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뜨는 벌처투자

2008-03-31     글_신혜영 기자
위기의 부실기업 겨냥한 기업사냥이 시작됐다
최근 금융경색과 증권시장 침체로 벌처투자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 지난 2월 1일 파이낸셜타임즈는 부실기업을 사들여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가치를 높인 후 되파는 ‘벌처투자’의 시대가 왔다며 워런 버핏, 월버 로스 등이 신용경색으로 타격을 입은 미국기업사냥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최근 증권사부터 은행, 미디어 회사는 물론 일반 소비재회사에 이르기까지 부실화되는 곳이 늘면서 투자활동이 벌처투자자들의 움직임이 활발해 지고 있다.

벌처투자란 위기시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하는 투자를 말한다. 벌처투자의 벌처(Vulture)는 즉 독수리, 무자비한 사람이란 뜻을 가진 단어로 말 그대로 독수리 같이 죽은 동물과 같은 부실기업을 싼 값에 공격적으로 사들여 이를 높은 값에 되파는 일을 통해 큰 수익을 챙기는 투자를 말한다. 지금처럼 금융위기나 경제위기가 닥쳐 올 경우 벌처투자자들에게는 오히려 큰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미국의 경제위기가 지속되면서 이러한 벌처투자자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벌처투자자들에겐 금융시장 혼란은 저가매수의 기회
최근 미국발(發)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촉발한 금융위기로 미국 기업 주가가 급락세를 보이자 벌처투자자들이 금융시장의 혼란을 틈타 저가매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신용 시장의 동요는 저가 매수세력과 위험을 감수하려는 투자자들에게 더없는 기회이며, 급락장 속에서 실제 가치보다 많이 떨어진 자산을 발굴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투자라는 주장이다.
파이낸셜타임즈는 지난 2월 1일 “과거 수년간 높은 주가 상승에 따른 기업인수 비용 급등과 사모펀드 맹공에 밀려 관망세를 보여 온 벌처펀드들이 최근 금융경색과 증권시장 침체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주로 은행 등 금융업에 군침을 삼켜 왔으나 최근에는 업종을 가리지 않고 인수에 나서고 있다는 게 관련 업계의 분석이다. 국제신용평가기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최근 벌처펀드의 구입 리스트에는 보험, 주식중개 등 금융ㆍ증권 분야 외에 미디어, 소비재 산업 등 경영 위기에 처한 제조업체가 모두 올라와 있다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다. 현재 미국은 차압 주택 등 매물이 넘쳐나면서 헐값에 건져서 한몫 단단히 잡아보겠다는 투자 열기 또한 뜨겁다.
부동산 컨설턴트인 잭 맥카브에 따르면 “현재 마이애미비치와 남부 플로리다에는 벌처투자자들이 모여들고 있다”며 “월스트릿의 투자 은행을 비롯해 의사 변호사들이 현성한 개별 투자그룹에 이르기까지 ‘멀티 빌리언달러’의 엄청난 자금을 동원한 벌처펀드들이 형편없이 추락한 이 지역의 콘도와 타운하우스 빌딩들을 매입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이애미 지역의 경우 안 팔리고 있는 콘도와 타운하우스가 2만 5,000채에 달하는데 35개월분의 재고로 매물이 넘쳐 나는 수준이다. 벌처투자자들은 부동산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빌딩 전체를 매입하기도 하고 몇 개 층, 또는 개별 부동산을 사기도 한다. 매입한 다음 좀 고쳐서 팔기도 하고, 완전히 다른 용도로 전환해 세를 주거나 팔기도 하고, 때를 기다리며 보유하기도 한다. 지역 시장이 회복하는 조짐이 보이는 때가 바로 이들 벌처투자자들이 큰 이익을 챙기는 날이 될 것인데, 그날은 2010년이나 2011년은 돼야 할 것이라고 다수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벌처투자 전문회사도 생겨나고 있다. 달라스에 본사를 둔 ‘홈베스터스(HomeVestors)란 벌처투자 전문프랜차이즈는 가맹업주로 참여한 파트너가 260명이 넘으며 지난 한해 35개주에서 7,100채 이상의 주택을 투매가에 사들이기도 했다.

