변화는 오바마의 당선 이전에 월스트리트발 금융위기의 수습과정에서 이미 시작됐지만 진보와 혁신을 표방한 40대의 흑인 민주당 상원의원인 오바마의 당선으로 이런 변화는 거대한 추진력을 얻게 됐다. 이는 오바마 스스로의 의지라기보다는 시장의 여건이 이렇게 방향전환을 이루게 한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강화는 오바마의 당선 이전부터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오바마로서는 시장 안팎의 강력한 지원속에 규제 강화의 박차를 가하면 되는 것이다.
오바마는 이미 후보시절 금융감독 기능의 효율적인 재편을 강조,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증권거래위원회(SEC), 예금보험공사(FDIC), 통화감독청(OCC) 등으로 복잡하게 흩어져 있는 금융감독기능을 일원화해 효과적인 감시·감독을 펴겠다는 것이다.
무역부문에서도 오바마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오바마는 후보시절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재협상하겠다고 공언했으며 한미 FTA도 내용이 보완되지 않는 한 비준이 곤란하다는 입장을 강조, 환경과 노동기준의 강화, 인위적 환율조작의 근절을 공정무역의 전제조건으로 삼아 교역상대국을 압박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와 관련, 지난 11월 15일 버락 오바마 당선인은 의회에 미 경제를 회복하기 위한 새로운 구제금융안을 신속히 통과시킬 것을 촉구했다.
오바마 당선인은 이날 유튜브를 통해 방영된 주례 라디오 연설에서 주요 20개국(G20) 금융정상회의를 위해 워싱턴에 모인 각국 지도자들이 글로벌 금융위기의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세부 이행 방안은 사실상 내년 4월 30일 이전에 개최될 두 번째 회의로 이월된 셈인데, 이는 오바마 행정부의 출범으로부터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으로 시간이 충분치 못하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크리스토퍼 파디야 미 상무부 국제통상담당 차관은 “새 정부가 1930년대 이후 가장 심한 수준으로 보호무역주의를 취하라는 정치적 압력을 받을 것”이라며 “오바마 당선자가 이 압력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여부는 향후 한 세대동안 세계 경제의 진로는 물론 미국의 경제적 입지를 규정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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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그는 누구인가
“저는 케냐 출신 흑인 남성과 캔자스 출신 백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를 키워준 백인 외할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때 패튼 군단에서 복무했고, 할아버지가 바다 건너 전쟁터에 가 있는 동안 백인 외할머니는 폭격기 생산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가장 좋은 학교들을 나왔고, 세계 최빈국 중 한 곳에 산 적도 있습니다. 노예의 피와 노예 소유주의 피를 함께 물려받은 흑인 여성과 결혼해서 이 혈통을 사랑하는 두 딸에게 물려주었습니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피부색의 형제자매, 조카, 삼촌과 사촌들이 3개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연이 저를 일반적인 후보자들과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4일(현지시간) 제44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는 지난 3월 18일 필라델피아에서 행한 ‘인종 연설’에서 다인종·다민족·다문화적 특성을 지닌 자신의 삶을 이렇게 축약했다.
1961년 8월 4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태어난 오바마는 어린 시절은 부모의 이혼과 재혼으로 순탄치 못했다. 케냐 루오족 출신인 오바마의 아버지 버락 오바마 시니어는 하외이대에서 역사상 첫 아프리카 학생으로 경제학을 전공한 수재로, 1963년 하버드대에서 박사과정 장학금을 받게 된 아버지는 홀로 하와이를 떠났고, 어머니는 역시 대학에서 만난 인도네시아 유학생 롤로 소에토로와 재혼해 66년 아들과 함께 인도네시아로 이주했다.
어머니는 오바마의 교육에 헌신적이었다. 한 주에 다섯 번씩 새벽 4시면 아들을 깨워 3시간 동안 영어를 가르쳤다.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을 읽게 하고, 미국 최초의 흑인 판사 서굿 마셜에 대해 말해주기도 했다. 어머니의 재혼이 다시 파경을 맞자 오바마는 어머니, 여동생 마야 소에토로-응과 함께 외조부모가 사는 하와이로 돌아왔다. 그해 크리스마스 때 오바마는 하와이에서 아버지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재회했다. 아버지로부터 선물받은 농구공으로 농구를 시작한 오바마는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농구를 했다“고 한다. 그는 푸나호우 고교 시절 농구선수로 활약했고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운동으로 농구를 꼽는다.
