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쓰지 않으면 사라진다 ‘작가의 작가’ 제임스 설터의 문학적 유언
[시사매거진=여호수 기자] 우리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오래된 기억들은 점점 뒤로 밀려나 어느새 잊혀 지곤 한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잊고 살던 기억이 떠오를 때면, 어떻게 그 기억을 잊고 살았는지 새삼 놀라울 때가 있다.
퓰리처상과 함께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문학상으로 꼽히는 펜포크너상을 받은 작가 제임스 설터는 ‘인생에서 중요한 일은 오로지 기억이 나는 일뿐이다.’라고 말했다.
제임스 설터의 부인 케이 엘드리지 설터는 그가 죽고 난 뒤 어마어마한 양의 상자들을 발견했다. 그 상자는 생전 작가가 당장 사용하는 게 내키지 않는 구절이나 이름, 사건 등을 훗날 집필할지 모를 작품에 쓰기 위해 적어둔 메모와 초고까지 전부 꼼꼼히 모아둔 것이었다.
그의 부인은 상자들을 모두 꺼내 그 가운데 최고의 글들만을 추려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을 선보였다.
책은 ‘나는 왜 쓰는가’로 시작해 총 10장 35편의 산문들이 담겨있다.
여기에는 설터가 사랑했던 소설가 이사크 바벨에 대한 집요한 연구, 그레이엄 그린과 나보코프 등 당시 생존했던 위대한 작가와의 생생한 인터뷰, 알프스를 등반한 인물들, 인공 심장을 개발한 박사, 어느 스키 챔피언의 이야기 등 제임스 설터가 기억하고 탐구하고 기록한 사람, 장소, 시절들이 촘촘하다.
설터는 또한 프랑스에서 자신의 아이가 태어났던 기억, 프랑스의 음식과 식당, 여행의 경험,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이야기, 미국 스키 도시의 여왕 격인 아스펜에서의 삶 같은 것들을 씀으로써 ‘냉혹한 시간의 질서에 지지 않고 결코 끝나지 않는 순간’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본문에는 ‘미망이라 해도 상관없지만, 나의 내면에는 우리가 했던 모든 것이, 그러니까 우리 입 밖으로 나온 말들, 맞이한 새벽들, 지냈던 도시들, 살았던 삶들 모두가 한데 끌려들어 가 책의 페이지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고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존재한 적도 없게 되고 만다는 위험에 처할 테니까. 만사가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때가 오면, 오직 글쓰기로 보존된 것들만이 현실로 남아 있을 가능성을 갖는 것이다.’는 구절이 있다.
기억은 축적되지 않고 감정은 소진되며 진심은 언제나 퇴색될 것이라 생각한 설터는 영구히 보존하고 싶었던 세상, 붙잡고 싶었던 순간, 그가 살던 세계의 모습을 기록했다.
설터의 시간은 이제 사라지고 없지만 사라질 것을 염려해 미리 써둔 덕분에, 그가 살던 세상은 그의 죽음에도 아랑곳없이 책 안에서 살아 숨 쉰다. ‘우리는 모두 죽고 잊힐 것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죽었지만, 그의 말대로 쉬이 잊히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