美 기업사냥꾼들, 기업사냥을 시작하다
국제신용평가기관인 스탠더드앤푸어스(S&P)는 “브로커리지와 은행은 물론 미디어, 소비재 생산업계까지 경영위기에 처한 업체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벌처투자가들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대표적인 벌처투자가로는 ‘투자의 귀재’라 불리는 워런 버핏을 비롯해 윌버 로스, 론 페렐먼 등으로 이들은 현 금융시장의 혼란을 저가 매수의 기회로 보고 기업 사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기업사냥꾼으로 유명한 월가의 벌처투자 전문가 월버 로스는 지난 1월 25일 파이낸셜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경영난을 겪는 채권보증회사 한 곳을 인수하거나 신규 업체를 설립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현재 자금난에 처한 기업들에 투자, 구조조정으로 수익을 내는 40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설정해 보험이나 모기지 서비스, 자동차 부품 업체 등을 투자대상으로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특히 지난해 8월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가 본격화했을 때도 모기지대출 업체인 아메리칸홈모기지에 5,000만 달러를 대출하며 관련 투자에 의욕을 보이기도 했던 윌버 로스는 지난 2007년 8월 21일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지금이야말로 서브프라임 투자 적기”라는 뜻을 강조한 바 있다. 윌버 로스는 과거 광산과 자동차부품 업체 등 부실기업을 헐값에 사들인 후 비싼 값에 팔아 큰 시세차익을 남기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2002년부터 부도난 철강업체 다섯 곳을 사들여 만든 인터내셔널 스틸그룹(ISG)이라는 회사를 무려 매입가의 10배에 해당하는 45억 달러에 팔아치우는 솜씨를 보이기도 했다.
지난 수년간 기업 인수 시장의 매물 부족을 토로해 왔던 가치투자자 워런 버핏도 지난해 8월 16일 “금융시장 대 혼돈 때 진정한 기회가 온다”며 가장 먼저 투자 개시를 선언했다. 최근 몇 달간 총 60억 달러 상당의 딜을 성사시키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워런 버핏의 버크셔해서웨이는 현재 400억 달러의 현금 자산을 바탕으로 대형 금융회사나 산업체 매입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버크셔해서웨이는 이미 지난 2007년 2분기에 AA급 이상 우량 모기지 채권 투자를 1분기보다 배 이상 늘렸다. 미국 2위 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주식도 상당량 매수했다. 지난 1월에는 버크셔해서웨이의 자회사 버크셔해서웨이 인슈어런스를 차리고 지방자치단체들이 발행한 채권을 보증하는 사업도 시작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사태에도 불구하고 미국 지방채 시장은 활성화돼 있고 지방채의 절반 이상은 보험에 가입해 있는 상황이라 사업성이 있을뿐더러 버크셔의 높은 등급으로 보증을 선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히 워런 버핏은 유럽 보험사에도 관심을 보이며 지난 1월 23일 세계 최대 재보험사 스위스리 지분을 3%를 획득했다. 이 소식에 스위스리 주가는 급등하는 현상을 보였다.
이와 관련, 뉴 스타 에셋 매니지먼트 그룹의 가이 드 블로니는 “버핏의 스위스리 투자는 유럽 보험업종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라면서 “이들의 자본 상황이 양호한 편이고, 이는 금융 서비스 업종이 더 어려운 시기가 돼도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금 확대에 나설 수 있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이 외에도 투자은행가 출신의 J.크리스토퍼 플라워즈도 영국 생명보험사 프렌즈 프로비던트 지분 2.7%를 매입했다. 175년 역사의 프렌즈 프로비던트 역시 투자 소식이 전해진 뒤 이틀간 주가가 7.5% 뛰었다.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도 나섰다. 아이칸은 지난 1월 24일 은행 및 보험업을 하고 있는 과런티 파이낸셜 그룹 지분 9.8%를 획득했다고 공시했다.
아이칸은 “이 주식은 저평가 돼 있다”면서 “이 회사 경영진과 어떻게 주주들의 가치를 높이느냐에 대해 논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 핌코를 운영하고 있는 ‘채권황제’ 빌 그로스는 지난 2007년 8월 22일 “앞으로 3개월 간 저가매수에 나서겠다”고 선언하며 불과 하루 뒤 골드만삭스와 메릴린치 등 월가 투자은행들의 채권을 사들였다. 지난해 내내 보수적 투자전략을 취해왔던 그로스는 신용 위기로 월가 투자은행 채권의 수익률이 지나치게 올라(채권가격 하락) 투자 매력도가 커졌다고 공개했다. 특히 그는 서브프라임의 직격탄을 맞은 고위험 신용파생상품인 크레딧 디폴트 스왑(CDS)에서도 투자 기회를 발견했다고 덧붙였다.
화장품회사 레브론부터 증권회사 얼라이드바튼도 다양한 회사를 보유한 재벌 론 페렐먼도 기업 인수 기회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론 페렐먼은 파이낸셜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상황이야말로 매입 호기”라며 “다음 여섯 달간 매우 특별한 기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벌처투자자들은 위기시 자금을 보유했던 자금이나 창업한 자금을 통해서 인수합병을 시도한다. 일부는 주식시장에서 주식을 대량 매수를 하기도 하지만 일부는 막대한 부채를 지닌 기업에게 채권을 발행해서 그 채권을 갚지 못하는 순간에 바로 낚아채는 방식으로 인수합병을 시도하게 된다. 벌처투자는 서브파라임 모기지 같은 사태 같은 금융 위기 신호가 떨어지면 바로 자금을 모은다. 그리고 이러한 자금을 바탕으로 부실기업들만을 찾아서 분석을 하게 된다.

