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안과병원/ 김선태 병원장
2007-09-21 취재_남윤실 차장
한국의 시각 장애인으로서 3가지 박사학위를 소유한 한국의 남자 헬렌 켈러
실로암안과병원 김선태 병원장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그간 김 목사가 펼쳐온 사회봉사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2007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김 원장은 수상 상금 전액인 5만 달러를 한국 교회 그리고 사회에 바쳐서 빛의 소망을 주는 병원이 될 실로암 아이센터 건축을 위해 내놓기로 해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 시키고 있다. 시각 장애인으로서 안과 병원의 원장직을 맡아 하나님의 은혜를 어려운 이웃들에게 실천하고 있는 김선태 원장은 만나 그가 살아온 삶에 대해 들어보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세상의 어두움을 환한 빛으로 바꿔’
김선태 목사는 초등학교 4학년, 10살이 되던 해에 친구들과 뛰어 놀다가 호기심에 수류탄을 만지는 바람에 두 눈을 실명하고 부모마저도 잃은 절망의 고아가 되었다. 그는 살기 위해 친척집을 찾아 갔지만 그곳에서 학대와 욕설 그리고 굶주림의 생활이 계속되어 하는 수 없이 친척집을 나와 거지 방랑 생활을 시작하였다. 거지 생활을 하는 동안에 많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절망에 빠졌지만 그럴 때 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도를 드려 은혜를 받았다.
이 그를 엄습했다. 때로는 다리가 얼어 동상에 걸려 두 다리를 잘라야 할 위기가 있었는가 하면 상한 음식을 잘못 먹고 식중독에 걸려 죽음을 헤맨 적도 있었다. 남의 창고에서 잠을 자다 옻나무의 옻이 올라 온 몸이 짓물러 고름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난 예수님께 살려 달라고 깡통을 부둥켜안고 눈물 어린 기도를 하였다. 기도할 때마다 는 그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천사들을 그에게 보내어 회복 시켜 주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과 많은 분들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 깡통을 든 거지였지만 주일이면 꼭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구걸하여 얻은 돈 중에서 새 돈을 골라 하나님께 정성껏 헌금을 드렸다. 어느 날 아동 보호소의 교감 선생님께서 그에게 ‘Light House (빛의 집)’라는 곳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지만 그곳의 생활도 순탄치 못했다. 그는 서울로 상경하여 또 한번의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며 용기를 얻어 굴립 서울 맹학교에서 6개월 동안 영어, 수학, 점자를 배우게 되었다. 전쟁인 끝나고 어려운 시기에 우리나라에는 맹인을 위한 시설도 없었고 교과서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서의 남자 헬렌 켈러가 되기 위해 굶어가며 밤잠을 자지 못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정상인 학생들에게도 지지 않고 우수하고 모범적인 학생으로 선생님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았다. 맹인으로서 정상인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5.16 이후에 대학 입학이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서른 세 번 문교부를 찾아가 생명을 걸고 싸운 그는 결국 입학 허가를 받아 숭실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 장로회 신학 대학, 신대원과 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 신학 석사를 받고 미국 멕코믹 대학에서 목회학 박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숭실 대학에서 자랑스러운 동문과 명예철학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또한 그는 삼성 재단으로부터 홍상(사회 봉사상)을 받았으며 국가로부터는 국민 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절말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살던 그에게 장로회 신학대학교에서 개교 106주년을 맞으면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또한 병원 원장을 역임하고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후배를 가르치며 한일 장신대 겸임 교수로 선교 복지학과 선교학을 강의하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자서전 ‘서른 세 번 도전 끝에 이룬 신화'가 있고‘선교 복지학 개론’ ‘선교학 개론’이 있다.
아시아의 아이센터로 발전하기 위해 최선
김 원장은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교회를 세우고 맹인 교역자들의 사역을 도와주었고 천여명에 가까운 맹인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지도자 양성을 하였고 실로암 시각장애인 복지회를 설립하고 복지관을 통해서 맹인들에게 직업훈련을 시키고 있다. 그리고 고(故)한경직 목사님의 기도와 격려와 많은 분들의 협력으로 실로암 안과병원을 설립하고 지금까지 약 2만 7천여 명이 넘는 맹인들에게 개안 수술로 새 생명의 빛을 찾아 주었고 34만 명이 넘는 실명위기에 있는 대상자들에게 사랑의 무료안과 진료를 통해 실명을 예방하고 눈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귀한 일을 하였다.
1986년 2월 17일 개원한 실로암 안과병원은 그리스도의 선교적 사명을 본받아 어려운 이웃들에게 무료진료를 실시하는 병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농.어촌 섬지역촌, 나환자 정착촌, 소록도, 감호소, 전국 맹학교 및 보건소와의 자매결연을 맺고, 무의촌 지역의 저소득층을 위해 선교적 차원에서 1년에 40회 이상 무료진료 및 개안수술을 실시하고 있다.
김 원장은 앞으로 실로암 안과병원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저는 실로암 안과병원을 우리 한국사회와 교회에 실명예방과 개안수술을 위한 아이센터로 발전시켰으면 합니다. 사람이 50대 후반부터 60.70.80이 되면 백내장이 발생하고 당뇨로 인한 망막박리가 생기고, 녹내장으로 시야가 좁아지고 비문증이 생겨 마치 눈앞에 파리가 날아다니는 듯 한 불편을 줍니다. 또한 농, 어촌과 섬 지역에는 0.2이하의 저시력을 가진 실명위기에 있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모든 분들을 위해 실로암 안과병원이 사랑의 아이센터로서의 역할을 할 계획입니다”라고 말했다.
실로암 아이 센터는 지하 3~4층 지상 9층, 총 12~13층으로 건립하여 영혼과 육신을 전적으로 치료하는 전인치유 센터로서의 사명을 다하고자 할 것이다. 실로암 아이센터는 총 2,400평 규모의 건물로서 약 2년간의 공사 기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한국과 아시아의 사랑의 눈 센터 역할을 하게 되며 현재 설계가 진행되고 있다.
실로암 아이센터 건립을 위해 작게는 벽돌 한 장에 천원으로 시작하여 벽돌 열장, 백 방, 천 장, 형편대로 협력해 주실 것을 홍보하고 있다. 또한 한 평을 기증할 시에는 4백만원 ~4백 5십만원을, 진료실이나 입원실, 수술실, 검사실, 기타 한 실을 기증할 시에는 2천만원 ~2천5백만원, 한층을 기증할 시에는 4억원~4억5천만원이 소요되며 많은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 아이센터가 다 세워질 때에 기증해주신 분들의 이름을 아이센터 현관 동판에 새겨서 자손만대 믿음의 유산으로 보존하게 된다.
김 원장은 “어려운 형편으로 인해 수술을 받지 못하는 환자들에게 희망을 빛을 찾아 주기 위해서는 많은 분들의 사랑의 기도,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와 도움을 시각장애인들의 복지와 선교와 개안수술을 위해 협력해 주시기빌 바랍니다”라며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