인류학도이던 어머니는 현지 연구와 사회운동을 위해 하와이로 돌아온 지 3년 만에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갔다. 이후 외조부모의 집에 홀로 남은 오바마는 인종문제로 정체성 갈등을 겪으며 술과 담배, 마약에 손을 댔다. 그런 그를 따뜻이 감싸 안은 이는 바로 외할머니 매들린 던햄이었다. 미국 일간 시카고트리뷴은 “오바마의 어머니가 세계를 보는 눈을 키워준 ‘날개’였다면, 외할머니는 바위 같은 안정감과 미국인으로서의 뿌리를 심어줬다”고 전했다. 오바마의 고교 시절은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하지만 이 무렵 겪은 아웃사이더로서의 방황은 오바마에게 ‘쓴 약’이 된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관용을 체득함으로써 그는 ‘코스모폴리턴 오바마’로 거듭난다.
고교를 졸업한 오바마는 하와이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간다. LA의 옥시덴털대에 입학한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오바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인종 분리정책)를 반대하는 집회를 주도하는 등 정치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좀 더 시야를 넓혀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뉴욕 컬럼비아대 정치학과에 편입, 마약을 끊고 음주도 자제하며 학업에 열중했다.
오바마는 1983년 대학을 마친 뒤 짧은 컨설팅회사 생활을 거쳐 85년 풀뿌리 사회운동가의 길로 접어든다. 시카고의 가난한 흑인들이 모여사는 ‘사우스 사이드’에서 주민들의 주거·교육환경 개선 등을 위해 헌신했다. 후일 오바마는 이때의 경험이 정치력과 소통 능력을 키워줬다고 술회한다. “빈곤과 같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치와 권력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오바마는 3년간의 시카고 생활을 마무리하고 하버드대 로스쿨에 들어간다. 이 시절 로스쿨 학회지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하버드 로 리뷰’의 첫 흑인 편집장이 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자서전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쓰게 된 것도 이 일이 계기가 됐다.
여름방학 때 인턴 실습을 위해 찾은 시카고의 로펌에서 반려자 미셸 로빈슨을 만났고, 두 사람은 1992년 결혼한다. 오바마는 “공직 선거에서 아내와 경쟁하면 내가 틀림없이 질 것”이라며 “아내가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게 다행”라고 말할 만큼 미셸을 높이 평가한다. 부부에게는 두 딸 말리아(10)와 사샤(7)가 있다. 결혼과 함께 ‘제2의 고향’ 시카고에 정착한 오바마는 민권소송 전문 변호사와 시카고대 로스쿨 교수로 일한다. 유권자 등록 운동을 시발점으로 차근차근 기반을 쌓은 그는 96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98년 주 상원의원으로 재선된 오바마는 더 큰 꿈을 품고 연방 하원의원에 도전하지만 민주당 내 경선에서 고배를 마신다. 오바마의 정치적 도약대는 2004년 7월 민주당 전당대회였다. 존 케리 당시 대선후보에 의해 기조연설자로 선정된 그는 “진보적인 미국, 보수적인 미국은 없다. 흑인의 미국, 백인의 미국, 라틴계의 미국, 아시아계의 미국도 없다. 하나의 미국이 있을 뿐이다. 불안 속에서도 담대한 희망을 갖자”고 역설했고 넉 달 후 오바마는 흑인으로서 유일하게 연방상원에 입성했다.
2006년 오바마가 자신의 연설 내용을 딴 두번째 저서 <담대한 희망>을 펴낸 것은 더 큰 꿈을 향한 신호탄이 되었다. 그는 2007년 2월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옛 주정부 청사 앞 광장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지난 1월 민주당의 첫 경선지인 아이오와에서 승리를 거두며 거센 돌풍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미국 44대 대통령으로 내년 1월 20일 취임을 앞두고 있다.
■ 미국 대선 일정
· 1월 3일 공화ㆍ민주당 양당, 아이오와주 코커스로 주별 예비선거 실시
· 2월 5일 ‘수퍼 화요일’ 20여 개주에서 예비선거 동시 실시
· 6월 3일 공화당 예비선거 마무리
· 6월 7일 민주당 예비선거 마무리
· 8월 25~28일 민주당 후보 지명 전당대회(클로라도주)
· 9월 1일~4일 공화당 후보 지명 전당대회(미네소타주 세인트 폴)
· 11월 4일 대선 본 선거(유권자들이 지지 후보가 속한 정당의 선거인단 선출)
· 12월 5일 선거인단 투표(선거인단이 대통령과 부통령 선출)
· 2009년 1월 6일 대통령 당선자 공표
· 2009년 1월 20일 제 44대 대통령 취임식 일정으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