헤지펀드.사모펀드.무추얼펀드 등도 저가매수 기회 노려
한편, 신용 위기로 큰 어려움에 처한 헤지펀드와 사모펀드 업계도 이번 사태를 재도약의 계기로 삼으며 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분위기다. 일부 사모펀드(소수의 투자자로부터 모은 자금을 주식·채권 등에 운용하는 펀드)의 경우 벌써부터 당초 합의한 인수가격을 기회로 삼아 이용하려는 발 빠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최대 건축자재 판매업체 홈디포가 세 사모펀드 컨소시엄에 당초 인수 합의가 103억 달러보다 12억 달러 적은 가격에 도매사업부를 넘길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 베인 캐피탈, 칼라일 그룹, 클레이튼 뒤빌리에 & 라이스로 이뤄진 사모펀드 컨소시엄은 지난해 6월 홈디포의 도매사업부 인수를 선언한 뒤 불과 두 달 만에 인수 비용을 12억 달러나 깎는 데 성공했다.
일부 헤지펀드(국제증권 및 외환시장에 투자해 단기이익을 올리는 민간 투자기금)는 이미 신규 자금조달을 끝내고 M&A가 예정된 주식을 사들였고, 일부는 자금을 마련해 놓고 적절한 투자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뮤추얼펀드 업계도 빠지지 않는다. 파이어니어 하이일드 펀드의 트레이시 라이트 펀드매니저는 “시장 상황에 대한 투자자들의 우려는 이해하지만 상당수 채권 가격은 지나치게 저평가 상태”라며 “최근처럼 채권 유통시장에서 헐값에 채권을 매입할 수 있는 일은 한 세대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라고 강조했다.

저개발 국가 노린 벌처펀드 횡포 문제
최근 이처럼 저가매수가 활개를 치고 있는 가운데 저개발 국가들의 부채를 탕감해 주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이 ‘벌처펀드’의 주머니만 채워 준다는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엘리엇 어소시에이츠의 자회사인 켄싱턴 인터내셔널은 몇 년 전 아프리카 콩고의 국가부채를 1,000만 달러에 매입한 뒤 최근 소송을 통해 4,000만 달러를 받아냈다. 또 도니걸 인터내셔널은 잠비아가 루마니아에 진 부채를 액면가의 11%에 불과한 328만 달러에 매입한 뒤 5배에 이르는 1,500만 달러를 지난 2007년 초에 받아내는 등 원조액 일부가 고스란히 벌처펀드로 갔다. 이처럼 도니걸이 부채 매입가보다 높은 가격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과 잠비아의 부패가 결합됐기 때문이다. 도니걸은 루마니아의 권리를 사면서 프레데릭 칠루바 당시 잠비아 대통령에게 200만 달러의 뇌물을 주고 잠비아가 액면가대로 채무를 이행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냈으며 나아가 미국을 상대로 로비를 펼쳐 자금 상환에 유리한 법안을 만들게 했다. 문제는 드러난 벌처펀드의 횡포 사례가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 IMF와 세계은행은 최근 저개발 국가들을 상대로 한 벌처펀드의 소송 규모가 18억 달러에 이른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